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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방 삼공자 구양운은 모홍객잔의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모홍(慕紅)? 무슨 객잔 이름이 이래? 기루 아닌가?”
무복을 잘 차려입은 구양운은 준수한 용모와 관옥같이 흰 피부, 그리고 여인처럼 붉은 입술을 지녔다.
준수한 용모나 고급스러운 옷차림이 한눈에 봐도 예사 명문가의 자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객잔 맞습니다. 이곳 악양에서는 제법 이름난 객잔입니다.”
“그래? 연화심이 여기에 있다는 말이지?”
“예. 들어가는 걸 확인했고 밤새 감시하였습니다. 하늘로 솟아오르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고서야 여기 머물고 있을 겁니다.”
구양운이 묻자 뒤에 서 있던 무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무인은 다부진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을 지녔다.
“하하. 삼도문의 금지옥엽이 무슨 일로 악양까지 왔을까? 호북일미라는데 얼굴이나 볼까?”
“같이 있던 놈이 제법 검을 쓰는 자 같습니다. 저희가 가서 먼저 제압을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봐, 방건! 나를 뭘로 보는 겐가?”
방건이라 불린 무인은 천무방 응천대 일조장이다.
구양운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번거로우실까 봐 드린 말씀입니다.”
“미인을 얻으려면 번거로움을 감수해야지.”
구양운이 거들먹거리며 객잔으로 들어갔다. 호위 무사 넷이 따랐다.
방건이 손을 들자 천무방의 무사들이 길마다 매복하고 객잔의 지붕까지 올라섰다.
얼핏 보기에도 그 수가 서른은 되었다.
***
“원하는 게 뭔가?”
식사를 마치자 장무강이 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객잔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나요?”
장무강이 턱에 난 수북한 털을 매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바깥에서 감시하는 놈들을 떼어 달라는 뜻이로군.”
장무강도 객잔을 감시하는 이목이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역시 예사 숙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누군지 아는가?”
“아마도….”
연화심이 말꼬리를 흐렸다.
천무방은 천하사패의 일원으로 호북 일대의 패자다. 그리고 지금은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악양 또한 천무방의 세력이 미치는 곳이라고 봐야 한다.
장무강이 상대방의 정체를 알고도 자신을 도와줄지 의문이다.
“천무방 사람들이라는 건 나도 아네. 그들에게 쫓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
연화심이 잠시 주저하였다. 삼도문의 사정을 외인에게 털어놓는 게 꺼림칙했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천무방과 척을 질 수도 있는 일이네. 이유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입술만 깨물고 있던 연화심이 결심을 한 듯 장무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연화심이라고 합니다. 천무방은 삼도문에게 동맹을 강요하고 있지요.”
천무방은 주변의 작은 문파들을 병탄하거나 동맹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산하로 끌어들이고 있다.
삼도문에게도 달포 전 동맹을 요구하는 서안을 보내왔다.
“동맹 서안을 보내 놓고 은밀히 삼도문을 감시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삼도문을 나오자 따라온 것입니다.”
“단순히 삼도문을 나섰다는 이유로 따라왔다고?”
연화심이 잠시 주저하다 사실대로 말했다.
“동맹의 조건에 제 혼사도 들어 있습니다.”
“….”
장무강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삼도문주 연성결은 유연하면서도 꿋꿋한 외유내강형의 성품을 지녔다. 단순한 동맹이라고 해도 받아들일까 말까 한데 혼인동맹을 수락할 리 만무다.
연성결이 자신의 딸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장무강은 안다.
“연 문주에게 딸이 하나 있다더니 바로 자네로군.”
장무강의 말에 연화심은 내심 긴장하였다.
일 년 전 악양으로 떠날 때 아버지 연성결로부터 위험에 처하면 모홍객잔을 찾아 삼등을 걸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는지 등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몰래 나왔으니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다.
또한 장무강이 도와준다고 해도 무사히 객잔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악양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
연화심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잠시 망설이던 연화심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백륭사에 볼 일이 있어요.”
“백륭사?”
백륭사는 동정호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있다. 오래된 절인데 규모가 작아 찾는 이도 드물다.
“악양을 찾는 사람은 대개 악양루에 오르지. 백륭사를 찾는 이들은 많지 않은데?”
“반드시 가야 해요. 그 이유까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연화심이 이유를 밝히기 꺼려 하자 장무강은 더 묻지 않았다.
“백륭사는 서문 밖에 있지. 거리는 멀지 않네.”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객잔만 무사히 벗어나면 돼요.”
장 숙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좋아. 반 시진 후에 객잔 주방으로 오게.”
연화심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별원에서 나온 장무강이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평상시라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쉴 때인데 숙수들이 모두 주방에서 북적거린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장무강이 묻지 숙수 하나가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웬 귀공자가 갖가지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연회라도 벌일 판인가 봅니다.”
“귀공자?”
“호위를 넷이나 달고 있던데요.”
장무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천무방 졸개들만 몰려온 게 아닌 모양이다.
그때 점소이가 생선 요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달려왔다.
“뭐야?”
“생선이 너무 짜답니다. 다시 해 오랍니다.”
숙수 하나가 젓가락으로 생선 살을 뜯어 먹어보았다.
“괜찮은데?”
숙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다른 점소이가 또 탕 그릇을 들고 왔다.
“탕이 너무 싱겁답니다.”
숙수가 탕에 든 육수를 맛보았다.
“아닌데?”
그때 또 다른 점소이가 고기볶음을 가져왔다.
“고기가 너무 질기답니다.”
숙수들이 서로를 보았다. 분명히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시비를 거는 건가?”
