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튿날.
아침 일찍 연화심은 언덕을 올랐다.
연화심은 모옥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모옥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 대협!”
입술만 깨물던 연화심이 마침내 결심을 하고 강소군을 불렀다.
-삐걱.
모옥 문이 열리며 강소군이 나타났다.
파리한 얼굴에 눈빛이 붉다. 살귀라는 철우대사의 말이 떠오른 연화심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무슨 일이오.”
강소군은 마치 오늘 처음 본다는 투로 말했다.
연화심이 용기를 냈다.
“안에 들어가서 말해도 되나요?”
강소군이 말이 없자 연화심이 용기를 내어 들어갔다. 어제까지 머물렀던 모옥이라 연화심에게도 익숙하였다.
거실로 쓰는 공간에 나무로 만든 조악한 탁자가 있다.
연화심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비단으로 싼 네모진 곽이다.
“이건 대대로 내려온 보도예요.”
연화심이 비단을 풀자 기다란 목갑이 드러났고, 목갑을 열자 작은 비도가 나왔다.
도신은 날렵해 보였으며 자루에는 홍옥이 박혀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귀해 보였다.
“…!”
연화심은 잠시 공기가 싸늘해진 느낌을 받았다.
비도를 본 강소군의 눈빛이 달라졌다.
연화심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이런 신외지물이 대협의 눈에 차지 않겠죠. 하지만 빈손으로 올 수 없어 가져왔어요.”
연화심은 절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천무방에서 저희 삼도문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어요. 혼인을 빙자하였지만 그 속셈은 뻔하죠.”
연화심이 가슴이 벅차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가 다시 잇곤 하였다.
“구양운이 죽었으니 이제는 힘으로 나올 게 분명해요.”
연화심은 구양운의 죽음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승과 저승이 그리 가까운지 몰랐다.
“이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수밖에 없네요.”
“….”
연화심은 자신만 떠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강소군은 말없이 홍옥비도만 보고 있을 뿐이다.
“왜 그러세요?”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함을 깨달은 연화심이 물었지만 강소군은 말이 없다.
마치 석상처럼 앉아 있을 뿐이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연화심은 강소군의 침묵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어제 왜 도와야 하느냐고 말씀하셨지요. 저도 그 이유를 몰라요. 다만 도와주실 것이라 믿고 찾아온 거죠. 물론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어렵게 왔으니 정식으로 부탁을 드리고 싶었어요.”
연화심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청이 억지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말을 마치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비도는 기왕에 가져온 것이니 어제 제 목숨을 구해 주신 답례로 드리고 싶어요.”
연화심은 말을 마치자마자 일어서서 모옥을 나섰다.
강소군 입에서 그마저 거절한다는 말이 나올까 두려웠던 것이다.
강소군은 연화심을 잡지 않았다.
***
단풍이 천무산 자락을 붉게 물들인 날 구양운의 시신이 돌아왔다.
십대고수의 일인이자 천무방의 주인 구연강은 분노하였다.
애지중지하던 막내아들의 죽음이다.
그의 분노에 천무방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원정을 나갔던 대공자 구양조가 급보를 받고 황급히 돌아왔다.
“어찌 된 일입니까? 막내가 죽다니?”
구양조가 마중 나온 총관에게 물었다.
구양조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나 성품이 유하여 천무방 사람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다.
천무방 총관 우승정의 안색은 어두웠다.
“삼도문의 여식을 쫓다가 고수를 만났답니다. 응천대 무사 이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당했습니다.”
“운살은 어디 있었다는 말입니까?”
천지풍운.
천무방주 구연강과 자식들을 암중에서 호위하는 네 명의 고수다.
운살이 있었다면 상대가 제 아무리 고수라하더라도 몸을 뺄 수 있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운살은 삼공자의 명을 받아 다른 일을 처리하고 있었답니다.”
