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얍!”
우원송은 진의 중심에 초지항이 있는 걸 보고는 크게 기합을 지르며 말 위에서 솟구쳐 몸을 날렸다.
초지항이 우원송을 향해 달려나갔다.
-카강!
위에서 내리찍는 언월도와 밑에서부터 올려친 초지항의 도가 부딪혔다.
우원송의 도에는 막강한 경력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날아오는 기세가 실렸다. 그럼에도 맞부딪히는 건 상궤에 어긋난다.
실제로 막강한 힘이 실려 있는 언월도가 초지항의 도를 누르며 그대로 내려왔다.
-쉬가가각!
순간 초지항의 도가 세를 바꿔 언월도를 훑으며 타고 올라왔다.
회천십이도의 장점이 이렇듯 유연한 도세에 있다.
우원송이 언월도를 세워 올라오는 초지항의 도를 막았다.
-파파팍!
-챙! 차라랑!
몇 차례 접전 끝에 초지항이 서너 걸음이나 뒤로 밀렸다.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우원송이 진심어린 감탄을 하고는 재차 언월도를 휘둘렀다.
초지항이 맞서서 연달아 회천십이도를 펼쳤다.
-카강!
언월도와 초지항의 도가 격돌하며 불꽃이 튀었다.
초지항이 우원송과 격돌하는 사이 진이 흐트러졌다.
응천대가 화천대를 휩쓸고 지나가고 그 뒤를 암천대가 다시 덮쳤다.
“크윽.”
화천대 무사들은 연달아 들이닥친 암천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수장의 명이 없음에도 응천대와 암천대는 일사불란하게 손발을 맞췄다.
천무방이 강호의 패자로 군림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화천대의 진세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연성결은 부상을 입은 흑귀를 몰아붙였으나 암천대원들이 몸을 날려 막는 바람에 일시에 끝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연성결의 주위에 쓰러진 암천대원이 십여 명이 넘었다.
역시 일문의 문주는 달랐다.
“으으. 연성결!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암천 일대주 자리를 내놓을 것이다.”
흑귀가 유성추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연성결을 공격하였다.
중랑은 연화심을 호위하며 암천대원들을 막았다.
중과부적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응천대와 암천대가 수로 밀어붙이자 화천대는 방어하기 바빴다.
“다 죽여 버려!”
부상을 입고 악에 받친 흑귀가 소리를 질렀다.
그때.
-두두두두.
다시 관도에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났다.
앞장선 이는 장무강이다.
옆에 두 사람이 기수를 나란히 하고 달려오는데 연성결의 의제 일도삼단 척무량과 백선문사 황의채였다.
“원군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화천대원들은 기운이 솟았다.
밤새 말을 달려 삼도문으로 간 장무강은 부상당한 아우들을 맡기고 곧바로 삼도문의 고수들과 함께 남은 무사들을 끌고 달려왔다.
선두에 선 척무량이 크게 외쳤다.
“형님! 척무량입니다!”
“연 문주! 내가 왔소!”
장무강이 우레와 같은 호통을 지르며 말 등에서 몸을 날렸다.
뒤이어 오십 여명에 이르는 삼도문도들이 적을 향해 돌진하였다.
새로이 삼도문의 원군이 가세하며 양쪽의 진이 깨지고 난전으로 이어졌다.
지원군을 얻은 화천대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암천대와 겨뤘다.
삼도문도들은 응천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삼도문도들은 천무방도들에 비해 무공이 약했으나 문파의 존망이 걸려 있다는 위기감에 죽기를 각오하고 칼을 휘둘렀다.
여기에 장무강과 척무량, 황의채와 같은 고수가 있으니 양쪽은 서로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혼전을 벌였다.
시간이 흐르며 쓰러지는 무사들이 늘어났다.
-쾅!
우원송의 언월도가 기어이 초지항의 도를 날려 버렸다.
“크윽!”
초지항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화천대원들이 앞을 막고 호위를 섰다.
“어린놈이 가상하구나. 네놈은 가장 마지막에 죽여주마!”
우원송은 화천대원들에게 에워싸여 부축을 받고 있는 초지항에게 한마디 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어 언월도를 세우고 전장을 돌아보며 외쳤다.
