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중랑의 검에서 검광이 유성처럼 쏟아졌다. 별이 흐르듯 천성육십사식이 유려하게 이어지며 하늘을 수놓았다.
-따다다당!
“큭!”
중랑의 몸을 훑던 도세들이 일시에 튕겨 나가고 암천대원들이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암천대원들의 팔과 어깨는 유성이 뚫고 간 듯 구멍이 숭숭 뚫렸다.
중랑은 검을 든 채 석상처럼 서 있었다. 스쳐 지나간 오의를 되새기는데 잡힐 듯 말 듯하다.
“한 수가 있었군. 제법이구나!”
흑귀는 수하들의 부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갯짓을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네 명이 달려 나갔다.
“후!”
중랑이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심득을 얻었으나 이를 새길 여유가 없었다.
진정한 무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죽음이 다가오다니.
무인의 심득은 언제 어느 순간 다가올지 알 수 없다. 다시 얻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안타까웠다.
이번에는 십여 합도 지나지 않아 중랑의 검이 어지러워졌다.
암천대원이 네 명으로 늘어서만은 아니다. 같은 천성육십사식임에도 심득에 싸여 펼칠 때와 달리 힘에 부쳤다.
중랑은 방금 전 깨달은 바를 되새기려 애를 썼으나 눈앞에 번뜩이는 도를 외면할 수 없었다.
-파악!
끝내 한 암천대원의 도가 중랑의 옆구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아!’
중랑은 흐트러지는 기운을 느끼며 속으로 탄식하였다.
파파팍!
중랑은 한바탕 사방으로 검을 휘둘러 암천대원들을 물렸다.
암천대원들은 중랑이 이미 평정심을 잃었음을 눈치채고 여유를 가지고 몰아쳤다.
네 명이 부상을 입은 먹잇감을 희롱하듯 중랑의 전후좌우를 맴돌았다.
그때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 왔다.
“하늘은 텅 비어 있는데 별은 어디서 생겨나서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비어 있음이 정말 비어 있는 것일까. 사라짐이 과연 사라짐일까.”
강소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중얼거림이 중랑의 머릿속에는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
순간 중랑의 단전에서 한 줄기 맑은 기운이 솟아 독맥을 타고 올랐다.
중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위 사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도와 암천대원들의 악귀 같은 얼굴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는 연화심과 강소군, 그리고 흑귀까지.
기이하게도 모든 것이 보였다.
마치 사물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피식.
중랑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가슴에 뜨거운 열기가 소용돌이쳤다.
등 뒤 독맥을 타고 올라온 맑은 기운이 백회에 닿는 순간 펑, 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동시에 정수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했다.
맑은 기운이 백회를 뚫고 하늘로 솟았고 알 수 없는 차가운 기운이 백회를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동시에 온몸의 대혈이 타는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늘에서 쏟아진 차가운 기운과 전신 대혈에서 달궈진 뜨거운 기운이 만나 소용돌이쳤다.
중랑은 천천히 검을 흔들었다.
-쾅!
마치 벼락이 떨어진 듯한 폭음성과 함께 먹잇감을 희롱하는 승냥이 떼 같았던 암천대원들이 분분히 나뒹굴었다.
모든 것이 순간에 이뤄진 일이다.
연화심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랑의 무공은 그녀가 상상했던 이상이다.
‘천성육십사식이 이런 무공이었나?’
그녀는 연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회천십이도(回天十二刀) 대신 천성육십사식을 익혔다.
근력이 필요한 회천십이도는 여자가 대성하기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성육십사식이 이렇게 위력적인 검법일 줄은 몰랐다.
중랑은 암천대원들을 떨쳐내고도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방금 얻은 오의를 되새기는 중이다.
흑귀에게는 그 모습이 거만함으로 비쳤다.
“쳐라!”
흑귀가 발악하듯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남아 있던 암천대원들이 몸을 솟구쳤다.
늑대가 무리를 지어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중랑이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하늘에서 정수리를 통해 밀려드는 음한의 기운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동시에 혈맥은 더욱 달아올랐다.
두 가지 기운이 소용돌이치는데 분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기운에 몸을 맡긴 중랑의 검에서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과도 같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차라라랑!
