소설리스트

강소군-20화 (20/250)

20

강소군은 탁자에 호패와 군패를 놓고 생각에 잠겼다.

동북 변방에서 남경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친우의 일가도 몰살을 당하고 난 뒤였다.

“공자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마님께서 얼마나 기다리셨는데.”

텅 빈 강부(康府)를 지키던 총관 모상은 젊은 주인이 돌아오자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기라도 하듯 쏟아놓았다.

어머니 주옥영은 아들이 오랑캐의 땅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석에 누웠다고 했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아들을 키웠기에 충격이 컸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친우 장선백의 일가가 몰락했다고 한다.

장연보 노장군과 아들 장홍, 그리고 손자 장선백까지 삼대가 죽거나 실종됐다.

모상은 강소군의 눈치를 살펴 말을 가렸다.

“전장에서 모두 사사됐다는데 분명치가 않습니다. 장홍, 장선백 두 장군은 살아서 피신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강소군의 정혼녀 장영영은 금의위를 피해 남경을 빠져나갔다고 했다.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서북방 전장으로 간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와 오라비를 찾아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중원에서 산동삼호를 쫓는 동창이 그녀의 홍옥비도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

강소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선백과 장영영 오누이의 행적을 찾아 북방을 헤매기를 삼 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는데 오누이의 부친 장홍이 남쪽으로 피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내려왔다.

장홍의 행적은 악양에서 끊겼다.

강소군은 물끄러미 탁자에 놓인 호패와 군패를 보았다.

장영영은 죽었을까?

눈앞에 홍옥비도라는 물증이 있었지만 한 가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사실을 부인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동창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선백, 영영. 살아 있는 것이냐?’

강소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느덧 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장씨 일가가 누명을 썼고 이를 벗긴다 한들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다.

장씨 일가의 복수를 할 수도 없는 처지다.

대장군 장연보 일가를 사사한 이가 바로 외할아버지이자 황제였던 주태다.

주태는 올여름 서북 전장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충신이었던 장연보를 직접 사사한 장본인이 죽었으니 자세한 내막을 들을 길이 없다.

새로이 황위에 오른 외숙부 주고치는 내막을 알고 있을까?

하지만 찾아갈 수가 없다. 강소군 그 역시 군을 무단이탈한 장수로 조정의 죄인 명단에 올랐을 것이다.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금의위가 쫓아올 것이다.

‘오라.’

그는 더 이상 피할 이유가 없었다. 금의위와 동창이 무얼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강소군은 남경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다시 한 번 장영영의 흔적을 밟아 볼 생각이다.

***

이튿날.

이른 아침.

삐걱!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삼도문의 대문이 열렸다.

한 줄기 바람이 먼저 대문을 나왔다.

따각. 따각.

한 사람이 말을 몰고 나왔다.

강소군이다.

왼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은 뒤로 하였는데 장창을 거꾸로 쥐고 있다.

삼도문의 대문 안에 초지항과 화천대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떠나는 강소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필마단기.

강소군의 눈에는 진을 치고 있는 천무방 응천대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삼도문의 정문에서 삼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대로를 막고 있던 응천대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저자는? 그 흉수 아닌가?”

“우선 막고 있게. 우 대주에게 보고하겠네.”

응천대원 하나가 뒤쪽 막사로 나는 듯이 달려가 보고하였다.

“대주님! 적이 나왔습니다.”

곧바로 막사의 휘장을 걷으며 우원송이 나왔다.

손에 언월도가 들려 있었다.

“몇 명이나 되냐?”

우원송이 삼도문 정문 쪽을 보며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용했기 때문이다.

“홀로 나왔는데 장원을 떠나려는 듯했습니다.”

“한 사람이라고?”

“네. 삼공자를 해쳤다는 그놈입니다.”

우원송이 자신의 언월도를 들고 막사 옆에 세워둔 말에 올랐다.

“전 대원에게 일러라. 장원을 빠져나가는 자는 모두 죽여라.”

우원송은 삼도문의 사방에 매복을 깔아 두었다.

“적이 교란작전을 펼 모양이다. 적의 기습에 대비하라.”

우원송이 말을 달려 삼도문 정문으로 향했다.

삼도문의 뒷산에도 곳곳에 매복을 두었기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 자신하였다.

우원송은 곧바로 강소군과 조우하였다.

따각, 따각.

강소군은 급할 것도 없다는 듯 천천히 말을 몰아왔다.

말발굽 사이를 지난 바람에 낙엽이 쓸렸다.

우원송의 시선은 강소군이 거꾸로 쥔 장창에 꽂혔다.

‘창?’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였다.

운살을 죽인 수단은 비도였다. 그 이전에 응천대원을 몰살시킬 때는 권장이었다고 한다.

‘설마 십팔반 병기에 통달했다는 건 아니겠지.’

우원송이 십여 장 거리를 두고 섰다.

뒤로 응천대원 십여 명이 도열하더니 화살이 재어진 쇠뇌를 겨눴다.

그 뒤로 병장기를 든 응천대원들이 집결하였다.

“멈추시오. 더 이상 나올 수 없소.”

강소군은 멈추지 않았다.

“듣지 못했나? 이 장원은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특히 너는 절대 나갈 수 없다.”

강소군이 우원송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막는 자는 죽는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나직한 목소리.

구양운과 운살, 그리고 수십 명의 응천대원을 격살한 자다.

응천대 무사들은 으스스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혼자 천무방 응천대를 상대하겠다는 뜻인가?”

“막는 자는 죽는다고 했다.”

다시 한 번 되뇌듯 강소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늦가을 바람이 우원송의 허리춤을 훑고 지나갔다. 으스스한 기운이 스며든다.

“나는 천무방 응천대주 우원송이라 하오. 귀하의 존성대명을 듣고 싶소.”

