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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은 연화심이 간 백륭사 쪽을 보다 다시 강가로 내려가는 길을 봤다.
며칠 내린 폭우로 불어난 강물이 거세게 흐른다.
하늘에 구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아침에 잠깐 나왔던 해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짙어가며 대낮인데도 어둠이 내렸다.
-툭!
빗방울 하나가 중랑의 검에 떨어졌다.
‘지겹게 내리는군.’
올 가을에는 왜 이리 비가 오는지 모르겠다. 검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하나둘 늘어났다.
한 식경쯤 지났을 때 소로를 달려오는 무리가 보였다.
비가리개를 쓴 젊은 청년이 앞장서고 뒤로 네 명이 따르고 있었다.
‘저놈이 구양운인가?’
중랑은 앞장선 청년을 노려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귀하게 자란 놈 같았다.
중랑은 연화심이 혼인동맹을 택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온몸을 값비싼 옷과 장신구로 치장했는데 어딘가 모르게 경박해 보였다.
구양운은 소로 한가운데 버티고 선 중랑을 보았다.
“고작 여기까지였더냐?”
제법 뛰어난 호위였다. 저놈 때문에 연화심을 번번이 놓치고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다.
구양운은 머리에 쓴 비가리개를 들추며 여유를 부렸다.
“흐흐. 주인에 대한 충성이 대단하군. 여기서 우리를 막아 보겠다?”
중랑은 말없이 검을 겨눴다.
“잡아!”
구양운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위 둘이 양쪽에서 짓쳐 들었다.
-쨍!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퍼졌다.
-쨍. 째쟁!
검과 검이 연달아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군.”
구양운이 중랑을 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직접 고르고 고른 호위를 둘이나 상대하면서도 중랑은 밀리지 않았다.
구양운은 중랑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연화심만 손에 넣으면 자신의 호위가 될 수도 있는 자다.
구양운이 자신의 양 옆에 남아 있는 호위에게 눈짓을 하며 일렀다.
“죽이지는 마라!”
남아 있던 호위 둘이 격전장에 뛰어들었다.
호위들은 중랑을 포위하고 합격진을 펼쳤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듯 공수가 엄밀하였다.
-까강.
검광이 번뜩였다.
구양운의 호위들은 묵묵히 검을 펼쳤고 중랑 역시 기합성조차 내지 않았다.
빗소리 사이로 검이 부딪히는 소리만 요란했다.
중랑은 시간이 갈수록 힘이 부쳤다.
비가 내리며 땅이 질척거렸다.
중랑이 왼발을 뒤로 빼며 좌우에서 짓쳐드는 호위들의 검을 쳐내는데 흙이 밀리며 미끄러졌다.
빈틈이 보이자 정면에서 선 호위의 검이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왔다.
동시에 중랑의 검에 튕겨 나간 좌우의 검이 되돌아 양어깨를 노리고 찍어 왔다.
‘뒤!’
중랑은 눈에 보이는 삼면의 공격보다 뒤에서 노리는 검이 더 신경 쓰였다.
움직임이 없다!
살을 베어 줘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중랑은 삼도문주 연성결을 만나기 전 낭인으로 떠돌았다.
사소취대.
낭인생활을 할 때 온갖 싸움에 뛰어들어 몸으로 익힌 경험이다.
중랑은 허리를 비틀어 옆구리를 찔러오는 검을 피하는 동시에 왼쪽에서 떨어지는 검을 어깨로 밀쳐냈다.
옆구리를 찌르려던 검은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중랑은 오른손에 든 검을 거꾸로 잡아 뒤로 힘껏 찔렀다.
“크윽!”
신음성이 터졌다.
소리 없이 뒤에서 다가오던 호위는 중랑의 옆구리 사이에서 솟아난 검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복부를 찔렸다.
호위는 재빨리 물러났으나 제대로 서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큭!’
동시에 중랑도 속으로 신음성을 터뜨렸다.
왼쪽 어깨에 검이 찍히는 순간 화끈한 고통이 일었다. 이어서 살이 갈라지는 통증이 다가왔다.
밀친다고 밀쳤는데 상대가 검을 비틀어 어깨뼈가 드러날 만큼 깊게 찍혔다.
