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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심은 응천대를 뚫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중랑의 부상이 작지 않다.
“내가 천무방 사람들을 따라갈 이유가 없죠. 용건이 있다면 삼공자보고 나를 찾아오라 하세요. 나는 백륭사에 머물고 있을 거니까.”
연화심이 중랑을 부축하고 산문을 넘어 절로 향했다.
방건은 연화심을 잡지 못했다. 구양운이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걸 잘 안다.
구양운과 혼인하면 그 순간 연화심은 상전이 된다. 이미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너희는 백륭사를 포위하라. 쥐새끼 한 마리라도 빠져나가면 책임을 물을 것이다.”
방건이 무사들을 배치하고 전령에게 일렀다.
“삼공자를 찾아 모시고 와라.”
응천대 무사들이 흩어지자 방건은 산문 앞에 앉았다.
몇 일간의 추적이 끝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이게 무슨 꼴이람. 계집이나 쫓고.’
천무방 선봉 응천대 일조장이라는 자신의 직책을 생각하면 한심스러운 임무였다.
***
연화심이 중랑을 부축하고 백륭사로 들어가는데 노승이 서 있었다.
백륭사 주지 철우대사는 마르고 약간 길쭉한 얼굴이 엄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철우대사는 피투성이가 된 중랑을 보자 불호를 외웠다.
“나무 관세음보살. 검을 내려놓으면 그 자리가 피안인데 어찌 혈옥을 떠도는 것이오.”
연화심은 속이 타들어 갔다.
“대사님, 우선 쉴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본사는 검을 쥔 자는 들이지 않습니다. 검을 버리고 오시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중랑이 비틀거리며 검을 짚고 일어났다.
“중랑, 적의 수가 많으니 역부족이야. 검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잖아?”
“무사에게 검이 없으면 목숨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기를 떼놓을 수 없는 건 연화심도 마찬가지였다.
중랑의 부상이 워낙 커서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다.
“검을 쥐고 있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란 걸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이오. 나무 관세음보살.”
철우대사가 불호를 외우고 돌아서며 말했다.
“절 뒤에 모옥이 있는데 비어 있을 것이오.”
중얼거리듯 흘리는 말에 연화심의 귀가 번쩍 뜨였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연화심은 철우대사가 말하는 모옥이 어딘지 알았다. 방금 다녀왔으니까.
“일단 여기서 요양하고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게 좋겠어.”
연화심이 중랑을 부축하고 모옥으로 갔다.
모옥은 잘 정돈되어 있으나 침상이나 탁자에 먼지가 깔려 있었다. 주인이 떠난 지 오래됐다는 걸 의미한다.
연화심의 마음은 씁쓸하였다.
‘그를 만나러 왔다가 그가 떠난 빈집에 머물게 되다니.’
중랑의 상처를 묶은 천을 풀었다. 상처가 깊어 어깨뼈가 보일 정도였다.
연화심은 벌어진 상처를 보자 손이 떨리고 절로 눈물이 솟았다.
“미안해. 나 때문에….”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칼을 쥐고 사는 사람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연화심은 다시 금창약을 바르고 정성스레 상처를 꿰맨 후 천으로 칭칭 감았다.
“결국 천무방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어. 이제 어쩌지?”
연화심이 하소연하듯 중얼거렸다.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을 겁니다.”
중랑이 일어서다 말고 잠시 비틀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 비까지 맞았다.
중랑은 이를 악물고 일어나 모옥 밖으로 나갔다.
중랑이 지세를 살폈다. 모옥이 있는 언덕은 높지 않았으나 백륭사 전각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백륭사 마당 너머로 드넓은 동정호가 펼쳐진다.
모옥 뒤로는 산이다.
‘배만 있다면.’
천무방 놈들이 이미 길을 모두 막았을 것이다.
남은 길은 호수밖에 없다.
중랑이 주위를 살피는데 구양운과 천무방 사람이 올라왔다.
“아가씨, 들어가 계시지요.”
중랑이 연화심에게 모옥으로 들어가길 권했다.
“아니. 이 일은 내가 자초한 것이니 중랑이야말로 들어가 있어.”
연화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양운이 모옥 마당으로 들어섰다.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삼도문의 금지옥엽 연 소저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
구양운이 포권을 하였다.
