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장무강은 삼도문과 같이 작은 문파에 무슨 이권이 크게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연성결이 척무량과 황의채에게 말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자네들에게 내 결심을 밝히기 위함이네. 삼도문의 사업을 정리하고 떠날 걸세. 떠날 사람은 떠나고 따를 사람은 따르라 하게.”
척무량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연성결이 한숨을 쉬고는 타이르듯 말했다.
“천무방은 호북을 장악하고 호남과 하남 일대로 세를 확장하고 있네. 바람이 거셀 때는 몸을 누일 줄도 알아야 한다네.”
패자가 등장하면 작은 문파는 숙여야 한다.
천무방이 적당한 선에서 협상을 해 왔다면 연성결은 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딸과 함께 삼도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속셈이 훤하게 보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천무방은 연성결의 무남독녀만 얻으면 삼도문이 자신들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라 여긴 것이다.
연성결은 장무강을 보며 말했다.
“삼도문은 나 혼자 일으킨 것이 아니오. 여기 무량과 의채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삼도문은 없었을 것이오. 삼도문의 모든 것은 셋으로 나눠야 하오.”
장무강은 연성결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삼도문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연성결은 천무방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던 것이다.
“형님! 지금 제가 재산 때문에 이러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운합니다!”
척무량이 술잔을 거칠게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허. 이 사람아. 손님도 있는 자리에서 무슨 짓인가?”
“둘째 형! 대형의 뜻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의채가 말렸다.
세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걸 보던 장무강이 돌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연성결 등이 장무강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세 분의 우의와 협기에 감탄하였습니다. 우리 형제들도 한날한시에 죽기로 했는데 삼도문의 삼우(三友) 또한 그런 듯합니다. 이런 분들을 알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장무강이 술병을 들어 각각 술잔에 가득 따랐다.
“내일 당장 적이 쳐들어온다 해도 오늘 밤은 마음껏 취하고 싶습니다! 드시죠!”
“하하. 어째 주객이 바뀐 듯하구려. 손님을 모셔 놓고 죄송하오.”
연성결이 웃으며 건배를 받았다. 척무량과 황의채도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연성결이 척무량에게 말했다.
“무량! 나는 결심을 굳혔네. 더 이상 거론하지 말게. 삼도문도와 딸린 식솔 삼백여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네. 이깟 장원과 사업이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장원은 새로 지으면 되고 사업은 다시 일으키면 되네. 아니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네.”
연성결의 말은 척무량과 황의채의 심금을 울렸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적과 싸우다 죽을지언정 모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아네. 하지만 나는 자네들과 가솔의 목숨이 나의 체면이나 재산보다 중요하다네.”
“형님!”
척무량이 비분강개하여 외치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동안 모자란 나를 따르느라 고생 많았네. 자네들 혼인조차 시키지 못하고 부려먹은 나를 욕하게나.”
연성결의 마음도 착잡했다.
연성결이 품에서 문서를 꺼내 장무강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천무방과 척을 졌으니 모홍객잔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오.”
장무강이 열어 보니 어디 가서든 객잔 하나는 사들일 만한 거금이었다.
장무강이 전표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받지 않으면 나는 두 발 뻗고 잘 수가 없소.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갑자기 술이 올라 더 이상 자리에 있기가 힘들구려.”
연성결이 억지로 전표를 맡기고 가 버렸다.
“척 대협! 이건 받을 수 없소.”
장무강이 척무량에게 다시 건넸으나 척무량이 갑자기 일어나 포권을 하였다.
“화심을 살려 주신 것은 형님을 살리신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형님을 살리신 것은 제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이까짓 금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삼형제의 뜻을 받아 주십시오.”
척무량이 술을 따르더니 건배를 청했다.
“장 대협과 같은 호걸을 알게 되어 정말 영광이오. 두 자루의 식도를 다루는 솜씨는 정말 귀신같더구려.”
척무량과 황의채, 장무강은 의기투합하여 밤새 술을 마셨다.
강소군은 별원 연못가 정자에 앉아 홍옥비도를 닦고 있었다.
연화심이 준 홍옥비도다.
닦고 또 닦아 반짝이는 비도였지만 강소군의 눈에는 요천 삼사와 운살의 피가 보였다.
이 비도는 삿된 자의 피가 묻어서는 안 된다.
문득 누군가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네 비도술을 막을 자는 천하에 없을 것 같다.’
장선백은 자신의 비도술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열여덟의 나이로 백만의 적진을 종횡무진하던 장선백이다.
그가 한 말이니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장선백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무공을 익혔다. 무서란 무서는 죄다 찾아보고 십팔반 병기 정도는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한다며 밤을 새워 창술과 곤술을 익히기도 했다.
장선백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비도술에 빠졌다.
장선백이 유일하게 익히지 않은 것이 비도와 암기수법이다.
어느 날 장선백과 입씨름이 붙었다.
“사내대장부가 비도를 쓸 수야 없잖아?”
“비도술을 만만히 보지 않는 게 좋아.”
“좋아. 겨뤄 볼까?”
어려서부터 수없이 겨뤘으며 여전히 결판을 내지 못한 두 사람이다.
강소군의 비도는 장선백의 도를 뚫지 못했다.
하나 장선백의 도 또한 강소군의 비도에 두 동강이 났다.
“네 비도술을 막을 자는 천하에 없을 것 같다.”
장선백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흘리던 모습이 생생하다.
얼마 뒤 장선백은 청홍쌍비도를 가져와 선물로 주었다. 청홍쌍비도 중에 하나가 손안에 있는 홍옥비도다.
‘연화심은 가전의 보도라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일까?’