“연성결! 나는 응천대주 우원송이다. 수하들을 죽음으로 내몰 것이냐? 어서 나와 결판을 짓자!”
우원송의 기세는 마치 관우와도 같았다.
-호오오!
한 줄기 소성이 터지고 누군가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우원송 앞에 떨어졌다.
연성결이다.
그 역시 암천대원들의 조력을 받는 흑귀를 처치하지 못하자 우원송과 결판을 내고자 날아온 것이다.
우원송이 연성결을 향해 말했다.
“일문의 문주답구나!”
연성결이 담담하게 말했다.
“구연강의 졸개가 감히 할 말은 아니지!”
“천무의 선봉 응천대 앞에 목을 뻣뻣이 세울 문파는 없다!”
우원송이 말을 마치자마자 언월도를 크게 휘둘렀다.
-파앙!
연성결의 도가 비산하였다.
-쾅!
두 사람이 격돌하며 폭음이 터졌다. 거센 도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수장끼리 겨루자 모두가 한발 뒤로 물러나 연성결과 우원송의 격돌을 지켜봤다.
-휘이익!
우원송의 언월도가 거세게 연성결을 압박하였으나 연성결은 손쉽게 피했다.
우원송의 언월도는 강했으나 연성결의 회천십이도는 신묘하였다. 초지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게 같은 회천십이도란 말인가?’
우원송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흑귀는 우원송이 연성결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뭐 하고 있는 것이냐? 모조리 죽여라!”
흑귀가 돌연 소리쳤다.
흑귀의 명에 암천대가 움직이고 다시 난전이 벌어졌다.
“강호의 도를 모르는 놈들이구나!”
장무강이 분노하여 호통을 치며 달려드는 암천대원들을 쳐냈다.
척무량과 황의채 역시 몰려드는 천무방도들을 주살하였다.
고수들의 살초에 천무방도들은 불나방처럼 쓰러져갔다.
그럼에도 흑귀는 벌겋게 뜬 눈으로 외쳤다.
“크흐흐. 강호의 도? 암천대의 앞에는 오로지 승리만 있을 뿐이다. 암천대는 불패다!”
흑귀가 미친 듯이 유성추를 휘두르며 삼도문도들을 주살하였다.
“죽어라!”
삼도문도들이 분분히 물러나 피하는데.
-쉬이익
하늘의 별과 같은 검광이 흑귀를 향해 쏟아졌다.
흑귀가 황급히 유성추를 회전하여 쏟아지는 검광을 막았다.
-따다당!
한 차례 검광이 지나간 뒤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또 네놈이냐?”
흑귀가 중랑을 보고 이를 갈았다.
중랑은 말없이 검을 겨누었다.
심득을 얻은 뒤 머릿속에 이어지는 검로를 따라 움직이는 중랑이다.
“크윽, 한낱 호위 따위가 감히….”
흑귀가 유성추를 날렸다.
-팅.
중랑의 검이 유성추를 튕겨냈다.
다시 혼전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지고 핏물이 땅을 적셨다.
한편의 지옥도와 같은 살육의 현장으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걸어왔다.
무척 여유로운 걸음이다.
백발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강소군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강소군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렸다.
그 사이 백발노인이 일장 거리에 섰다.
“자네가 구양운을 죽였는가?”
운살이 물었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런 것 같군.”
“그가 천무방의 삼공자라는 건 알고 있나?”
“굳이 알아야 하나?”
“어쨌거나 죽어 줘야겠다. 내가 그의 호위였는데 잠시 떨어진 바람에 지키지를 못했다. 네 목이라도 가지고 가야 면이 살지 않겠느냐?”
운살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엊그제만 해도 다 죽어 가던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면.”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강소군이 품에서 연화심이 준 홍옥비도를 꺼내 손에 들었다.
“비도를 쓰는가?”
“때에 따라서는.”
강소군의 시선이 운살을 향했다.
순간 운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어떻게?’
운살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인에게는 본능이라는 게 있다. 그 본능이 그에게 경고를 하였다.
운살이 등에 맨 검을 뽑았다.