구양운은 흡족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연화심은 듣던 것 이상의 절색이었다.
삼도문과 혼인동맹을 한다고 했을 때 구양운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러 여자를 섭렵한 구양운이다. 어지간한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는다.
게다가 구양운의 야망은 컸다.
언젠가는 형들을 제치고 천무방의 주인이 될 꿈을 품고 있다. 그러니 대파나 세가의 여식이라면 몰라도 무한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문파의 딸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내심 자신을 경계하는 형들이 주선한 것이라 여기고, 연화심을 죽여 빌미를 없애기 위해 삼도문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도착하자마자 연화심이 삼도문을 벗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뒤를 쫓았다.
그런데 며칠 쫓으며 도망치는 재주가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보니 용모도 기대 이상이었다.
‘재주와 용모를 둘 다 갖춘 여인이 많지는 않지.’
구양운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구양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연화심은 그 모습이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구양운인가요? 무슨 일로 사람을 쫓는 거죠?”
“하하. 낭자를 쫓다니. 오해를 한 것 같군요. 낭자는 본 방에서 삼도문에 혼인첩을 보낸 걸 설마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요? 장차 안사람이 될 여인이 험악한 강호에 나왔는데 사내가 어찌 가만 보고만 있을 수 있다는 말이요.”
구양운의 말은 번지르르하였다.
“혼인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혼인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렇담 돌아가세요. 삼도문이 천무방과 혼사를 맺을 일은 결코 없으니까요.”
“어른들이 결정할 일이요. 문무를 겸비한 연 소저가 설마 집안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겠지요?”
연화심이 발끈하여 소리쳤으나 구양운은 능글맞게 되받았다.
연화심은 분을 누르며 생각했다. 잠시 수모를 참지 못하여 큰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적이 당장 해치려 들지 않는다면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들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왔어요. 정말 그런 이유라면 물러가세요. 오랜만에 푹 쉬어야겠군요.”
“아하. 그렇군요. 미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겪지 않아도 될 고초를 겪으셨군요. 이 모두 내 불찰이니 책임을 져야겠습니다. 본 방의 무사들이 경계를 설 터이니 두 분은 푹 쉬시기 바랍니다. 내일 다시 찾아오지요.”
구양운은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흐흐. 네년은 이미 내 손바닥에 들어왔다.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미 다 잡은 연화심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깨끗하게 물러나는 척하면서도 무사 넷을 남겨 사실상 연화심을 연금하였다.
“가자. 자네들도 가서 쉬어야지.”
구양운은 뜻을 달성하자 수하들에게도 선심을 썼다.
구양운 일행은 백륭사를 점거하였다.
철우대사가 검을 버리라 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술과 고기까지 들여와 마음껏 먹고 마셨다.
***
중랑의 상처는 깊었다.
긴장이 풀리자 혼절하였고 이틀이 지나서야 깼다. 그러고서도 일주일이 지나서야 거동을 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백륭사 주지 철우대사가 의술에 조예가 깊었다.
철우대사가 약을 지어 주었는데 이를 복용한 후 중랑은 빠르게 회복하였다.
그 사이 구양운은 매일 같이 연화심을 찾았다. 낮에는 연화심을 찾고 밤에는 악양의 기루에서 놀았다. 그 생활도 지쳤는지 어느 날부터 연화심을 독촉하였다.
“나와 같이 삼도문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이제 기한도 다 되어가니 내가 직접 연 문주께 승낙을 받아내겠소.”
천무방은 혼인첩을 보내며 삼 개월의 시한을 주었다.
구양운은 이제 답을 할 시한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연일 연화심을 압박하였다.
연화심은 거리를 두면서도 중랑의 부상 때문에 딱 잘라 내치지를 못했다.
속만 타들어 갔다. 적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며칠째 맑은 날이 이어졌다.
지긋지긋하게 퍼부었던 비에 대한 기억은 어느새 사라졌다.
멀리 보이는 동정호의 물빛은 푸르렀고 바람은 선선하다.
중랑은 가을바람이 귓전을 스치는 감촉을 느끼며 멀리 동정호를 바라봤다.
수평선 근처에 배들이 오간다.
중랑은 언덕 아래 백륭사와 절벽 아래 정자 쪽을 보았다.
