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저녁이 되었다.
삼도문 객원 깊숙한 별채.
장무강과 형제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술을 마셨다.
안주는 식은 지 오래다.
위응환은 상세 때문에 술 대신 차를 마셨다.
심마백도 자중해야 했으나 기어이 술을 마셨다.
장무강이 문득 입을 열었다.
“오 년이 지났다. 그동안 동창이나 금의위가 조용하다는 건 소주께서 무사하시다는 뜻이라고 믿는다.”
기다렸다는 듯 심마백이 말했다.
“그동안 우리를 찾지 않았다는 건 좋은 소식이죠. 아마도 무사히 운남부를 넘어갔을 겁니다.”
위응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무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때 죽은 목숨이었다. 오 년을 더 살았으니 난 여한이 없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련이 남아 있음을 심마백이나 위응환이 모를 리 없다.
심마백이 말했다.
“소주께서도 오늘 우리를 탓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않았건만 산동삼호는 이미 뜻을 같이하였다.
연성결에게 구명지은을 입었으니 그 목숨을 돌려줄 생각이다.
세 사람의 표정은 결연하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구연강이 정말 직접 올까요?”
위응환이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보며 반신반의하듯 중얼거렸다.
“아들을 잃은 아비의 마음을 우리가 어찌 알겠나?”
장무강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연화심이 객잔을 찾았을 때 말렸어야 했다.
구양운이 죽지만 않았어도 해결할 방법은 있었다.
심마백이 코웃음을 치고는 술을 벌컥 들이마셨다.
심마백은 꽤 취했다.
“흥! 그놈의 아들만 목숨인가? 그 하잘것없는 놈 때문에 벌써 수많은 사람이 죽었잖아.”
심마백은 말하다 말고 분이 솟구쳐 못할 말까지 했다.
“그딴 강호인들, 북진무군 일군만 있었어도 싹 쓸어버릴 건데.”
“말조심해라!”
장무강이 황급히 주의를 주었다.
“못할 말 했소?”
심마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문관의 바람을 잊었단 말이오? 이딴 놈들이 판을 치라고 그 수많은 목숨을 황토에 묻었다는 말이냐고요!”
심무백이 울분을 토로하자 장무강과 위응환은 말없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랬다.
지난날 북방을 휘달리던 북진무군의 선봉에 섰던 그들이었다.
적이 두른 철벽을 목숨 걸고 뚫었다.
도와 창이 난무하는 난전에서 수많은 적을 죽이고 기어이 백부장, 천부장의 자리로 올랐다.
그런데.
진정한 적은 등 뒤에 있었다.
조정 간신들의 세 치 혀에 그들의 주군 장연보 대장군이 목숨을 잃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거면 됐지.”
“평안하게? 악양에서 본 건 뭐였소. 관리는 출세에 급급하고, 있는 놈들만 득세하는 세상이 평안하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취기가 오른 심마백이 울부짖듯 말했다.
심마백이 벌떡, 일어났다.
“흥! 천무방?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 눈으로 봐야겠소.”
그러더니 기어이 술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백 형은 저러다 천무방주 얼굴도 못보고 주독(酒毒)으로 죽겠네.”
위응환이 중얼거렸다.
장무강은 여전히 술만 들이켰다.
“그런데 강소군이란 자는 정체가 뭘까요?”
산동삼호가 악양에서 객잔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호의 정세를 유심히 살펴 돌아가는 사정을 제법 알고 있었다고 여겼는데 강소군이란 자는 처음 들었다.
“그 나이에 저런 무공을 지니고 있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그러게. 강호에는 기인이사가 수두룩하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장무강도 강소군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연화심은 강소군의 별원 앞에서 오락가락하였다.
손에 든 쟁반에 저녁 식사가 담겨 있다. 시비들도 모두 내보냈으니 시중 들 사람도 없다.
저녁을 직접 가져왔으나 강소군의 방 앞에서 망설이는 중이다.
강소군이 자신의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쳤으니 쉽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중랑이 다가와 쟁반을 빼앗듯 받아들었다.
“중랑! 무슨 짓이야!”
“아가씨는 삼도문의 소문주입니다. 경우가 아니죠. 제가 가져다드리죠.”
