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6화 (6/250)

6

응천대 무사들도 다음 날 출발하는 걸 알고 있었다. 연화심의 말에 순순히 호위를 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백륭사와 정자로 나뉘는 갈림길이 나왔다.

“이 길이 아닙니다. 공자께서는 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연화심이 백륭사 앞을 지나쳐 호수로 향하자 무사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보름 가까이 저 모옥에 갇혀 살았어요. 떠나기 전에 동정호 구경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무사들은 연화심과 구양운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굴지 못했다.

“내가 연 낭자를 따라가겠네. 자네는 어서 공자님께 연락하게.”

무사 한 사람이 백륭사로 달려가고 다른 한 사람이 따라왔다.

연화심은 숲을 지나 정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정자 아래로 작은 길이 있는데 백륭사 나루터로 이어진다.

쪽배나 댈 만한 작은 나루였다.

연화심이 보았던 배는 그사이 나루터 가까이 다가왔다.

뱃머리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

뱃머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본 연화심의 가슴이 뛰었다.

그다!

거짓말처럼 그가 나타났다.

‘이럴 수가! 하늘이 도와주신 거야!’

연화심의 가슴이 돌연 쿵쾅거리며 요란하게 뛰었다.

배는 생각보다 빨랐다.

어느새 나루터 가까이 다가왔다.

“내려갈 수 없소.”

무사 하나가 연화심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고는 정자에서 강가로 내려가는 길을 막아섰다. 손은 이미 검자루에 가 있다.

“늦었다!”

중랑이 번개같이 출수하였다. 무사가 엉겁결에 왼손을 들어 검을 막았다.

손목에 찬 호신구로 검을 막았으나 중랑이 검을 비틀자 호신구를 타고 내려와 팔을 베었다.

“크윽!”

무사는 재빨리 물러나며 검을 뽑아 연이어 들어오는 중랑의 검을 막았다.

-삐이익!

그 와중에 언제 꺼내 물었는지 무사의 입에서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백륭사에 울려 퍼졌다.

-휙 휙!

중랑이 연달아 검을 찔러 가며 무사를 길옆으로 몰아붙였다.

“아가씨! 어서 내려가세요.”

중랑이 길을 열자 연화심이 강 쪽으로 몸을 날렸다.

중랑은 무사를 압박하면서 서로의 위치를 바꿨다. 이제 길은 중랑이 막는 상황이 됐다.

무사가 죽기살기로 검을 휘둘렀다.

-쨍쨍!

중랑은 무사의 검을 맞받아내면서 뒷걸음질 쳤다.

난데없는 호각소리에 이어 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뱃사공이 정자 쪽을 올려다봤다.

한 여인이 절벽 길을 달려 내려오더니 나루로 향해 오고 있다.

“공자님!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사공이 배를 대려다 말고 주저하며 말했다.

강소군도 나루터로 달려오는 연화심을 보았다. 왠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째쨍!

응천대 무사는 연화심을 놓치면 자신이 삼공자의 손에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중랑은 무사의 검을 쳐내며 연화심의 뒤를 따랐다.

“나루로 도망쳤다! 어서 잡아라!”

백륭사 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응천대 무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연화심과 중랑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나루가 가까워지자 증랑이 큰 소리로 외쳤다.

“사공! 어서 배를 대시오!”

사공이 불안한 눈으로 강소군을 보았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공이 마지못해 나루에 배를 대었다.

“어림없다!”

쫓아오던 무사가 큰 소리를 지르며 도약하였다.

중랑이 되돌아섰다. 무사는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며 날아오는 기세의 이점을 살리려 하였다.

중랑이 몸을 옆으로 비끼며 검을 찔렀다.

무사가 황급히 검로를 바꾸려 했으나 허공에 떠 있는 자세였기에 용이하지가 않았다.

무사는 빈 곳이 많았고 중랑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크윽!”

무사가 중랑의 검에 옆구리를 깊숙이 찔리고는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멈추지 못할까!”

언제 나타났는지 정자 쪽에서 방건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방건과 천무방 무사들이 미친 듯이 절벽을 달려 내려왔다.

