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도와 도가 부딪쳤는데 폭음성이 울리고 강소군의 신형이 흔들렸다.
공격하던 자는 일장이나 물러났다. 전력을 다하고 난 그의 전신이 떨렸다. 기운이 딸린다는 뜻이다.
그자가 양옆에 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자의 내상이 완치되지 않았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아우들! 루주의 복수를 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맹세를 잊지 않았겠지?”
세 사람은 이미 죽음을 결심하고 찾아온 듯했다.
“당연히!”
“우리가 죽거나, 저놈이 죽어야 하오!”
죽음으로 요천루주의 복수를 하자는 말에 다른 두 사람이 결연히 외쳤다.
강소군은 가만 서서 조식을 하며 그들의 대화를 듣기만 하였다.
‘내상을 입었다고?’
연화심이 퍼뜩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루터에서 처음 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파리했던 그의 안색이 떠올랐다.
다시 보니 강소군의 낯빛은 이제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랬구나. 내상을 입었던 거였어.’
그런 상태에서 구양운과 응천대 무사들을 도륙했다니. 하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연화심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다.
중랑이 그런 연화심을 잡아채어 뒤로 끌었다.
“나서면 안 됩니다.”
“그가 내상을 입었으니 위험해.”
“우리 실력으로는 도움이 안 됩니다. 오히려 그의 주의를 흐트러뜨릴 뿐입니다.”
중랑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도강을 쓰는 고수들이다.
한 사람만 나서도 중랑과 연화심은 단칼에 죽을 것이다.
“그래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연화심이 중랑을 손을 뿌리치려는 찰나, 세 사람이 번개같이 강소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 사람은 도와 도를 교차하여 강기의 그물을 만들었다.
완벽한 합격술이다.
강소군은 강기의 그물 한가운데서 있었는데 두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생을 포기한 것만 같았다.
“안 돼!”
연화심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터졌다.
그 순간 강소군이 들고 있는 비도가 두 자가량으로 쑥 늘어났다.
역시 도강이다.
-콰광!
도강과 도강이 부딪히며 엄청난 폭음과 함께 주위 십장에 강기의 파편이 흩어졌다. 땅이 파이고 나무가 부러져나갔다.
-쿨럭!
강소군은 피를 한 사발이나 쏟아냈다. 백의의 앞섶이 피로 물들었다.
공격하던 세 사람도 형편이 좋지 않았다.
한 사람은 왼팔을 잃었고 한 사람은 다리를 베였다.
다른 한 사람도 입가에 핏물이 흘렀다. 그 사람은 왼손으로 입가의 피를 쓸며 암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독하구나. 루주에게 내상을 입고도 우리 형제의 합격술을 받아내다니. 너 같은 자가 이제까지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게 이상하구나.”
“이제 끝을 보자!”
세 사람은 서로를 향해 눈짓을 하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 입에 넣었다. 그러자 세 사람의 기세가 달라졌다.
폭풍 같은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크아아. 죽어랏.”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강기의 그물을 형성하였다. 놀랍게도 먼젓번보다 그 위력이 현저하게 높았다.
강소군은 이번에는 먼저 달려들었다.
-콰쾅!
다시 십여 장 주위에 폭풍이 몰아쳤다.
나뭇잎이 사정없이 날렸다.
삼십여 장 떨어진 언덕 초입에서 지켜보는 중랑과 연화심마저 내공을 끌어올려 기운을 막아야 했다.
잠시 후 기운의 회오리가 걷혔다. 강소군은 여전히 서 있었다. 그의 백의는 이제 혈의로 바뀌었다.
도강을 펼쳤던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쓰러졌다.
남은 한 사람도 반쯤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강소군을 노려보다 옆으로 쓰러졌다.
“네, 네놈의 무공은….”
그자는 헐떡이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끝내 잇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와 비슷해.’
연화심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강삼랑도 한순간에 죽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강소군도 무사하지 않다는 것이다.
-쿨럭.
강소군이 다시 한 사발의 피를 쏟고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모옥으로 들어간 강소군은 그대로 쓰러졌다.
부서진 벽으로 그 모습을 본 연화심이 놀라 달려갔다.
“이봐요! 정신 차리세요?”