중랑이 강소군의 방문에 이르러서는 말했다.
“중랑이오. 저녁 식사를 가져왔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들어가겠소.”
중랑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강소군은 탁자에 홍옥비도를 놓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식사 가져왔소. 아가씨께서 걱정이 많소.”
강소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중랑이 흠칫, 놀랐다.
강소군의 두 눈은 말 그대로 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피가 흐를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오?”
중랑이 황급히 다가갔다.
강소군이 그대로 푹, 쓰러졌다.
중랑이 재빨리 강소군을 받아냈다.
“강 대협!”
밖에서 살피던 연화심이 놀라 달려왔다.
“어찌 된 일이에요?”
“내상이 악화된 모양입니다.”
두 사람은 강소군을 부축하여 침상에 누였다.
“황 숙부를 모셔올게.”
연화심이 달려 나갔다.
잠시 후.
황의채가 연화심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황의채 역시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는 형편이다.
황의채는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는데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진맥을 하고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 사람은 내상을 입은 지 꽤 시간이 지나 고질이 된 것 같구나. 우선 약을 지어 먹여 보기는 하겠다만 한두 달 정양해서 나을 것 같지 않다.”
“이 사람은 기이할 정도로 회복이 빨라요. 숙부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될 거예요.”
연화심이 안달하여 자기도 모르게 황의채에게 매달렸다.
황의채가 잠시 놀라 연화심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마냥 어린애인 줄 알았더니….”
황의채의 의미심장한 말에 연화심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 게 아니에요. 이 분이 저를 구해 주셨으니 응당 제가 할 바를….”
연화심이 말을 떠듬거렸다.
“알았다. 이 숙부가 최대한 노력을 해 보마.”
연화심이 난처해하자 황의채가 말을 잘랐다.
황의채가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환약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강소군의 천돌혈을 쳐서 억지로 환약을 넘기게 하였다.
황의채가 연화심에게 말했다.
“일단 진탕된 오장육부를 가라앉혀 놓았다. 오늘은 푹 쉬게 두어라. 내일 탕약을 보내 주겠다.”
세 사람은 강소군을 침상에 누이고 방을 나왔다.
연화심이 방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자 황의채가 물었다.
“왜 여기 선 것이냐?”
“인사불성인데 누군가 지켜줘야죠.”
“허허. 거참.”
황의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 버렸다.
연화심이 방문 앞에 주저앉자 중랑이 따라 앉았다.
밤이 깊어 갔다.
문득, 연화심이 입을 열었다.
“내가 바보 같지?”
“글쎄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저자가 바보 같군요.”
중랑이 속에 있는 말을 하였다.
“고마워.”
‘내가 고마웠지요.’
중랑이 속으로 대답했다.
어린 시절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부모와 누이가 죽어 가던 참혹했던 기억이 그 이전 모든 걸 지웠다.
이후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오직 살아서 복수하기 위해 숨 쉬고 먹고 싸웠다.
삼도문으로 들어오고 연화심과 함께 있으며 비로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중랑이 밤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이 셋이다.
부모님과 누이가 아닐까.
이제는 얼굴도 희미한 사람들.
다만 누이가 살았더라면 연화심 같았을 것만 같다.
연화심을 보니 꾸벅꾸벅 졸고 있다.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다.
중랑이 연화심을 안아 들었다.
“흠. 안 돼!”
연화심이 무슨 꿈을 꾸는지 나직이 중얼거렸다.
중랑은 연화심을 거처에 누이고 다시 와서 강소군을 지켰다.
***
아침부터 삼도문 내전에서 고성이 오갔다.
“이 싸움은 내 몫이네!”
“차라리 지금 우원송과 결판을 짓겠습니다!”
연성결과 척무량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연성결은 모두 내보내고 홀로 천무방주 구연강을 맞을 생각이었다.
척무량은 죽더라도 함께 죽어야 한다고 했다.
“아우. 어찌 나에게 한을 남기려 한단 말인가? 자네가 고집을 부리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걸세.”
“형님을 두고 우리끼리 떠나면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니죠.”
“기어이 내가 자진하는 걸 보겠다는 말인가?”
