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우원송이 운살과 흑귀, 그리고 수하들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갔다.
삼도문도 문도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관도에는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와 부러진 칼과 검만 나뒹굴었다.
***
연화심은 자기 방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장원 안팎에서 간간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십여 명이나 죽었다.
화천대 무사도 여덟 명이나 희생됐다. 그들은 누군가의 지아비이자 아들이고 형제였다.
연화심은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자책에 빠졌다.
천무방에 대한 분노보다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화가 앞섰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장원을 나서기 전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도 구양운의 청혼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거야. 차라리 자결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구양운은 죽지 않았을 것이고 천무방도 혼인을 빌미로 삼도문을 겁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자결하는 것도 무책임한 행동이 됐다.
자신 한 목숨을 던져서라도 핏값을 받아내고 죽어야 한다.
중랑은 연화심의 거처 앞마당에서 검을 수련하고 있었다.
분노와 자책에 빠져 있는 연화심을 지켜보는 중랑의 가슴 역시 착잡했다.
지난 봄 만해도 티 없이 맑고 순수했던 연화심이 이제 세상 모든 고난을 짊어진 얼굴로 시들어 가고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더욱 화가 났다.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무력감에 더욱 검법 수련에 매달렸다.
‘강소군. 너는 대체 누구냐?’
암천대와 부딪혔을 때 귓가에 들려온 몇 마디.
강소군의 언질은 막혔던 중랑의 검로를 열어 주었다. 그 덕분에 중랑은 순식간에 절정에 다다랐고 흑귀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부딪혔던 벽.
그 벽을 몇 마디로 깨 버린 강소군.
강소군이 백륭사에서 괴인들과 싸우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인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중랑은 담 너머 별원을 바라보았다.
연화심의 어머니가 썼다는 별원이다.
연성결이 죽은 아내와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비워둔 곳인데 무슨 생각인지 강소군에게 내주었다.
연화심의 거처와 연이어 있다는 것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언제 살수가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연성결로서는 딸이 강소군과 같은 고수 옆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랑은 더욱 가슴이 시렸다. 자신이 지키는 건 한계가 있다. 천무방과 직접 부딪힌 뒤 내린 결론이다.
‘천무방의 살수들로부터 연화심을 지킬 수 있을까?’
천무방에는 고수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고 했다. 암천대가 그 정도였는데 고수들은 얼마나 강할까.
중랑이 검을 휘두르다 말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월형문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중랑이 돌아보곤 고개를 숙였다.
“문주님!”
연성결이 중랑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중랑. 고생 많았네. 경황이 없어서 자네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 했군.”
“면목 없습니다.”
“그런 소리 말게. 화심이 살아 돌아온 건 모두 자네 덕분이라고 생각하네.”
연성결이 거듭 중랑에게 치하하고 연화심의 거처로 들어갔다.
연화심은 아버지에게 차를 끓여 내고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라. 네 잘못이 아니다.”
“아니에요. 저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으니 제 책임이에요.”
연성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열여덟.
시집갈 나이도 됐다. 그러나 연성결의 눈에는 어린아이다. 그런 연화심에게 무거운 마음의 짐이 실린 것이다.
어쩌면 평생 떨치지 못할 짐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짐은 몇 마디 위로로 떨칠 수 없다는 걸 안다.
연성결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미련하여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연성결은 마음을 굳혔다.
장원과 상권을 처분하고 무한을 떠날 생각이다.
연성결이 무림의 일에 나서지 않은 지 오래다.
무사를 키운 것은 상거래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삼도문이라는 이름에 집착하여 화를 불렀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정하니 홀가분하였다.
“천무방의 마수가 들이닥치기 전에 떠나야 하니 시간이 촉박하다.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연화심은 아버지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없었다.
다만 더욱 자신을 자책할 뿐이다.
***
마치 오래전 어느 날로 돌아온 것 같았다.
삼도문의 별원은 그가 자란 집과 비슷했다.
강소군은 별원 정자에 앉아 작은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잔잔한 수면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운살에게 날린 비도에는 강소군의 남은 내력은 물론 선천지기까지 담겨 있었다.
단 한 수밖에 기회가 없었기에 모든 걸 끌어내야 했다.
선천지기가 손상되면 내력과 달리 회복이 더디다.
요천 삼사와의 싸움이 치명적이었다.
요천루주와의 결전에서 입은 내상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응천대와 부딪힌 것도 변수라면 변수였다.
별원으로 들어오는 월형문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연성결과 중랑이다.
연성결이 연못 정자에 앉아 있는 강소군에게 다가왔다.
“이제 제법 날이 쌀쌀하오. 내상을 입으셨다는데 괜찮소?”
사람을 많이 상대한 연성결인데 강소군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보기에는 이십 대 중반이었으나 풍기는 기도는 산전수전을 겪은 노강호와 비슷하다.
전신에 감도는 공허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연성결은 이런 종류의 인간들에 대해 알고 있다.
‘혈향(血香)을 밟고 가는 자!’
연성결이 탐탁지 않아 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연성결은 강소군의 얼굴에 드리운 허무의 그림자를 모른 척하고 입을 열었다.
“딸아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하오. 천무방 삼공자의 일은 삼도문에서 책임질 것이오.”
연성결이 그렇게 말했으나 천무방에서 수긍할 리 만무다. 아마도 끝까지 강소군을 추적할 것이다.
연성결은 당장이라도 피하라 하고 싶었으나 내상을 입었다니 바로 내보낼 수도 없었다.