숙수들이 투덜거리는데 마침 말린 전복요리가 완성됐다.
“내가 가져가지.”
장무강이 직접 전복요리를 가져갔다.
구양운 일행은 일 층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객잔 문을 오가는 사람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다.
“전복요리입니다.”
장무강이 전복요리를 내려놓았다.
구양운이 장무강을 흘깃 보고는 젓가락을 들어 전복을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바로 뱉었다.
“이게 뭐야? 전복이 아니라 나무토막 같군.”
장무강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군요. 저희 객잔의 솜씨가 공자의 미각을 맞추기에는 미흡한 듯합니다. 더 이상 음식을 올릴 수가 없겠군요. 주문하신 음식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장무강의 말에 구양운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하찮은 객잔 숙수가 감히 자신에게 나가 달라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잠시 칼자국이 난 장무강의 험악한 얼굴을 노려보던 구양운이 돌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법 거칠 게 살았던 모양이군. 기개를 높이 사지. 하지만 배상은 해야 할 거야. 이따위 음식으로 내 시간을 빼앗았으니 말야.”
“어떻게 배상을 해드려야 합니까?”
“객잔 주인 오라고 해.”
“제가 주인입니다.”
시종일관 담담한 장무강의 태도에 구양운이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구양운이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뒤로 기대며 장무강을 보았다. 얼굴에는 오만함이 가득했다.
“그래? 긴말 않겠다. 간밤에 남녀가 들어왔을 것이다. 이리 나오라고 전해.”
그런데 장무강은 움직이지 않았다.
“용건이 따로 있으셨나 보군요. 손님들 간의 문제는 직접 해결하셔야 합니다. 객잔에서 손님을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지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
구양운은 짜증이 났다. 천무방 삼공자의 말에 또박또박 대꾸하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그래도 돼. 좋게 말할 때 데려오지?”
구양운이 목을 양쪽으로 한 번씩 우두둑, 꺾으며 말했다. 그가 손을 쓰기 전에 하는 버릇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천수무흔이 직접 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장무강은 여전히 정중하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장무강의 입에서 천수무흔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구양운은 물론 호위들까지 기세가 달라졌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칼날 같은 예리한 기운이 장무강을 향해 꽂혔다.
이윽고 구양운이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건들거렸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평범한 숙수가 아니로군? 내가 천무방에서 온 것을 알고도 이렇게 나와? 게다가….”
구양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당금 무림에서 천무방주 천수무흔 구연강을 무시할 자가 있을까? 일개 숙수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사실 자체가 치욕이다. 그런데 하물며 무시를 해?
구양운의 얼굴에 살심이 어렸다.
구양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자 뒤에 있던 호위가 검을 내밀었다.
구양운이 검자루를 쥐고 뽑았다.
-스르릉.
검이 뽑히며 날카로운 예기를 뿜었다.
손님 몇몇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슬그머니 반점을 빠져나갔다.
구양운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장무강의 어깨에 놓였다. 그대로 그으면 목이 달아날 것이다.
“네가 죽고 싶은 것이냐?”
장무강은 어깨에 놓인 검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천무방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더니 과연 그런 모양이군. 악양 한복판에서 대낮에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장무강이 목에 칼이 들어온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꾸하자 구양운은 내심 놀랐다.
‘이 자식이? 고수란 말인가?’
담담하게 자신을 보는 장무강의 눈빛에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쪽은 수가 많다.
천무방의 선봉이라는 응천대 중에 삼 개 조 서른 명을 데려왔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셋을 세겠다.”
구양운이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검을 장무강의 목덜미에 댔다. 날카로운 검날이 스치자 살짝 피가 흘렀다.
“하나!”
구양운이 하나를 세는데 장무강이 피식, 웃었다.
“웃어?”
“셋을 세고 나서 누구 목이 떨어질까 궁금하군.”
장무강의 손이 허리춤에 꽂은 주방칼에 닿았다.
-챙!
구양운의 호위들도 검을 뽑았다.
“건방진….”
구양운이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장무강의 전신에서 살기가 솟더니 구양운과 호위들을 덮쳤다.
폭발적인 살기에 구양운은 뱀을 마주한 개구리처럼 굳어 버렸다.
검을 목에 댄 사람은 자신인데 자신의 목이 서늘하였다.
“너, 너는 누구지?”
구양운이 당황하여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렇게 묻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
구양운의 호위들은 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장무강을 향해 검을 겨눴다.
“내게 검을 겨눈 자들도 모두 죽었다.”
호위들의 검끝이 떨렸다.
“…!”
구양운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검을 긋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면 자신의 목이 잘릴 것 같았다.
“셋까지 셀 뜻이 없는 모양이군.”
장무강이 살기를 거두고 목에 닿은 검을 슬며시 밀어 내렸다.
“….”
구양운은 믿을 수 없었다.
살기만으로 자신을 제압하는 자가 객잔 숙수로 있을 줄은 몰랐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손님이 나가야지.”
장무강이 길을 비켰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잠시 장무강을 노려보던 구양운이 걸음을 옮겨 객잔을 나갔다.
“장 대형, 괜찮으십니까?”
숙수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살기를 느끼지 못했으니 갑작스레 구양운이 물러난 이유를 몰랐다.
장무강이 숙수와 점소이들이게 말했다.
“문을 닫아라.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는다. 이왕 든 손님들도 양해를 구하고 다른 객잔으로 보내라.”
장무강의 말이 떨어지자 점소이들이 부리나케 문을 걸어 닫았다.
잠시 후 숙수와 하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객잔에서 상주하는 숙수와 점소이 몇 명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