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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수면에 떨어진 빗방울이 방울방울 동그라미를 그리며 퍼져 나간다.
바다처럼 넓은 동정호. 언덕 위 누각에 앉아 비 내리는 호수를 보던 사내가 술잔을 들었다. 이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다.
사내가 천천히 술을 마시는데 싸늘한 한기가 밀려들었다.
“네가 강소군이란 녀석이냐?”
음산한 목소리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누각 아래 죽립을 쓴 세 사람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강소군은 듣지 못한 듯 술잔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라더니 맞는 모양이군.”
“이런 애송이를 쫓아 만 리가 넘는 길을 오다니. 신강삼랑이라는 이름이 아깝소.”
“빨리 해치우고 가자고.”
세 사람이 한마디씩 하더니 땅을 박차고 누각으로 날아들었다. 꽤나 거칠고 험악한 기세였다.
그러나.
-퍽. 퍼퍽!
세 사람은 누각을 밟지도 못하고 튕겨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박차고 올랐던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크윽.”
한 사람이 몸을 뒤척이며 신음을 내뱉다가 머리를 떨궜다. 다른 두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헉!’
누각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언덕 절벽 쪽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강소군이 흘깃 절벽 쪽을 보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눈빛이 약간 붉다.
절벽 나무 사이에 선 눈의 주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강소군의 시선이 크고 맑은 눈과 마주쳤다.
“….”
잠시 후 강소군이 시선을 돌리더니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빗방울이 점차 거세진다. 호수에도 신강삼랑의 시신에도 비가 내렸다.
***
1년 후.
하늘이 무너진 듯 비가 내렸다. 악양으로 들어가는 관도는 진흙탕이 되어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논밭인지 모를 정도였다.
일 장 앞을 내다보기 힘든 빗줄기를 뚫고 두 필의 말이 달려왔다. 흙탕물을 튀기며 달리는 말의 숨소리가 무척이나 거칠다.
“잠시 쉬어야겠어. 말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앞선 사람이 말고삐를 채어 멈췄다.
널따란 죽립에 우의를 입은 젊은 사내였다. 희고 갸름한 얼굴과 둥글고 선명한 눈, 도톰한 입술이 남장여인임을 짐작케 한다.
뒤따르던 남자도 말을 멈췄다. 역시 죽립에 우의를 입은 남자다. 스물 조금 넘어 보였는데 턱선이 선명하고 눈매가 날카롭다.
두 사람은 말에 탄 채로 잠시 쉬었다.
빗줄기가 잦아들며 시야가 트였다. 관도 오른쪽으로는 끝이 없는 들판인데 흙탕물로 덮여 마치 바다처럼 보였다.
왼편으로는 습지가 이어지고 끝 무렵 저 멀리 강이 보였다. 노한 용이 몸을 뒤채기라도 하는 듯 강물이 거칠게 흘렀다.
“이러다 강둑이 무너질 것 같아. 여름도 다 갔는데 이렇게 큰비가 오다니.”
남장여인이 넘칠 듯 한껏 부풀어 오른 장강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동행한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중랑,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중랑이라 불린 사내는 뒤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 반 시진만 더 가면 될 것 같군요.”
흐린 날이라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다.
남장여인도 중랑의 시선을 따라 자신들이 온 길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지는 데다 비까지 내리니 시야가 멀리 뻗지를 못한다.
‘과민한 것일까?’
쫓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본능이 경고를 하고 있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불안함은 결코 과민함 때문이 아니다.
중랑은 자신의 본능을 믿는 사람이었다.
“천무방은 아닐 게야.”
남장여인이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 중얼거렸다.
삼도문을 나온 지 나흘째.
한밤중에 빠져나온 뒤 길을 빙 돌아 왔다. 천무방의 감시를 따돌리고자 은밀하게 움직였건만 자신할 수 없었다.
중랑이 남장여인을 보았다.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저 주의를 하는 것뿐입니다.”
중랑은 안심을 시키고자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착잡했다.
남장여인은 삼도문의 금지옥엽 연화심이다.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은 삼도문주를 볼 면목이 없다. 아니, 그전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중랑,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어쩌면 이 수야말로 천무방의 야욕에서 삼도문을 지킬 유일한 희망일지도 몰라.”
중랑이 연화심을 보았다.
이제 열여덟.
문중에서 애지중지 자란 꽃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
연화심이 느닷없이 악양으로 가야 한다고 했을 때 중랑은 만류하였다. 하지만 연화심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따라나서야 했다.
삼도문주 연성결이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그를 탓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중랑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다.
살아서 돌아가는 게 목전의 과제였다.
연성결의 문책보다 연화심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짓누르고 있다.
‘내 예감이 틀리기만 바랄 뿐이다.’
중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뒤를 살폈다.
“후우! 가자고.”
연화심이 답답하다는 듯 크게 숨을 물아쉬더니 말고삐를 채었다. 말은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더니 앞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 깊게 파인 말발굽 자국이 이내 흙탕물에 쓸려 사라진다.
그 위로 어둠이 서서히 내렸다.
***
이슥한 밤 두 사람은 악양에 들어섰다. 비는 그쳤으나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천하에서 유람객이 찾아오는 악양의 밤은 늘 화려했건만 오늘만큼은 적적하기 그지없다.
대로 양편에 걸린 등만 비바람에 흔들거릴 뿐이다.
두 사람은 말을 몰아 주루와 객잔들이 몰려 있는 거리로 들어섰다.
기루와 주루, 객잔마다 화려한 외등을 내걸었다. 안에서 왁자지껄 한 웃음과 주향이 흘러나왔다.
오가는 이 없는 길은 도랑이 넘쳐 물길이나 다름없었다.
-처벅! 처벅!