“삼도문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 내상이 가볍지 않으니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실 텐데 사정이 좋지 않구려.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은 안전할 테니 편히 계시기 바라오. 그때 가서 사람을 붙여 원하는 곳까지 모셔다드리겠소.”
강소군이 말없이 읍을 하였다.
알았다는 뜻이다.
연성결은 다시금 강소군을 살펴봤다.
연화심과 중랑의 말에 따르면 절대고수라고 했다.
연성결은 절정을 이룬 고수다.
비록 무림을 떠났지만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자부해왔다.
연성결과 같은 고수는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수들이 노화순청의 단계에 머물고 만다.
강소군과 같은 고수와의 비무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내상이 깊은 사람에게 비무를 하자고 청할 수는 없다.
“혹 출신이 어딘지 여쭤봐도 되겠소?”
“강소입니다.”
강소 어디라고까지 밝히지는 않았다.
“강소? 그렇다면 알아보시겠구려. 이 별원이 남경의 별원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오.”
연성결의 아내 조씨는 남경 출신이었다.
아내를 끔찍이 여긴 연성결은 남경에 있던 아내의 별원을 통째로 옮겨 왔다.
강소군이 별원을 다시 둘러보았다.
왠지 모를 익숙함이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연성결은 몇 마디 더 나누고는 돌아갔다.
중랑은 가지 않고 머뭇거리다 말했다.
“고맙소.”
강소군이 조언을 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이다.
강소군이 중랑을 물끄러미 보았다.
누군가에게 쉽게 고맙다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성격이다. 그런 그가 고맙다고 하니 의외였다.
“내가 살기 위함이었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랬다.
강소군의 조언을 얻은 중랑이 흑귀를 잡았기에 싸움이 더 쉽게 끝났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천성검법을 어떻게 아는 것이오?”
연성결이 준 천성검보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무학이 아니다.
“오래전 어떤 무고에서 잠시 본 적이 있소.”
중랑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니. 그런데 어떻게 그 오의를 꿰뚫고 있는 것일까?
“당신이 펼치는 걸 보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말한 것뿐 익혀 본 적은 없소.”
사실 그랬다.
천성검보는 강소군이 봤던 많은 검보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중랑이 펼치는 걸 보고 오래전 봤던 기억이 살아났을 뿐이다.
“아무튼 고마웠소.”
중랑이 몸을 돌렸다.
“육십사식은 검을 익히기 위함일 뿐이오.”
중랑이 몸을 홱, 돌렸다.
“그게 무슨 뜻이오?”
“천성육십사식은 검을 수련하기 위한 법이라는 것이오.”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오?”
초식에 대한 무림인들의 의견은 대체로 양분할 수 있다.
초식을 중시하고 지킴으로서 궁극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 자들과 초식에 구애받지 않고 실전에 맞게 응용함으로써 오히려 무의 극의에 다다를 수 있다는 자들이다.
중랑 역시 이를 알고 있기에 되물은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오.”
강소군이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중랑은 자기 처소에 와서 자리에 누울 때까지 강소군의 마지막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천성육십사식은 검을 수련하기 위한 법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어린아이라도 거론하지 않을 이야기인데 절대고수가 하니 심상치 않게 들렸다.
아니, 실제로도 뭔가 느끼는 바가 있다.
그런데 어렴풋하게 맴돌 뿐 잡히지가 않는다.
***
삼도문 후원 누각에 술상이 놓였다.
연성결과 의제 척무량, 황의채와 장무강이 둘러앉았다.
장무강은 허벅지에 붕대를 감고 있었으나 운신에 어려움은 없었다.
연성결이 술을 따랐다.
“장 대협. 아우 분들의 상세는 어떻습니까?”
심마백과 위응환은 아직 자리에 누워 있다.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셋째가 중상이긴 하나 고비는 넘겼습니다. 문주님 덕분입니다.”
연성결은 무한의 의원들을 모두 초빙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실력 있는 의원에게 산동삼호를 맡겼다.
삼도문에는 산동삼호 외에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외인에게 가장 좋은 의원을 붙인 것이다.
“제 딸을 구해 주셨는데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하하. 따지고 보면 문주님께서 우리 형제의 목숨을 구한 것이 먼저 아닙니까? 세상일은 돌고 돈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장무강이 껄껄 웃었다.
“이렇게 문주님의 구명지은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게 되어 하늘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연성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년 전 산동삼호가 금의위에 쫓겨 죽기 일보 직전 마침 지나던 연성결이 뛰어들어 구했다.
그 일 이후 연성결은 그러잖아도 뜸했던 무림에 아예 발길을 끊고 은인자중하며 살았다.
피가 피를 부르는 무림에 염증을 느낀 데다 지옥 끝까지 쫓는다는 금의위의 눈길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한번 강호에 발을 디뎌놓은 자는 죽기 전까지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천무방이 삼도문에 눈독을 들일 줄은 몰랐다.
장무강이 연성결에게 물었다.
“천무방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연성결과 의제들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척무량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분을 쏟았다.
“흥! 그들이 삼도문을 집어삼키려면 그만한 피를 흘려야 할 것이오. 순순히 내줄 수는 없지!”
척무량은 연성결이 삼도문을 정리하는 게 못마땅했다.
“대체 천무방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무강은 천하사패로 우뚝 솟은 천무방이 삼도문과 같은 무한 외곽의 작은 방파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궁금했다.
황의채가 대신 답했다.
“천무방이 노리는 것은 삼도문의 금권입니다.”
“금권?”
“갑작스레 세를 불렸으니 그만큼 자금도 필요하겠지요. 무림에서 볼 때는 눈에 차지도 않는 작은 문파겠지만 삼도문의 사업은 규모가 제법 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