호위들은 동료의 부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중랑의 가슴과 옆구리 그리고 허벅지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검풍이 먼저 쇄도하였다. 구양운의 명이 있었기에 치명적인 요혈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중랑은 그대로 뒤로 굴러 복부를 찌른 호위를 타고 넘었다.
휙!
대상을 잃은 세 자루의 검이 허공을 찔렀다.
‘지독한 놈!’
구양운은 중랑이 버틸수록 마음에 들었다.
호위들이 다시 달려드는데 중랑이 그대로 몸을 돌려 뛰었다.
왼쪽 어깨를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속 싸운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중랑은 갈래 길에서 잠시 멈칫하다 애초 생각과 달리 백륭사 쪽 길로 달려갔다.
“멈춰라!”
호위들이 뒤를 쫓으려 하자 구양운이 불러 세웠다.
“상세를 살펴봐라.”
구양운이 쓰러진 호위를 가리켰다.
호위들이 동료를 돌봤다.
“상처가 깊습니다만 목숨은 지장 없을 듯합니다.”
“다행이군. 그자의 검이 제법이었어. 자네 넷의 합공을 뚫다니. 삼도문에 검법의 고수가 있을 줄 몰랐다.”
구양운은 빗줄기 사이로 사라지는 중랑의 뒷모습을 보다 강 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살폈다.
‘머리를 썼다만 어림없다. 적당히 싸우다 몸을 빼서 엉뚱한 길로 우리를 유인하겠다는 수작이겠지.’
구양운은 갈래 길에서 순간적으로 강물을 보고 멈칫했던 중랑을 봤다.
중랑은 미끼고 연화심은 강 쪽으로 내려갔을 게 분명했다.
“이쪽이다.”
호위 하나가 말했다.
“이 길로 가면 강입니다. 강물이 불어 건널 수 없습니다.”
“그게 연화심이 노린 것이야. 불가능해 보이니 쫓지 않을 것이라 본 거지. 분명 잔도(棧道)가 있을 것이야.”
구양운이 자기 판단을 고집하였다.
중랑은 당초 연화심이 간 반대쪽인 강으로 도주할까 하다 포기했다.
당장이라도 넘칠 듯한 강물을 보니 자신이 유인한다 하더라도 적이 따라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적이 속지 않는다면 연화심의 뒤를 따르며 지형의 유리함에 기대어 적을 막는 게 나았다.
중랑이 잠시 망설였던 것이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구양운은 자신의 머리를 과신하였다.
“어찌 됐든 표식을 저쪽으로 남겨 놔. 설령 그리로 갔다 하더라도 응천대를 보내면 흔적을 밟을 수 있겠지.”
구양운이 강 쪽 길로 내려갔다.
호위가 표식을 백륭사 쪽으로 남기고 뒤를 따랐다.
***
빗줄기 사이로 백륭사 산문이 눈에 들어오자 연화심의 가슴이 뛰었다.
무한에서 악양까지 먼 거리는 아니다.
사방에 깔린 천무방의 감시를 피하는 게 관건이었다. 막판에 따라잡히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백륭사까지 왔다.
백륭사 산문은 한산했다.
연일 비가 오니 향화객의 발걸음도 끊겼다.
연화심은 절을 향해 달려가다 중간쯤에서 동정호가 보이는 언덕으로 향했다.
‘그때와 똑같다.’
흐린 하늘. 오락가락하는 비 그리고 드넓은 호수.
일 년 전 외가의 마지막 혈육 외숙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대신해 조문을 온 김에 악양 나들이를 하였다.
백륭사를 찾았다가 호숫가 언덕에서 그를 봤다.
그때 그는 정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신강삼랑이 찾아왔고 그들은 순식간에 죽었다.
‘그가 나를 봤을까?’
그가 쳐다봤을 때 재빨리 버드나무 뒤로 숨기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던 것 같다.
언덕을 내려와서도 내내 생각이 났다. 사람을 죽이는 걸 목격했으니 두렵기도 하면서 궁금하기도 했다.
연화심이 백륭사에 닿았을 때 퍼붓던 빗줄기가 그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나왔다.
‘낯설다!’
일 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기억과 눈앞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비스듬한 언덕이라고 생각했는데 가파른 절벽이었고 버드나무도 생각보다 굵지 않았다.