“오랜만에 검을 뽑게 만드는군.”
운살은 강소군에게서 별다른 내력이 느껴지지 않음에도 조심을 했다.
‘아직 공력은 회복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분명 한 수가 있는 놈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운살은 자신이 강소군의 목을 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분명 죽기 일보 직전에 있던 놈이다. 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포기하던 말을 직접 엿들었다.
“움직이면 죽을 것이오. 마지막 할 말은 없소?”
강소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운살은 어이가 없었다.
“크하하! 참으로 광오하군. 너야말로 남길 말 없느냐?”
“죽는 건 당신이오.”
강소군이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운살은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맹인검이 있다는 건 들어봤어도 맹인비도라는 건 금시초문이다.
‘심계가 깊은 놈이군. 시간을 끌겠다는 건가?’
운살은 강소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왠지 불길한 느낌이 고조되었다.
운살이 최대한 공력을 끌어올렸다.
구양운과 응천대 이십여 명을 주살한 놈이니 비장의 한 수가 있을 것이다.
‘첫 수만 막아내면 다음 수를 낼 공력이 없을 것이다!’
강소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운살은 망설였다.
결론은 이미 난 것이나 진배없는데 왠지 손을 쓰기가 저어된다.
‘도대체 무얼 믿고 저러는 것이냐?’
생각할수록 머릿속은 복잡하고 몸이 굳어갔다.
운살의 등에서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대치를 깬 것은 한 줄기 바람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강소군의 옷자락이 날렸다.
-펄럭.
순간 운살은 벼락같이 검을 내리쳤다. 검을 막으면 곧바로 삼검으로 나뉘어 상대를 삼등분 하는 절초다.
검을 막는 건 없었다.
-콱!
소리도 없이 날아온 비도가 운살의 이마에 박혔다.
운살은 눈을 치켜떠 자신의 머리에 박힌 비도를 봤다.
손잡이에 박힌 홍옥 때문에 하늘이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운살이 희미하게 꺼져 가는 의식을 붙들고 물었다.
‘어떻게?’
하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다시 불어온 가을바람에 운살의 의식이 흩어졌다.
운살이 쓰러지는 순간 흑귀의 가슴에도 검이 박혔다.
흑귀도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천하가 좁다며 종횡무진하던 암천 일대주인 자신이 이름도 없는 호위무사의 검에 생을 마칠 줄 몰랐다.
“크윽!”
중랑의 검이 뽑히는 순간 흑귀의 머릿속에 그가 죽인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고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도 있었다.
흑귀는 무릎을 꿇지 않고 암천대의 무사들을 봤다.
동고동락했던 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흑귀는 유성추를 들고 선 채로 죽음을 맞았다.
마지막 숨이 폐를 빠져나가는 순간 흑귀는 그대로 쓰러졌다.
우원송은 운살에 이어 흑귀가 쓰러지자 언월도를 휘저어 연성결을 물렸다.
“연 문주. 양쪽의 사상자가 적지 않으니 오늘은 이만합시다.”
우원송은 거구와 달리 진퇴가 유연하였다.
응천대가 천무방의 선봉대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소문을 얻은 것도 우원송의 이 같은 유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성결이 주위를 둘러봤다.
화천대 십여 명을 비롯하여 서른 명가량의 문도가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응천대와 암천대 일백여 명은 더욱 피해가 커서 절반가량만 서 있을 뿐이다.
난전에서 고수의 존재 여부는 승패를 가루는 요소다.
삼도문이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장무강과 척무량, 황의채 등의 고수가 몸을 사리지 않았고 중랑이 예상치 못한 활약을 했다.
삼도문 무사들의 시선이 연성결을 향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혈기 가득한 눈빛이다.
‘으음.’
연성결은 일문의 문주다.
끝까지 싸우면 적을 모두 해치울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삼도문의 문도들 역시 피해가 클 것이다.
천무방은 무력대 하나를 잃을 뿐이지만 삼도문은 주력에 타격을 입는 것이다.
손실을 비교할 수가 없다.
연성결이 도를 거뒀다.
“천무방주에게 말하시오. 삼도문을 접수하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