구양운은 운살로 하여금 모홍객잔을 감시하라고 했다. 악양에서 감히 자신을 해할 자가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구양조는 곧바로 내원으로 향했다.
아들의 시신을 본 뒤 구연강은 며칠째 칩거하고 있었다.
구연강이 머무는 전각 주위는 질식할 것만 같은 살기로 뒤덮여 있었다.
“아버님, 소자가 돌아왔습니다.”
“들어오라.”
구연강은 거실 의자에 홀로 앉아 있었다. 탁자에 있는 차는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
“대체 누구랍니까? 감히 천무방의 직계를 해한 자가.”
구양조가 예를 올린 뒤 물었다.
구연강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건장한 체격을 지녔다.
천하십대고수의 일인.
한 자루 중검으로 당대에 천하를 다투는 천하사패 일원인 천무방을 일군 자다.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받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구양조 역시 아버지가 늘 조심스럽다.
“모른다.”
“방건이 응천대를 이끌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놈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방건은 어디 있습니까?”
“옥에 처박아 뒀다. 죽음으로 죄를 물을 것이다.”
“죽이다니요? 방건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운아가 눈앞에서 죽는데 보고만 있었던 놈이다. 곱게 죽는 것만도 과분하다.”
구연강은 어조는 단호하였다.
구양조는 말리고 싶었으나 구연강의 분노가 너무 컸다.
구연강이 식은 차를 마셨다.
구연강은 분노를 삭이는 중이다.
그는 천무방을 천하사대 패자로 일으킨 거인이다. 분노라는 감정에 휩쓸려 섣부른 결정을 내릴까봐 스스로를 연금하는 중이다.
“소자, 자세한 내막을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알았다.”
구연강은 짤막하게 한마디 하였을 뿐이다.
구양조가 묵묵히 예를 올리고 구연강의 거처를 나왔다.
구양조가 자신의 거처로 가는데 길목에서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요, 형님.”
구연강의 둘째 구양수였다. 두 사람은 가까운 연못가 정자로 갔다.
“셋째가 그리 허망하게 떠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 줄 걸 그랬구나.”
구양조는 구양운을 떠올리자 착잡했다.
나이 차가 있어 같이 어울린 날이 드물었다.
구양조는 일찌감치 천무방의 주력으로 강호를 종횡하였기에 방에 머무는 날이 많지가 않았다.
“형님에게는 차라리 잘된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구양수의 말에 구양조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막내가 비명횡사를 한 게 내게 잘된 일이라니?”
“솔직히 그렇지 않소? 아버지 마음이 운아에게 있었다는 걸 형님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요?”
구연강은 늦게 얻은 구양운을 애지중지하였다.
구양조와 구양수는 먼저 세상을 떠난 전처의 자식이고 구양운은 지금 살고 있는 마씨 부인의 소생이다.
“그런 소리 마라! 비록 어머니가 다르다 해도 우리는 한 핏줄이다. 도대체 너는… 그만두자.”
구양조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구양조는 이복동생 구양운보다 오히려 친동생인 구양수를 꺼렸다.
구양수는 음침한 데가 있다.
구양수는 무공에 재주가 없었다. 천무방의 직계로서 고수 소리를 듣기는 하나 구연강의 마음에 들기에는 부족했다.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살아 있었더라면 천무방의 후계자는 양운이 되었겠죠.”
“나는 천무방 후계자 따위에는 관심 없다. 정히 하고 싶으면 네가 해라.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구양조가 돌아섰다. 그런 구양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구양수의 눈빛이 음침하다.
***
며칠 후 천무방 대전에 방의 주요 인사들이 모였다.
“삼공자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누군가 외쳤고 모두가 동조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연강이 침묵하고 있는 장남 구양조에게 물었다.
“요천루주가 죽은 뒤 호남무림이 분열하고 있습니다. 벌써 문파 간 다툼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지요. 조만간 그 여파가 우리에게까지 미칠 겁니다.”