연화심은 버드나무에 몸을 숨기고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간절한 연화심의 시선 끝에 정자가 있다.
정자에는 아무도 없었다.
“훅.”
설렘이 사라지고 절망이 밀려왔다.
희망이 사라지며 어리석었다는 자책이 몰아치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연화심은 버드나무에 기대섰다.
생각해보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스치듯 한 번 본 사람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다니.
연화심은 그에게 부탁을 할 셈이었다. 그가 들어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혼자 상상하고 그 상상을 키워 희망으로 그리고 가능성이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고 여기까지 왔다.
‘이 바보….’
자책을 하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중랑은 지금도 적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무모한 희망을 품었던 대가로 자신과 중랑은 위험에 빠졌다.
중랑에게 미안했다.
죽을 결심을 하고 떠나온 길이지만 중랑의 목숨까지 달고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확인은 해야지.’
연화심은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백륭사 뒤편을 향해 달려갔다.
비스듬한 길을 올라가니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작은 모옥이 있었다.
“누구 없나요?”
연화심이 다가가 몇 번 불러보다 모옥 문을 밀쳤다.
-끼익.
문이 열리고 어두컴컴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모옥은 비어 있었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지만 사람이 거처하고 있는 느낌이 없다.
“….”
다시 한 번 맥이 빠진 연화심이 멍하니 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몸을 돌려 백륭사를 향해 다시 달려갔다.
극락보전 앞에 향화객들에게 향을 파는 동자승이 있었다. 찾는 이가 없으니 무료한 지 탁자에 엎드려 염주알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동자승은 연화심이 나타나자 벌떡 일어나 빤히 쳐다보았다.
“스님, 절 뒤 언덕 모옥에 살던 분 아시나요?”
동자승은 눈만 껌벅껌벅거리며 연화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스님?”
연화심이 재차 물었다.
동자승 얼굴에 수줍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강소군이라고 하는 분인데요?”
동자승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떠난 지 한참 됐어요.”
연화심은 다시 희망이 솟았다. 그를 아는 사람이 아직 있는 것이다.
“어디로 가셨죠?”
동자승은 호수를 가리켰다.
“호수로 갔다고요? 언제요.”
황급히 묻자 동자승은 고개만 도리도리 저을 뿐이다.
연화심은 다시금 절망에 빠졌다. 한편으로 오기도 솟았다.
‘아니야. 포기할 수 없어.’
큰 스님을 찾아 물어볼까 생각하는데 산문 쪽에서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쨍! 째쟁!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적이 쫓아온 게 분명했다.
연화심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을 깨물다 산문 쪽으로 달려갔다.
강소군의 행방도 중요하지만 중랑의 안위도 중요했다.
산문 앞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랑은 네 명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 주위로 이십여 명의 무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멈추세요!”
연화심은 산문을 넘으며 외쳤다.
중랑과 싸우던 적들이 한발 물러섰다.
중랑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반신까지 적셨다.
연화심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중랑이 적을 경계하며 연화심을 보았다. 무척 지친 얼굴이다.
연화심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친오라비처럼 자신을 돌봐주었던 중랑이다.
연화심이 부랴부랴 다가가 중랑의 어깨에 금창약을 뿌리고 천으로 묶어 주었다. 다행히 다른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중랑의 치료가 끝나자 방건이 나섰다.
“천무방 응천대 일조장 방건입니다. 연 아가씨를 모시러 왔습니다.”
방건은 포권을 하며 연화심을 살폈다.
남장한 모습을 얼핏 보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 보니 정말 미인이다.
‘호북일미라더니 정말 절색이군.’
연화심이 방건을 노려보았다.
“천무방에서 왜 나를 쫓는 건가요?”
“그 답은 삼공자께서 하실 것 같군요.”
“그대들 삼공자가 어디 있나요?”
방건은 어리둥절하였다.
표식을 따라오다가 중랑을 만나 쫓고 쫓기며 여기까지 왔다.
방건은 구양운이 강 쪽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몰랐다.
“저희를 따라가면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연화심은 방건과 무사들을 보았다. 무사들은 하나같이 안광이 형형하였다.
연화심이 무사들의 가슴에 쓰인 응천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응천대가 백전불패라더니 정말 기세가 당당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