“….”

강소군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원송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무례한 자는 처음이다.

이 자가 고수라는 건 알고 있다.

이자를 잡으려면 응천대원 상당수가 희생될 것이다.

그 사이 연성결 등이 탈출을 도모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자를 놓아 보낼 수는 없다!’

우원송이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우원송이 옆에 심복에게 재빨리 일렀다.

“흑마대에게 지원을 요청해라.”

천무방주 구연강은 흑마대 일백 명을 선발대로 보내왔다.

자신이 당도할 때까지 한 사람도 삼도문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흑마대에게요?”

심복은 우원송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적은 한 놈이다.

삼도문에 있는 적도 다 합쳐 봐야 수십여 명에 불과하다.

응천대는 그 사이 다시 충원하여 백 명의 편제를 갖췄다. 그런데 흑마대를 요청하다니.

어쨌거나 명령은 명령이다.

심복이 강소군을 흘깃, 보고는 뒤로 몸을 날렸다.

우원송은 언월도를 들었다가 강소군을 향해 겨눴다.

“쏴라!”

우원송의 명령에 도열했던 응천대원들의 쇠뇌가 날았다.

피우웅.

강소군이 장창을 내밀어 좌우로 흔들었다.

쨍강!

팅!

화살들이 장창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역시 소용없군. 대체 이런 괴물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쇠뇌에서 쏜 강력한 화살을 튕겨낼 고수는 많지 않다.

우원송은 자신이 강소군을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히히힝!

강소군은 화살을 튕겨냄과 동시에 말고삐를 채었다.

두두두두.

말이 달렸다.

‘정말 홀로 우리와 싸우겠다는 건가?’

우원송은 기가 찼으나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응천대!”

“네!”

우렁찬 복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자를 잡는다! 죽여도 좋다!”

“존명!”

두두두두.

강소군의 말이 점점 속도를 붙이더니 어느 순간.

강소군이 말 등에서 뛰어올랐다.

장창을 앞세워 날아오는 모습이 마치 천신이 하강하는 것 같았다.

“좋다! 와라!”

선기를 빼앗긴 우원송은 그 자리에서 강소군의 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월도를 휘둘러 찔러오는 창을 쳐내려 하였다.

창과 언월도가 마주치려는 순간.

부웅.

강소군은 창을 머리 뒤로 한 바퀴 크게 돌리며 마치 봉처럼 우원송의 상체를 후려치려 하였다.

허공에 뜬 상태임에도 마치 땅을 딛고 선 것처럼 창을 휘두르는 기세가 세찼다.

“엇!”

우원송이 황급히 몸을 젖혀 말 등에 눕다시피 하며 상체를 노리는 창대를 피했다.

그런데.

강소군은 창을 거두는 동시에 우원송이 탄 말의 머리통을 밟고 솟아오르며 창을 아래로 찍었다.

말 등에 누운 우원송의 심장에 창이 박힐 판이다.

“으합!”

우원송이 자기도 모르게 기합성을 지르며 힘차게 몸을 옆으로 굴려 말 등을 벗어났다.

우원송은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마자 언월도를 비껴 몸을 막았다.

강소군은 우원송의 말 등에 선 채 한 손에 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뒷짐을 지고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원송의 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이 느끼지 못할 만큼 강소군의 동작이 가벼웠다는 뜻이다.

‘이, 이런… 추태를.’

순식간에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대주님을 구하라!”

응천대원들은 대주가 위기에 빠지자 검과 도를 앞세워 달려들었다.

강소군은 말 등에 서서 다가오는 응천대원을 응시하였다.

“모두 비켜라!”

우원송이 수하들을 물리고 강소군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

“뭐라고?”

연화심은 아침 일찍부터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었다. 연화심의 천성육십사식은 중랑의 지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갔다고?”

연화심은 황급히 찾아온 중랑의 말에 놀라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혼자 장원을 나갔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몸이 회복도 되지 않았을 텐데.”

“문주님과 이야기가 된 모양입니다.”

연화심이 부리나케 연성결의 거처로 달려갔다.

“아버님!”

마침 바삐 정문 쪽으로 가고 있는 연성결이 보였다. 연성결은 손에 도까지 들고 있다.

“강 대협이 가다니, 이게 무슨 말이지요?”

“나도 방금 보고를 받고 가는 길이다.”

연성결도 황당해하는 얼굴이었다.

이른 새벽. 강소군이 연성결을 찾아왔다.

“떠나겠습니다.”

연성결은 느닷없이 떠난다는 말에 아쉬웠으나 잡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삼도문이 사지(死地)나 마찬가지다. 삼도문을 벗어나는 길이 살길이니 잡을 수 없었다.

“감사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여러 목숨 잃었을 걸세.”

강소군이 돌아서는데 연성결이 붙잡았다.

“우리 형편이 좋지 않으나 손님 대접을 할 정도는 되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시게.”

강소군이 잠시 멈춰 생각하다 말했다.

“말 한 필과 창 한 자루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연성결이 화천대주 초지항을 불러 말을 챙기라고 하고 직접 병기고로 데려갔다.

“알다시피 본문은 도를 쓰네. 창이 많지 않지만 이 정도면 마음에 들 걸세.”

연성결이 벽에 걸린 하얀 창 하나를 뽑아 건넸다.

강소군이 흠칫, 주저하다 받아들었다.

창대에 색도 입히지 않은 창이다.

그러나 연성결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오늘 이 아침에 바로 갈 줄은 몰랐다. 그것도 홀로 가다니.”

연성결도 초지항의 전갈을 받고 황당해하여 정문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강소군이 떠난다기에 야음을 틈타 빠져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고수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둠을 타고 응천대 정도는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대문을 열고 홀로 적진을 향해 갔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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