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중랑은 마차를 몰았다.
가을이 지나는 들판은 평화로웠다. 들판마다 농부들의 움직임이 부산하였다. 수확의 계절이기에 마주치는 얼굴들마다 웃음이 흘렀다.
그러나 중랑은 초조했다.
마차 안에는 생사를 오가는 자가 있고 적은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이자의 적도 쫓아올 것이다.’
천무방만으로도 역부족인데 강소군의 적까지 있다.
구양운이 요천루주가 죽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뒤로 찾아온 세 사람이 루주의 복수를 운운하였다.
‘설마 저자가 요천루주를 죽였다는 말인가?’
강소군과 싸우던 자들의 말에 따르면 분명 그랬다.
정말이라면 천무방에 이어 요천루까지 쫓아올 판이니 중랑의 마음이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랴!”
말채찍을 휘두르며 마차를 모는데 문득 오래전 기억이 났다.
칠 년 전쯤이다.
그때도 이렇게 하염없이 쫓겼다. 죽음 직전까지 쫓겼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연화심이 마차에서 나와 마부석 중랑 옆에 앉았다.
“의식이 돌아왔습니까?”
“아직….”
연화심의 낯빛이 어두웠다.
중랑은 네 갈래 길을 만나자 남쪽 길을 택했다.
장강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왜? 곧바로 가야지?”
연화심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곧장 직진하는 길이 가장 빠르다. 북쪽으로 가면 길이 넓고 좋기는 하지만 꽤 돌아가야 한다. 남쪽은 강이 나오니 마차를 버려야 한다.
“적이 곧 쫓아올 겁니다. 마차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야죠. 배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중랑이 말채찍을 휘두르며 말했다.
적이 오면 감당할 수 없다. 무조건 따돌리는 게 최선이다.
“그래, 마차를 쫓겠지. 배로 가면 오히려 피할 수 있을지도 몰라.”
연화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원에 있을 때는 몰랐으나 이번 악양행에서 중랑의 강호 경험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게다가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을 지켜 주었다. 모든 호위가 그러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연화심도 알고 있다.
“아무튼 고마워.”
중랑은 악양행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고 따랐다.
연화심은 중랑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의지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마차는 관도를 따라 달렸다. 길은 한없이 이어져 끝이 없다.
두 사람은 한동안 묵묵히 마차가 가는 앞만 보았다.
긴 침묵을 깬 것은 연화심이었다.
“중랑. 중랑 이야기를 해 줘.”
연화심은 자신이 중랑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중상을 입은 중랑을 아버지 연성결이 구해 주었고 이후 장원에 머물며 자신을 호위하였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중랑은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어린 연화심이 물어도 담담하게 나중에 들려 줄 날이 있을 거라고만 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기대도 않고 물었는데 중랑이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산골 마을에서 자랐죠. 먹고 입을 것은 부족했으나 평화로운 마을이었지요.”
쫓기던 날들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중랑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였다.
광동성 작은 산골 마을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산적이 자주 출몰하는 곳에 마을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공적에 눈이 먼 현령은 마을 사람들을 산적과 한패거리로 몰아 토벌하였다.
중랑의 부모와 누이는 그 와중에 죽고 말았다.
중랑을 구한 건 산적들이었다.
중랑은 산채에서 자랐다. 산적들에게 칼 쓰는 법을 배웠다. 십여 년이 흘러 칼에 힘이 붙었을 때 강호에 나가 낭인 생활을 하였다.
낭인으로서 세상 경험을 쌓은 후 중랑은 복수에 나섰다.
중랑은 마을을 몰살시킨 현령을 찾아갔다.
현령은 그사이 지부대인으로 승진하여 여전히 횡포를 부리며 살고 있었다.
중랑은 천신만고 끝에 부모의 원수를 갚고 현령의 죄상을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 현령은 조정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
가문에서는 현령의 죄를 은폐하고 화근을 없애기 위해 자객을 풀었다.
천리를 쫓긴 중랑이 죽음의 위기를 맞는 순간 연성결이 그를 구했다.