구양운의 죽음에 대해 물었는데 구양조는 강호 정세를 들먹였다.
“루주가 죽었다 하나 요천루의 힘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호북무림에서의 지배력을 견고히 하면서 요천루의 세력을 흡수해야 합니다. 도룡회와 대정무각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천하사패 중 누가 요천루의 남은 세력을 얻는지에 따라 장차 무림의 판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구양운이 대전에 앉은 천무방의 수뇌부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양운을 그리 만든 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다만 지금 무림의 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점을 감안하여야 할 것입니다.”
구양조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태사의에 앉아 있는 구연강을 향해 포권을 하였다.
“아버님. 운아의 복수와 호남무림의 분열에 동시에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구양조의 논리는 일견 타당하였으나 구연강이 듣기에는 서운하였다.
구양운과 응천대 이십여 무사를 순식간에 죽였다 한다.
절정고수라는 뜻이다.
절정고수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선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구양조는 두 가지 동시에 진행하는 방안을 묻고 있지만 사실상 복수는 차후로 미루라는 뜻이다.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한참 듣기만 하던 구연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조! 네게 광천대와 풍운대, 혈우대를 내주겠다. 호남무림을 접수하라.”
좌중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광천대와 풍운대, 혈우대 삼개 대는 천무방의 무력 사분의 일에 달하는 전력이다.
“운아의 복수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아들의 원수는 아비가 갚아야지.”
구연강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
“돌아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문주께서 걱정이 많으실 겁니다.”
중랑은 연화심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강소군이 분명하게 거절했음에도 연화심은 백륭사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봐 왔기에 그녀의 고집을 잘 안다. 하지만 이건 고집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홍옥비도를 받았어. 그렇다면 뜻이 있다는 게 아닐까?’
연화심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며칠만 더 기다려 줘.”
연화심이 고개를 젓는데.
-쾅!
강소군의 모옥이 있는 쪽에서 폭음성이 들렸다.
중랑이 벌떡 일어났다.
내공과 내공이 부딪히는 폭음성이다.
고수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중랑이 검을 챙겨 들었다.
“나오지 마십시오.”
“아니야. 나도 가 봐야겠어.”
바깥으로 나가니 백륭사 스님들이 나와서 언덕 쪽을 보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새 천무방에서 찾아온 것일까?”
연화심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중랑에게 물었다.
“아닐 겁니다.”
천무방도들이 오기에는 아직 이르다.
중랑과 연화심은 언덕 위 모옥으로 향했다.
-쨍!
-콰광!
병장기와 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모옥 앞 공터에서 강소군이 세 사람과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전포를 입은 세 명은 모두 장년의 나이였는데 도를 썼다.
강소군은 연화심에게서 받은 홍옥비도를 들고 싸우는 중이다.
“저자들은 누굴까?”
네 사람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한지 모옥 주위가 초토화되었다.
모옥은 한쪽 벽이 반쯤 무너졌다.
세 사람의 합격술은 무척 뛰어났다. 세 사람이 쓰는 도가 길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도 끝에서 한 자가량 희뿌연 기운이 뻗어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강?”
중랑이 자신도 모르게 뇌까렸다. 도강을 구사하는 고수가 셋이나 되고 그들이 한 사람을 공격하다니.
강소군은 그들을 맞아 밀리지 않고 싸우는 중이다.
‘세상에 고수는 정말 많구나.’
중랑은 한때 천하를 활보하였다. 그럼에도 이런 고수들은 보지 못했다.
강소군은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날아드는 도강을 피했다.
“죽어랏!”
정면에서 공격하던 자가 승부수를 띄우려는 듯 몸을 날리며 도를 휘둘렀다.
수십 가닥의 도기와 강기가 뒤섞여 강소군을 향해 쏟아졌다.
양쪽에서 퇴로를 막고 있었기에 강소군은 그대로 맞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