홍옥비도의 주인은 그가 익히 아는 여인이다.
장선백에게 받은 청홍쌍비도 중 하나를 직접 건네주었으니 누구보다 잘 안다.
강소군은 이 비도가 주인의 품을 떠나 삼도문에 있게 된 경위가 궁금했다.
그럼에도 묻지를 못한다.
마주칠 사실이 두렵다.
어쩌면 여기 있는 몇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강소군이 비도를 닦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상세는 괜찮으신가요?”
맑고 차분한 목소리.
연화심이다.
연화심은 며칠 새 꽤나 성숙해졌다.
앳된 티가 사라지자 오히려 아름다워 보였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에서 묘한 매력이 인다.
연화심은 강소군이 닦고 있는 비도를 보며 옆에 앉았다.
연화심이 연못을 내려다봤다. 늦가을 연못은 보기만 해도 차다.
낙엽이 못물의 반을 가렸다.
한참 연못을 보다 강소군을 보니 여전히 비도를 닦고 있다. 마치 어루만지는 것만 같다.
연화심은 강소군이 비도를 소중히 닦는 걸 보자 기분이 묘했다.
만남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가 신외지물에 마음을 둘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연화심이 자신과 비도를 번갈아 보자 강소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 비도는 청홍쌍비도라는 것이오. 어쩌면 그 전에는 다른 이름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아! 이 비도의 내력을 아시는군요?”
“이와 똑같은 비도가 한 자루 더 있소. 다만 홍옥 대신 청옥이 박혀 있소.”
연화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 집에는 그것뿐이었는데요? 청옥비도는 어디 있는 걸까요?”
연화심은 집을 떠나기 전 수장고에 가서 귀중한 걸 찾았다.
강소군에게 줄 선물이 필요했다.
연성결이 검소한 사람이라 값나가는 게 많지 않았다.
부피가 큰 것은 들고 갈 수 없었고 금붙이 같은 걸 내밀 수도 없었다.
그러다 목갑에 담긴 비도를 발견하고 귀해 보여 들고 나간 것이다.
연화심은 가보 사이에 있던 것이니 가전 보도로 여겼고 그리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소.”
강소군의 말에 연화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청옥비도를 가지고 있다고요? 그럼 당신이 원래 이 비도의 주인이었나요?”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이 비도의 주인은 따로 있소.”
강소군이 고개를 들어 연화심을 똑바로 보았다.
두려운 사실이더라도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한다.
“이 비도가 어찌하여 삼도문의 가보가 된 것인지 알아야겠소.”
강소군의 눈빛이 싸늘하였다.
연화심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이 비도를 훔친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연화심은 더럭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도와 관련하여 강소군과 척을 지게 된다면?
천무방이 오기도 전에 삼도문이 피로 덮일 수도 있다.
연화심은 백륭사에서 응천대가 몰살당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도 꿈인 듯 생시인 듯 믿을 수 없는 끔찍했던 광경.
연화심이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알아보죠.”
“어떻게 알아본다는 말이오?”
“수장고에 있었으니 아버님은 아실….”
연화심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아버지가 홍옥비도의 주인을 해치고 가져다 놓은 것이라면?
연화심은 심장이 쿵쿵 뛰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머리가 아찔하여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연화심이 비틀거리며 정자의 기둥을 잡고 섰다.
“아가씨!”
어느새 나타났는지 중랑이 옆에 섰다.
“아, 괜찮아. 중랑.”
연화심이 괜찮다고 손을 저었으나 중랑은 부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낯빛이 백지장같이 창백하다.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는데?’
중랑이 강소군을 노려봤다.
연화심을 농락하는 자가 절대고수라고 해도 발검을 망설일 중랑이 아니다.
강소군은 가만 비도를 내려다봤다.
잠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지만 연성결이 광명정대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묻는다면 사실을 말할 것이다.
강소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 문주에게 직접 물어보겠소.”
“아니. 아니에요. 제가 드렸으니 제가 먼저 묻고 전해드리겠어요.”
연화심이 앞을 가로막았다.
강소군은 연화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
연화심은 아버지의 집무실 앞에서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참을 서성여야 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마침 집무실에서 나오던 연성결이 연화심을 보고 물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황의채가 뒤따라 나왔다. 삼도문의 재산을 처분하는 걸 황의채가 맡고 있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일을 처리하기로 하세.”
딸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연성결이 황의채를 보냈다.
연화심을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가 마주앉은 연성결이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말을 못하느냐?”
연화심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수장고에 있던 가보를 가지고 나가 누군가에게 주었어요.”
“가보를?”
연성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씨 집안에는 딱히 가보랄 게 없다.
“수장고 목갑에 있던 홍옥이 박힌 비도 말이에요.”
“아하! 그 비도? 그건 우리 가보가 아니다. 우연히 얻은 것이지.”
연성결은 비도를 훔쳤다는 딸의 고백에 웃음을 지었다.
아직 어린아이로 보인 것이다.
“그래 누구를 주었느냐?”
“강소군에게 주었는데 그가 비도의 내력을 물었어요.”
“비도의 내력?”
“그 비도는 청홍쌍비도라는 것으로 강소군이 청옥비도의 주인이라는군요. 홍옥비도의 주인도 잘 아는 사람이라며 어떻게 우리 삼도문에 들어왔는지 경위를 알고 싶어 해요.”
“…!”
연성결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그가 청옥비도의 주인이고 홍옥비도의 주인을 찾는다고?”
연화심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연성결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에게 사흘 후 내가 직접 홍옥비도의 내력을 이야기하겠다고 전해라.”
“혹….”
“그렇게만 전해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연화심이 내막을 물으려 하자 연성결이 말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