이후 중랑은 삼도문에 의탁했고 연성결은 어린 딸의 호위를 맡겼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연화심은 안타까워하였다.
중랑이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가 원래 그런 성격인 줄 알았다.
눈앞에서 부모와 누이가 죽고 복수만을 위해 십여 년간 산속에서만 살았다면 누구라도 그리됐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준 뒤 중랑은 묵묵히 생각에 잠겨 말을 몰았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어느새 희미해져 간다.
복수만 생각하고 살았기에 현령을 처단하고 나니 살아갈 목적도 잃었다. 그의 유일한 생존 이유는 이제 연화심이다.
연화심을 처음 봤을 때가 누이가 죽을 때 바로 그 나이였다.
게다가 연화심은 관군의 손에 죽은 누이와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 정말 닮았는지 아니면 착각하는 것인지 몰랐으나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누이를 지킬 힘이 없었으나 이제는 다르다.
“세상에는 저보다 더한 사연을 지닌 이가 많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때 고초를 겪게 마련이지요. 아무리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도 인생은 알 수 없는 겁니다. 구양운이 그렇게 비명횡사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중랑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 연화심이 겪을 풍파 때문이다.
삼도문의 금지옥엽에게 세상의 험난함을 일러 주고 마음을 굳게 잡으라고 하고 싶었다.
천무방의 직계가 연화심을 쫓다 죽었다.
천무방이 넓은 바다라면 삼도문은 시냇물이다. 아무래도 삼도문이 화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천무방은 연화심을 끝까지 추적할 것이다.
애초에 누가 잘못을 했는가는 아무도 따지지 않는다.
힘이 있는 자가 곧 법인 세상이니까.
“이야기를 들려 줘서 고마워.”
중랑의 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연화심이 뜬금없이 고맙다고 했다.
연화심이 마부석에서 내려 마차로 들어갔다.
“아!”
연화심이 나직한 탄성을 질렀다. 중랑이 놀라 마차를 멈췄다.
연화심은 마차 문을 연 그대로 서 있었다.
중랑도 마부석에서 내려 연화심의 옆으로 다가갔다.
누여 놓았던 강소군이 마차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연화심의 말에 강소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으셨어요. 적이 쫓아오기에 피하는 중이죠.”
강소군의 눈빛이 시시각각으로 바뀐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양이다.
“계속 가도 괜찮겠소? 길이 좋지 않아 좀 흔들릴 거요.”
중랑이 물었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자연스러운 고갯짓이다.
중랑이 마부석으로 올라가고 연화심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남녀가 유별하다지만 따질 계제가 아니다.
연화심은 마차 안에 들어와 한쪽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그녀와 강소군 사이에는 사실 나눌 말이 없다.
그녀가 부탁했고 강소군은 거절했다. 그럼에도 남은 미련만 있을 뿐이다.
강소군은 말없이 마차 벽에 기대어 있을 뿐이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강소군은 자기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연화심은 은근히 서러웠다. 한편으로 노엽기도 했다.
어찌 됐든 구해 주었으면 고맙다는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 자의든 타의든 강소군도 그녀와 중랑을 천무방의 손에서 구한 바가 있다.
‘서로 비긴 셈이라고 하면 되겠네.’
강소군이 왜 구했냐고 물으면 그리 대답할 참이다. 그런데 강소군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휴우.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야.’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연화심은 생각을 멈추고 마차 문을 열고 나갔다.
달리는 마차에 매달려 문을 닫고 마부석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제비처럼 유연하다.
중랑은 왜 나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사실 그도 마차 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아무런 대화가 없어 궁금하던 참이다.
보아하니 연화심은 말도 못 건네보고 나온 모양이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강소군이라 했나? 네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냐?’
중랑은 강소군이란 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랑은 강소군과 죽기 살기로 검을 나눠볼 결심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다행히 적의 추격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게 장무강과 그 형제들 덕분이라는 걸 중랑은 알지 못했다.