두 사람은 말의 발목까지 차는 물길을 거슬러 천천히 골목을 지났다.
길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연화심이 말을 세웠다.
모홍객잔.
일 층과 이 층은 주루인 듯 환한 불빛과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삼 층이 객실인 듯한데 창문 대부분이 닫혀 있었다.
“어서 오십쇼! 빗길에 오시느라 고생하셨지요? 말은 이리 주시고 어서 들어가시지요.”
열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점소이가 튀어나와 말고삐를 잡았다.
두 사람이 문으로 들어서자 다른 점소이가 달려왔다.
“어서 오십쇼. 마침 객방이 딱 하나 남았습니다.”
점소이가 두 사람을 빠르게 훑어보며 수다를 떨었다.
“방이 둘 필요한데?”
중랑이 죽립과 우의를 벗어 탈탈 털며 말했다.
연화심은 반점을 둘러보았다. 꽤 너른 반점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폭우로 발이 묶인 사람들이다.
점소이가 난색을 표했다.
“후원 별채는 객방이 둘이긴 합니다만… 좀 비싸서요.”
“거기로 주게.”
연화심이 은자를 꺼내 점소이에게 건넸다. 점소이가 재빨리 은자를 받아들고 굽실거렸다.
“따라오시죠.”
점소이가 후원 별채로 안내하였다.
‘응! 이 사람이 남자인가 여자인가?’
별채로 저녁을 가져온 점소이는 남장한 연화심을 보고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연화심은 남장을 했음에도 대번 눈길을 끄는 미인이었다.
“무슨 일인가?”
점소이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중랑이 들어서며 묻는데 시선이 날카롭다.
“더 필요하신 것 없으십니까?”
점소이가 중랑의 등 뒤로 삐죽 튀어나온 검자루를 보고 연신 굽실거렸다.
연화심이 점소이에게 말했다.
“문 앞에 등을 세 채 걸어 달라고 주인에게 말해 줄 수 있겠나?”
“등이요? 왜 등을 셋이나?”
점소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화심을 보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죠. 어둡긴 어둡죠? 네.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점소이가 나갔다.
“이목을 끌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등을 셋이나 달아 달라는 연화심의 주문이 이해가 가지 않는 중랑이었다.
“아버지에게 들은 게 있어. 모홍객잔을 찾아 등을 셋 달면 누군가 찾아온다고 했거든.”
중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심이 모홍객잔을 고집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중랑이 창밖을 살폈다.
“만만치 않은 놈들입니다.”
중랑의 표정이 무겁다.
연화심이 아미를 찌푸렸다. 중랑은 잠시 바깥을 살펴보고 오겠다고 나갔었다. 표정을 보니 묻지 않아도 쫓는 자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천무방?”
“당장 움직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단 식사를 하시죠. 긴 밤이 될 것 같습니다.”
급하게 오느라 점심마저 걸렀다. 싸우든 도망치든 제대로 먹어야 한다.
중랑은 천무방이 객잔을 에워싸고 있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안다면 연화심은 걱정 때문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것이다.
“미안해. 나 때문에.”
연화심은 진심이었다.
“그 말씀은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러는 이유가 있겠죠.”
“한 사람을 찾아야 해. 그 사람이 삼도문을 도와주기만 한다면….”
연화심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가 누구입니까?”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
사실 연화심 스스로도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중랑은 더 묻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객잔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느라 터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적은 들이닥치지 않았다.
연화심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시 눈을 붙였다.
잠에서 깨니 날이 훤히 밝았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점소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손님! 아침 준비를 할까요?”
“가져와라.”
중랑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화심이 거실로 나갔다. 중랑은 한숨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 찾아온 사람 없었어?”
중랑이 고개를 저었다. 연화심이 초조한 듯 거실을 거닐었다.
잠시 후.
바깥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누구냐?”
중랑이 검자루에 손을 대며 물었다.
“아침 가져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점소이가 들어왔다.
“헤헤. 잘 주무셨어요? 아침 식사 가져왔습니다.”
중랑의 시선은 점소이 뒤를 따라 커다란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꽂혔다.
마흔은 넘어 보였는데 육척 장신의 거한이었다. 짧고 굵은 수염이 무성한데 오른쪽 이마에서 눈까지 길게 흉터가 나 있다.
언뜻 보기에도 무척 험상궂은 인상이었다.
거한은 어울리지 않게 앞치마를 둘렀는데 커다란 탕그릇이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별채 손님을 위해 장 숙수께서 별식을 조리하였는데 직접 가져오셨답니다. 장 숙수님이 자랑하는 닭고기 죽입니다.”
점소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장 숙수의 허리춤에 꽂힌 커다란 식도를 본 중랑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중랑의 손은 어느새 검자루에 닿았다.
장 숙수는 그런 중랑을 흘깃 보고는 점소이에게 말했다.
“너는 가 봐라.”
장 숙수는 점소이를 돌려보내고 들고 온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누가 삼등(三燈)을 걸어 달라고 했나?”
무척 굵은 음성이었는데 단순한 객잔 숙수의 말투가 아니었다.
“삼등지약(三燈之約)을 아십니까?”
연화심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장 숙수가 연화심을 훑어보았다.
“어디서 온 누구냐?”
“우리가 누군지 밝히기 전에 삼등지약이 유효한지 묻고 싶군요.”
장 숙수가 연화심과 중랑을 번갈아 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장 숙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등지약은 오로지 한 사람만 알고 있다. 그 사람의 신물이 있다면 가능하다.”
연화심이 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칼자루에는 삼도(三刀)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삼도문을 잊지 않았습니까?”
“연 문주를 잊지 않았다고 해 두지.”
장 숙수가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어 탕 그릇을 열었다.
“나는 장무강이라고 한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식사부터 하자고. 나도 식전이라 배가 고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