한 달 동안 백륭사에서 놀고먹은 터라 기운이 팔팔했다. 달려오는 기세가 무척 사납다.

중랑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무사를 내버려 두고 다시 달렸다.

그런데 앞에 연화심이 우두커니 서 있다.

‘아니,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이상하지만 상황이 급박하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연화심의 팔을 잡아끌고 배로 향했다.

연화심은 배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소군을 보며 말을 잃었다.

해야 할 말이 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중랑의 손에 끌려 강소군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사공! 태워 주시오. 돈은 얼마든지 내겠소!”

중랑이 외쳤으나 사공은 중랑의 뒤를 보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보니.

-쉬이익!

수전이 날아왔다.

천무방 무사들 몇몇이 연달아 수전을 날리며 쫓아오고 있었다. 수전은 사공을 향해서도 날았다. 아예 사공까지 죽일 모양이다.

“헉!”

그렇지 않아도 잔뜩 경계하고 있던 사공이다. 수전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배를 버리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사공은 물속에서 배를 밀어 호수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나루에서 삼 장여 거리로 벌어졌다.

중랑은 속이 타들었다.

거의 다 왔는데 눈앞에서 배를 잃을 지경이다.

어느새 천무방 무사들이 나루터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강소군을 가운데 두고 연화심과 천무방이 대치하였다.

“연 소저. 호의를 베풀었는데 이렇게 기만하다니. 꼭 힘을 써야겠소?”

구양운이 앞으로 나서며 연화심을 노려보았다.

“거기. 이리 나와라!”

방건이 강소군을 보고 손짓하였다.

백륭사를 찾는 향화객이 우연찮게 휘말린 것이라 생각했다.

강소군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강소군! 도와주세요!”

연화심이 강소군을 향해 외쳤다.

도와 달라!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왔다.

연화심의 간절한 목소리가 강소군을 불러 세웠다.

강소군이 고개를 돌려 연화심을 보았다.

연화심이 정신없이 다가가며 말했다. 천신만고 끝에 만나고자 한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아무 생각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걸 모두 드리겠어요. 저를 원한다면 저를 드리겠어요!”

“…!”

“…!”

모두가 놀랐다. 젊은 처녀가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다.

중랑마저 연화심을 쳐다보았다. 평소 알던 연화심이 아니다. 눈빛마저 이상하다.

“아가씨?”

중랑이 놀라 연화심을 붙잡는데 강소군은 물끄러미 연화심을 바라볼 뿐이다.

‘저놈이 누군데? 연화심이 아는 사람인가?’

구양운의 눈꼬리가 쑤욱, 올라갔다.

강소군을 훑어보았다. 스물 중반이나 되었을까? 문사 차림이었는데 얼굴이 창백한 것이 병자 같아 보였다.

“나를 아는가?”

강소군이 연화심에게 물었다.

목소리가 낮고 무척이나 차분하였다. 나이 차이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대뜸 하대를 한다. 그런데 그 말투가 너무나 자연스럽다.

“신강삼랑!”

연화심이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생뚱맞았다.

‘신강삼랑?’

강호 견식이 넓은 방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 본 기억이 있는 별호다.

신강에서 흉명을 떨치는 놈들이다. 그들의 별호를 여기 악양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구양운이나 다른 무사들은 신강삼랑이라는 별호를 처음 듣는다.

중랑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호로 봐서 좋은 놈들은 아닐 성싶다.

그런 자들을 연화심이 어찌 알고 있다는 말인가?

“신강삼랑?”

강소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일 년 전 이맘때였죠.”

밑도 끝도 없는 연화심의 말은 듣는 사람들에게 더욱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

강소군의 미간이 좁아졌다. 기억나는 바가 있었다.

작년 이맘때 세 사람을 죽였다. 그들이 스스로를 신강삼랑이라고 밝혔던 것 같다.

신강삼랑이 죽였을 때 인기척을 느꼈다. 절벽 버드나무 옆에 선 여인의 눈. 술 취한 기분에 무척 눈이 맑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그리곤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 여인이 지금 찾아와 도와달라고 한다.

밑도 끝도 없이.

“도와달라고?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거지?”