연성결은 삼도문 사람들까지 죽음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느니 차라리 자진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황의채가 바깥에서 두 사람의 공방을 듣다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두 형님의 생각이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죠.”
황의채는 화천대를 비롯한 무사들과 연화심 등을 내보내고 세 형제만 남아 구연강과 한판 승부를 벌이자는 것이었다.
“사실 천무방의 포위를 뚫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포위망을 벗어나더라도 추적이 붙을 수도 있고요.”
황의채가 덧붙이자 척무량이 말했다.
“장 대협에게 부탁하여 그들을 복건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세 사람은 장무강을 찾아갔다.
“장 대협. 어려운 부탁이 있어 왔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삼형제는 구명지은의 십분지 일도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구연강이 오기 전에 문도들과 여식만이라도 복건으로 피신시키고자 하오.”
장무강은 연성결이 무슨 부탁을 할 것인지 알았다.
산동삼호는 이미 연성결의 편에 서서 천무방과 한판 승부를 볼 결심이었다.
그러나 연성결이 후사를 부탁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연성결에는 당장의 한 팔 조력보다 연화심과 문도들이 안위가 더욱 중할 것이다.
“복건에 연고가 있습니까?”
“실은 내가 복건 출신이오. 고향의 장원이 아직 남아 있으니 화심이 후일을 도모할 수는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천무방의 포위를 뚫는 게 관건이겠군요.”
“우리 삼형제가 우원송과 결판을 짓는 사이 뒷산을 통해 빠져나가면 될 겁니다.”
황의채가 말했다.
“구연강이 직접 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원송의 경계가 삼엄할 테니 동생분들의 상세를 회복하면서 틈을 보기로 하지요.”
***
하루하루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보름이 지났는데도 구연강이 왔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다.
삼도문 장원에 갇혀 있으니 바깥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황의채는 장원 경계를 둘러보다 별원 정원에 나와 있는 강소군을 보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연화심의 말대로 강소군의 회복은 기이할 정도로 빨랐다.
자신의 탕약이 지닌 효과를 황의채는 안다. 꽤 좋은 비방이라고 자부하나 이렇게 빨리 회복될 수 있는 영약이라 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강소군 자신이 가진 운기요상 심법이 뛰어난 듯했다.
“날이 차오. 아직 몸이 불편할 텐데 어찌 밖에 나와 계시오?”
“연 문주를 뵙고 싶소.”
황의채가 강소군을 데리고 연성결에게 갔다.
“그날 죽은 동창과 금의위의 신원을 알 수 있습니까?”
연성결이 가만 생각하다 어딘가를 다녀왔다.
“시신을 수습하며 신원을 감추기 위해 호패와 군패를 따로 챙겨 뒀네.”
연성결이 내민 호패를 보니 동창의 고수는 신이기였다. 금의위는 천호였는데 막부심이라는 자였다.
“필요하다면 자네가 간직하게. 내게는 필요 없는 것일세.”
연성결이 고개를 호패와 군패를 건네주었다.
“챙겨 뒀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네.”
강소군은 말없이 받아서 챙기고는 포권을 하고 방을 나갔다.
황의채가 강소군의 뒷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정말 놀랍군요. 그렇게 깊은 내상을 입었는데 벌써 저렇게 다닐 수 있다니. 대체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궁금하군요.”
“아무래도 황궁과 관련이 있는 자 같네.”
연성결이 말했다.
“네?”
“홍옥비도는 평범한 장인의 솜씨가 아니었네. 문양이나 만듦새로 보아 십 년은 넘지 않은 물건일세.”
“아!”
연성결은 도의 명인이다. 도를 볼 줄 알았다.
“저자는 청옥비도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한 쌍이라는 뜻이라네.”
“예물이나 신물이라는 거로군요.”
연성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물이면서도 무척 날카롭고 실용적이었네. 귀한 홍옥과 청옥을 박아 무게 중심을 잡았지. 왕년의 명장 구야자라면 몰라도 당금 무림에서는 저런 비도를 만들 만한 자가 없지.”
“그렇다면?”
“황궁이나 군부의 병장기 제조소에서 나온 물건일세. 저자의 신분은 범상치 않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