‘최대한 질주하면 나루터까지 일각? 일각이 조금 넘을 수 있다.’
정자 아래쪽에 작은 나루가 있다. 백륭사를 배로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동자승 말에 따르면 식자재를 가져오는 나룻배가 보름에 한 번 오갈 뿐이다.
중랑은 그 배를 이용하여 구양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생각이다.
적들이 점거하고 있는 백륭사에서 정자까지는 일각도 걸리지 않는다.
정자에서 나루터로 가는 길은 외길이다.
자신이 그 길을 틀어막고 버틴다면 연화심이 배를 탈 수 있는 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나룻배는 열흘 후에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중랑이 검을 뽑아 천천히 검로를 펼쳤다. 어깨를 많이 쓰는 동작은 아무래도 어려웠다.
“중랑, 이제 간신히 아물었는데 무리하면 안 돼.”
언제 다가왔는지 연화심이 말렸다.
“움직이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중랑은 자신의 계획을 연화심에게 일러 줄까 하다 말았다.
그가 아는 연화심은 사람을 속이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
연화심이 계획을 알고 있다면 구양운이 알아챌 가능성이 높다.
또한 앞으로 변수가 너무 많다. 괜한 희망에 집착하다가 오히려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중랑이 우려한 변수는 바로 다가왔다.
오후에 구양운이 올라왔다. 자못 심각한 얼굴이었다.
“소저, 방에서 귀환하라는 명령이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소. 같이 가야겠소.”
구양운이 통보하듯 말했다. 구양운은 강제로라도 끌고 갈 기세다.
“제가 왜 천무방으로 가야 하는 거죠?”
“세상이 험한데 어찌 혼인할 여인을 홀로 두고 갈 수 있겠소. 이제 곧 강호에 큰 변란이 닥칠 것이오.”
“변란이라고요?”
“요천루의 주인이 죽었소.”
“요천루주가요?”
연화심이 놀라 되물었다.
천무방이 호북무림의 강자라면 요천루는 호남무림과 주변을 휘어잡고 있는 세력이다.
“천하사패 중 하나인 요천루가 주인을 잃었단 말이오. 분명 한바탕 피바람이 불어 닥칠 것이오.”
연화심은 암울하였다.
요천루가 힘을 잃었다면 천무방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날뛸 것이다.
당장 구양운이 돌아가려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내일 길을 떠날 것이오. 준비하고 있으시오.”
구양운은 일방적으로 말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갔다.
“탈출하려 한다면 오늘밖에 시간이 없겠군요.”
중랑이 구양운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운신할 수 있겠어?”
묻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산을 넘는 소로가 있습니다. 오늘 밤 떠나세요. 저들은 제가 막겠습니다.”
중랑이 세워 둔 두 번째 계획이다.
“그럴 순 없어. 나 혼자 간다고 해도 저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어려울 거야. 차라리 따라가는 척하다 중도에 탈출하는 게 나을 거야.”
중랑이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저들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빠져나오기 힘들 겁니다. 오늘 밤이 기회입니다.”
“내겐 중랑의 안위도 중요해.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겠어?”
두 사람은 마음이 무거웠다.
중랑의 말대로 연화심만 빠져나간다 쳐도 무사히 삼도문까지 돌아간다고 보장할 수 없다.
“배가 있으면 좋겠는데….”
연화심이 멀리 동정호에서 다가오는 배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중랑에게 말했다.
“저 배가 이리로 오는 것 같지 않아?”
중랑도 동정호 쪽을 보았다.
정말 작은 나룻배 한 척이 백륭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연화심이 벌떡 일어났다. 크고 둥근 눈에 돌연 생기가 넘친다.
“가자! 천무방 놈들만 따돌리면 돼.”
중랑이 초막 앞을 두른 울타리 쪽을 봤다.
울타리 바깥에는 천무방 무사 둘이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네 명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둘로 줄었다.
“더 생각할 것 없어.”
연화심이 짐과 검을 챙겨왔다.
무사들은 연화심과 중랑이 행장을 꾸려 나오자 경계하였다.
“어디를 가십니까?”
“당신들 공자가 천무방으로 가자고 하더군요. 내려가요.”
연화심이 태연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