암천대원들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유성의 환영을 쳐내며 중랑을 향해 음험한 도세를 쏟아냈다.
몇몇 암천대원들은 곧바로 연화심을 노렸다.
강소군을 향해 달려드는 자는 없었다.
“그놈은 내상을 입어 오늘내일한다고 한다. 삼도문 두 년놈만 제압하면 된다.”
흑귀는 자신이 받은 정보를 수하들에게 일렀고 수하들은 충실히 따랐다.
그 말이 아니더라도 창백한 낯빛에 당장이라도 말에서 떨어질 듯한 강소군을 굳이 공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난전이 벌어졌다.
연화심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날아드는 도를 피하기 바빴다.
암천대원들이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심득을 얻은 중랑은 무아지경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 통에 연화심의 위험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쨍강!
연화심의 보검이 무지막지한 도와 부딪치며 부러졌다.
암천대원 하나가 손을 뻗어 연화심의 대혈을 짚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엄청난 기파가 몰려왔다.
암천대원이 재빨리 손을 빼며 몸을 물렸다.
-쉬이익!
극강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도가 암천대원을 스치며 날아가 땅에 꽂혔다.
파르르 떨리는 도는 보기 드문 보도였다.
“멈춰라!”
한 떼의 기마가 질풍같이 달려왔다.
앞에 선 이는 삼도문주 연성결이다.
“아버지!”
연화심은 연성결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려갔다.
연성결이 말에서 내려 연화심을 맞았다.
“흑!”
연화심은 아버지의 품에 안기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금지옥엽으로 자란 연화심이다. 난생처음 죽음의 위기와 수모를 연달아 겪고 나서 아버지를 보니 절로 울음이 터졌다.
“걱정 마라. 아버지가 왔다.”
연성결이 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정신을 차린 연화심은 재빨리 눈물을 훔치고 몰려온 사람들을 봤다.
눈에 익은 무사들은 삼도문의 정예 화천대들이다.
“너희가 천무방 암천대인가?”
연성결이 앞으로 나서며 흑귀를 향해 물었다. 연성결은 천무방에 대해 그간 꽤 알아본 바 있다. 암천대가 먼저 침투하여 살겁을 자행하고 뒤이어 응천대가 휩쓸고 가는 천무방의 비열한 수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위명이 쟁쟁한 삼도문 연 방주께서 본대를 알아주시니 영광이군요.”
흑귀가 빈정거리듯 대답했다.
몇 명이 다쳐 삼도문보다 수가 약간 부족하나 모두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중랑이 의외로 선전을 했지만 암천대 무사들은 실전에서 닳고 닳은 무사들이다.
“암천대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쓸어버려라!”
흑귀가 말 등에서 도약하여 하늘로 솟구쳤다.
삼 장 높이로 도약한 흑귀는 마치 강가에 내리는 기러기처럼 날았다.
-촤라락!
흑귀의 손에서 유성추가 날아왔다.
그 끝에 연성결이 있었다.
“오냐! 와라!”
연성결이 땅바닥에 꽂힌 도를 뽑아 들더니 흑귀의 유성추를 후려쳤다.
-쾅!
폭음이 터졌다.
흑귀의 유성추는 거센 도파에 튕겨 나갔다.
흑귀가 눈을 부릅떴다.
‘과연 삼도문주로군.’
단숨에 삼도문주를 잡아 기세를 살리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흑귀가 반대편 유성추를 감아 빙글 돌리며 연성결의 머리통을 노렸다.
“쳐라!”
암천대와 화천대가 격돌했다.
도광이 번뜩이고 강편이 대기를 갈랐다.
평화롭던 가을 관도에서 순식간에 죽고 죽이는 살육이 벌어졌다.
‘이럴 수가!’
흑귀는 연성결과 싸우면서도 주위 정황을 놓치지 않았다.
삼도문의 정예 화천대는 강했다. 천무방 살귀라는 암천대가 밀렸다.
‘이럴 수는 없다. 이놈들이 혈도대라도 된다는 말인가?’
평소 암천대와 상대할 수 있는 무력은 천하사패의 도룡회 혈도대뿐이라고 여겼던 흑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소방파에 불과한 삼도문의 무력대에게 암천대가 이렇게 밀리다니.