연화심은 대답을 못 했다. 다만 격정에 사로잡혀 얼굴만 붉힐 뿐이다.

그 모습을 본 구양운은 알 수 없는 분노가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일었다.

‘저년이 백륭사를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었구나! 저놈을 만나려던 거였어.’

무작정 도주하다 백륭사에서 잡힌 걸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자를 찾아온 것이다.

구양운이 강소군을 보았다.

다시 보니 무척 준수한 얼굴이다. 어딘가 모르게 명가의 기품이 흐른다.

구양운은 갑자기 불같은 질투와 배신감을 느꼈다.

“크크큭. 연 소저! 내가 소저를 잘못 봤군. 이제 보니 정숙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 역시 그렇게 대접해도 되겠군.”

구양운은 연화심이 누구를 끌어들이든 개의치 않았다.

천무방과 자신의 힘을 믿었다. 다만 연화심이 의지하려고 드는 자를 보니 사내로서 질투가 났을 뿐이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냉랭하기만 했던 연화심이 저놈에게는 사뭇 다르다.

너무나 극진하다.

“네놈은 누구냐? 연 소저를 어떻게 아는 것이냐?”

구양운이 강소군에게 물었다.

강소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얼굴에 좀처럼 감정을 알 수 없는 고요한 눈. 그 눈이 구양운을 향했다.

구양운은 강소군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하를 오시하는 눈빛이다.

강소군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또 왜 내게 그런 것을 묻느냐?”

“묻느냐? 말이 짧군.”

구양운은 살기를 일으켰다.

강소군이 한마디 하였을 뿐인데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구양운은 자신이 먼저 하대를 했음에도 상대방의 말투를 트집 잡았다.

“흐흐.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놈이군. 연 소저와 무슨 사이냐고 물었다.”

강소군의 시선이 다시 연화심에게 향했다.

“낭자가 연 소저인가?”

연화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찾아 수백 리를 달려왔고 한 달이나 기다렸어요.”

연화심은 그간의 일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나왔다.

삼도문의 금지옥엽으로 자란 연화심은 난생처음 적에게 쫓기며 죽을 고생을 했다.

“도움을 청하려고요.”

연화심은 말을 하다 말고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정을 모두 이야기해도 강소군의 태도로 보아 들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대가는 충분히 드릴 수 있어요.”

강소군은 가만 연화심을 보기만 할 뿐이다.

표정이 없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뱃사공은 배를 밀고 가다 오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 이르자 배에 올랐다.

그리고 나루터에서 벌어지는 일을 구경하고 있었다.

중랑이 연화심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내가 뒤를 막을 테니 어서 나룻배로 가시지요.”

“아냐. 중랑! 여기서 살아나간다 해도 어차피 저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해.”

연화심이 중랑의 손길을 뿌리치고 강소군을 향해 말했다.

연화심은 이제 이성을 찾았다.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당신을 삼도문의 방수로 고용하고 싶어요! 들어주시겠어요?”

강소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태도다.

연화심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생각이라도….”

차분히 생각이라도 해 보라고 싶었건만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눈물을 흘렸다.

연화심이 눈물까지 보이자 구양운의 질투심은 더욱 활활 타올랐다.

천무방의 삼공자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던 구양운으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질투라는 감정은 맹렬하여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구양운은 눈앞에 있는 저놈을 찢어 죽이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저렇게 매달리니 한번 나서 보지 그래?”

구양운은 빌미를 잡아 강소군을 죽여 버릴 생각을 했다.

강소군이 시선을 돌려 구양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저 낭자를 도와주라니. 혹 저 낭자를 위해서 너를 죽여 주기를 바라는 것인가?”

“나를 죽여? 하하하.”

구양운은 기가 차서 광소를 터뜨렸다. 살심이 솟았다.

“죽일 수 있다면 죽여 보지? 누가 죽나 결과는 두고 보아야 알겠지. 어때 저년을 위해 나서 보겠나?”

구양운은 이제 막 나갔다. 연화심을 저년이라 욕하며 당장이라도 손을 쓸 기세다.

강소군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햇볕 맑은 가을 하늘이다.

“좋은 날이다. 죽기는 너무 아까운 날 아닌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