연화심이 강소군의 코끝에 손가락을 대었다. 숨이 약해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중랑! 어서 철우대사를 모셔와. 빨리.”
연화심이 울상을 지으며 중랑에게 소리쳤다.
잠시 후 철우대사가 중랑을 따라 올라왔다.
철우대사가 강소군의 상태를 살폈다.
“꽤 깊은 내상을 입었던 것 같소. 그런데 오늘 다시 충격을 받았으니 보통 사람 같았으면 벌써 죽었을 게요. 오장육부의 기운이 다 틀어졌소. 이런 상세는 노납도 어찌할 수 없구려.”
“이를 어째.”
연화심이 발을 동동 굴렀다. 철우대사가 바깥에 있는 세 구의 시신을 보며 말했다.
“이자가 사람의 생명을 취했으니 그로 인해 죽게 되는 건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소. 이렇게 해서 살겁의 끝을 보게 된 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소.”
철우대사는 강소군을 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에요. 이자들이 그를 죽이려 해서 상대했을 뿐이에요.”
“그가 누군가를 죽였고 저들은 복수를 위해 온 것이니 마찬가지요. 저들이 오지 않았어도 천무방이란 곳에서 또 사람들이 왔을 거요. 원한의 굴레란 이렇듯 끊임없이 도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요.”
연화심은 한가롭게 철우대사의 강론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중랑! 그를 업고 가요.”
중랑은 연화심이 이렇게 애태우는 건 처음 보았다. 가타부타하지 않고 강소군을 업었다.
연화심이 철우대사에게 말했다.
“은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살고자 노력은 해야겠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철우대사는 연화심을 보고 탄식을 하였다. 그리곤 품에서 약낭을 꺼내 밀랍으로 싼 환을 하나 꺼냈다.
“영약은 아니지만 잠시 목숨을 보전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오.”
연화심이 그릇을 찾아 환을 으깨어 물에 갠 다음 강소군의 입에 흘려 넣었다. 정성스런 손길이었다.
“이제 가요.”
연화심은 모옥을 둘러보고 강소군의 물건으로 생각되는 것을 보따리에 쌌다.
중랑이 강소군을 업고 연화심이 나머지 짐을 등에 맸다.
두 사람은 악양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우선 모홍객잔에 가서 이 사람을 누이고 의원을 찾아보기로 해요.”
모홍객잔으로 가니 점소이가 알아보았다.
“어? 또 오셨네?”
점소이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연화심이 다녀간 다음 한바탕 난리가 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번에는 피투성이가 된 사람까지 데려왔다.
“저번에 묵었던 별채를 내주고 의원을 불러 주게. 악양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이라야 하네.”
점소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별채로 안내한 후 의원을 찾아 나갔다.
중랑이 강소군을 침상에 누였다. 연화심이 초조하게 거실을 오가는데 장무강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왔소?”
“객잔 손님으로 온 것뿐입니다. 지난번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장무강이 침상에 누워있는 강소군을 보았다.
“낭자는 풍운을 몰고 다니는 모양이오.”
장무강은 궁금하기는 했으나 묻지 않고 그냥 나갔다.
잠시 후 점소이가 의원을 데리고 왔다.
의원은 강소군을 진맥하고 여기저기 만져본 후 고개를 저었다.
“내상이 너무 깊습니다. 오래 버티기 힘들 겁니다.”
“의원이 어찌 그리 쉽게 포기합니까?”
연화심이 발을 동동 굴렀다.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해야지요. 어찌 됐건 최선을 다해보죠.”
의원은 강소군의 전신에 침을 놓았다.
“우선 임시방편으로 오장육부의 위치를 잡기는 했으나 상세가 워낙 중하고 내장 일부는 이미 굳어 가고 있습니다. 이 상태라면 한 달도 못 버틸 겁니다.”
의원은 가망 없다고 말하고는 가 버렸다.
연화심은 허망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찾았는데 거절을 당했고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기다렸는데 그가 죽게 되었다.
“삼숙이라면 무슨 방도가 있을 겁니다.”
중랑이 연화심을 위로하였다.
연화심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 연성결의 의제가 둘인데 막내 백선문사 황의채는 문무를 겸비하였고 다방면으로 아는 바가 많았다.