***
두 필의 말이 관도를 질주하였다.
응천대 첨병이다.
첨병들이 앞서간 중랑의 마차가 남쪽을 택한 갈래 길에 이르렀을 즈음이다.
-퍽!
느닷없이 화살이 날아와 달리는 말의 목덜미에 박혔다.
“히히잉.”
말은 고통에 찬 울부짖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뒤따르던 말도 엉켜 넘어졌다.
말에 타고 있던 자들은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공중제비를 돈 다음 관도에 내려섰다.
그새 칼을 뽑아 든 모습이 예사 무인들이 아니다.
“역시 천무방 응천대로군요.”
위응환이 중얼거렸다.
장무강과 형제들은 악양을 빠져나와 지름길로 달려왔다.
그러다 세 갈래 길을 만났다. 그들도 연화심 일행이 어떤 방향을 택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중랑은 흔적을 지우는 데 능숙했다. 어느 쪽으로도 마차 바퀴 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생각 끝에 길목을 지키기로 했다.
장무강은 관도를 내려다보는 비스듬한 언덕에 서 있었다. 키 작은 소나무들이 관도로부터 시선을 가려 주는 위치다.
심마백과 위응환이 뒤에 서서 적을 내려다봤다.
“시간을 벌어 주는 정도면 된다. 적당히 하다 빠지는 거다.”
장무강이 아우들에게 일렀으나 마음이 착잡했다. 상대는 백 명이나 된다.
천무방의 선봉대라는 응천대가 모두 나섰다. 작은 문파는 그대로 휩쓸고 갈 전력이다.
“오랜만에 몸을 푸는데 적당히 하라니요.”
심마백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호전적인 인물이 심마백이다. 오죽하면 별호가 마창이랴.
관도 위에서 사방을 살피던 첨병은 적이 나타나지 않자 오던 길로 달렸다.
매복이 있다는 걸 알릴 것이다.
위응환이 다시 대궁을 겨눴다. 각종 암기에 능한 위응환은 평소 쇠뇌를 즐겨 썼다.
하지만 위응환의 진면목은 전장에서 대궁을 쏠 때 드러난다.
특별히 제작한 그의 대궁이 잔뜩 휘어졌다. 시위를 놓는 순간 첨병의 목숨은 떨어질 것이다.
“아니. 놔두게.”
장무강이 위응환의 대궁을 눌렀다.
“앞에 매복이 있다면 대처한다고 이동을 늦출 것이야.”
산동대호 장무강은 무지막지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지략이 뛰어났다.
장무강의 말대로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응천대는 나타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연 낭자는 어느 길을 택했을까요?”
장창으로 자신의 발을 툭툭 치던 심마백이 무료한 나머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싸움을 앞두고 긴장을 풀려는 것이다.
곧 적이 나타나고 생사를 다투는 싸움이 벌어질 터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을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절로 몸과 마음이 굳는다.
때로는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이 위축되어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농담을 하며 주의를 돌리곤 한다.
“자네들이 한번 맞춰 보게.”
장무강도 심마백의 의도를 알았는지 말을 받았다.
심마백이 창으로 앞으로 쭉 뻗은 길을 가리켰다.
“나라면 직진을 했을 겁니다. 삼도문이 있는 무한까지 가장 빠른 길이니까요. 안 그래?”
심마백이 위응환에게 동조를 구하듯 물었다.
“둘째 형처럼 아무 생각 없이 돌진하면 그렇죠. 제 생각은 북쪽 길로 우회할 생각을 했을 겁니다. 북쪽은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니 추적을 피하기도 용이하지요. 시일이 걸리더라도 살려면 북쪽을 택하는 게 맞죠.”
“최대한 빨리 삼도문에 닿아 아군에게 지원을 요청해야지. 시일을 끌다간 결국 잡히고 말걸?”
“대형 생각은 어디로 갔을 것 같아요?”
위응환이 심마백의 반박에 대꾸하지 않고 장무강에게 물었다.
“나는 남쪽을 택했으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