“어디에 정신을 파는 것이냐!”
연성결이 호통을 치더니 순식간에 십이도를 연달아 내리쳤다.
거센 도기가 빗발처럼 흑귀를 향해 쏟아졌다.
흑귀가 유성추를 맹렬히 돌리며 도기를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퍼퍽!
흑귀의 가슴에 도기가 연달아 적중하였다.
“응?”
연성결이 잠시 멈칫하였다. 분명히 도기를 맞았으나 흑귀는 멀쩡했다.
흑귀의 옷자락 사이로 검은 보갑이 보였다.
“커윽.”
흑귀가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꿀꺽 삼키고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연 문주. 과연 회천십이도는 대단하구려. 하지만 기력이 딸리는 듯하오. 나이가 드신 게 아니오?”
흑귀는 진탕된 내기를 가라앉히며 유성추를 돌리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일개 대주의 무위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연성결이 씁쓸하게 웃었다.
“흐흐흐. 나는 암천 일대주일 뿐이오. 본 방에는 나보다 더 귀신같은 놈들이 수두룩하지.”
흑귀가 말을 하다 말고 유성추를 던졌다.
하나는 연성결의 얼굴을 향해 쏘아가고 다른 하나는 빙 돌아 후미를 공격하였다.
“어림없다.”
연성결이 도에 내력을 담아 쏘아오는 유성추를 내리치더니 땅바닥을 구르듯 앞으로 나가며 흑귀의 아랫배를 찔러 갔다.
“걸렸다!”
흑귀가 도에 튕긴 유성추를 감아 그대로 내리찍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수법이었다.
유성추 하나는 뒤에서 공격하고 다른 하나는 허공에서 내리찍는 초식은 흑귀가 자랑하는 지천멸(地天滅)이었다.
“…?”
위기의 순간 연성결의 신형이 옆으로 밀려나듯 움직였다. 그 모습이 바람에 갈대가 밀리는 듯 자연스러웠다.
이어 연성결이 도를 좌우로 거세게 흔들었다.
거센 도기가 흑귀의 전신에 몰아쳤다.
“컥!”
흑귀의 하반신 곳곳에서 피가 터졌다.
흑귀가 흉명이 자자한 암천대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나 일문의 문주와는 다소 손색이 있다는 게 드러났다.
흑귀가 이를 가는데 멀리 먼지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흑귀의 눈이 번뜩였다.
“크흐흐. 응천대가 오고 있소. 오늘 삼도문은 강호에서 지워질 것이오.”
-두두두두!
달려오는 인마는 과연 응천대였다.
승기를 잡았던 화천대는 당황했고 수세에 몰렸던 암천대는 기가 살아났다.
“조금만 버텨라! 지원군이 오고 있다!”
흑귀가 소리쳤다.
“회천연환진을 편성하라!”
연성결은 몰려오는 적의 무리가 수가 많음을 보고 화천대를 향해 외쳤다.
화천대가 모여들었다. 세 사람이 일조가 되고 각 조가 다시 둥근 원을 형성하였다.
***
우원송은 운성포를 나와 육로를 통해 달려온 수하들을 만났다.
장무강 일행을 쫓던 수하들이 당한 것 같다는 보고를 듣고 격분하였다.
“그놈들을 직접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이를 갈고 달려온 우원송이다.
화천대가 진을 편성하는 걸 보자 뒤를 보고 외쳤다.
“이열 대형을 갖추고 그대로 돌진한다. 나를 따르라!”
우원송이 앞장서며 언월도를 뽑아 들었다.
한 손으로 말고삐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언월도를 앞세워 달리는 것이 마치 군의 무장과도 같았다.
암천대가 양옆으로 흩어져 길을 내줬다.
화천대주 초지항은 다가오는 응천대를 노려보았다.
우원송이 선두에 서서 달려오는데 기세가 무척 사납다. 뒤따라 경공을 펼치며 달려오는 응천대의 기세 또한 흉흉하다.
초지항은 응천대가 다가오자 도를 들어 소리쳤다.
“운진(運陣)!”
원형진이 회전을 하였다.
-째쟁!
달려드는 응천대와 회전하는 화천대가 격돌하며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진부터 박살낸다!”
우원송이 언월도를 크게 휘두르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