“그래요! 내가 왜 삼숙을 생각지 못했지. 이자를 장원으로 데려가기로 해요.”
“그런데 이자가 여정을 견뎌낼지 모르겠습니다.”
“마차를 빌리면 되죠.”
이튿날 연화심은 지난 번 빠져 나갔던 비밀통로를 다시 한 번 이용하여 모홍객잔을 벗어났다.
점소이에게 부탁해 구한 마차가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화심은 마차 안에 이불을 두툼하게 깔아 푹신하게 한 후 강소군을 누였다.
강소군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숨결이 미약한 것만 빼면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만 같았다.
연화심의 마차가 악양을 빠져나가고 한나절 지났을 때쯤 백 명에 이르는 무사들이 들이닥쳤다.
무사들의 가슴에는 응천이라는 글씨가 선명하였다.
백 명이라면 응천대 전원이 몰려온 셈이다.
“연화심이 그자를 끌고 이리로 온 것이 확실하지?”
응천대주 우원송이 옆에 있는 수하에게 물었다.
“감시하고 있던 이목들이 들어가는 걸 직접 봤답니다.”
“그랬으면 바로 잡지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게… 이 객잔 주인이 고수입니다.”
수하가 지난번 일을 말했다.
“흥! 객잔 주인이 고수라고?”
우원송이 보기에 모홍객잔은 평범한 객잔에 불과했다.
그때. 어디선가 기괴한 음성이 들려 왔다.
“맞아. 그자들의 무공은 결코 만만치 않아.”
우원송이 소리가 들려 온 쪽을 향해 포권을 하였다.
“운 어르신께서 계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기괴한 목소리의 주인은 구양운의 부탁으로 모홍객잔을 감시하고 있던 운살이었다.
천무방에서 천지풍운의 위상은 특이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천지풍운으로만 불렸다. 방주와 직계를 호위하는 그들은 천무방의 편제에 속하지 않았다.
심지어 천무방주 구연강도 그들에게는 함부로 하대하지 않았다. 호위라기보다는 모종의 계약관계와 같았다.
운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응천대가 모두 나섰군. 연화심을 잡으려고 왔다면 이미 늦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연화심이라는 계집은 아침 일찍 악양을 빠져나갔다.”
운살은 연화심이 객잔에 든 이후부터 나갈 때까지 쭉 지켜보았다.
연화심이 비밀통로를 이용해 나갔으나 그것마저 알아챘다.
그럼에도 객잔에서 이를 눈치챈 이가 없었으니 놀라운 은신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럼 막으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원송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크크. 지금 내게 책임을 묻는 것인가? 가소롭군. 내게 명을 할 수 있는 자는 구 방주와 직계뿐이란 걸 잊었나?”
운살이 마지막으로 받은 명이 이 객잔을 지키는 것이었다. 연화심이 오가는 건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운살의 목소리에 불쾌감이 어리자 우원송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책임을 묻다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주제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방주님의 새로운 명이 있습니다.”
“뭔가?”
우원송이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방주가 직접 명을 내렸다는 건가?”
우원송의 손에 있던 서찰이 뭔가에 이끌리듯 날아올랐다.
서찰은 모홍객잔 맞은편 주루 삼 층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운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서찰의 내용을 자네도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우원송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럼 가지.”
우원송이 응천대원들과 함께 악양을 빠져나갔다.
천무방 응천대가 사라지자 장무강이 나타나 객잔 문 앞에 섰다.
장무강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손에 든 식도를 가만 내려다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우들. 아무래도 연 문주의 여식이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장무강의 뒤로 숙수차림의 사내 둘이 섰다. 각기 대궁과 장창을 들고 있었다.
대궁을 든 이는 얼굴이 말끔하였는데 몸이 작은 편으로 기민하게 생겼다.
장창을 든 이는 짧은 팔자수염을 하고 있는데 마른 몸매나 날카로운 눈매로 보아 성질이 여간내기가 아닐 듯 보였다.
“당연하죠! 다시 강호에 나서다니 오히려 감사해야겠군요. 내 속이 다 후련합니다.”
장창을 든 심마백이 장무강을 보고 웃었다.
대궁을 든 막내 위응환이 심마백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암요. 원한은 잊어도 은혜는 잊지 말아야죠.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