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마지막 사상四象 (2)
다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게 일찍 이야기 나왔듯 무인으로서 취할 수 있는 직업은 군·관부에 몸담거나 향용의 무사가 되는 것, 혹은 무도관을 차리거나 지주 및 토호의 가신이 되는 정도가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현재 입지를 보면 어느 것이든 맞지 않았다. 오 년 동안 악충보에서 기반을 닦았고, 실력을 인정받아 탄탄대로에 들어서지 않았는가.
더 윗길은 자신의 방파를 세우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당장은 불가능했고, 나머지는 뭐건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혼인까지 해 안정을 꾀해야 할 시기인데 떠난다고 하니 적잖은 의문이 치솟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을 삼갔다.
“지금은 말씀 올리기 어렵습니다. 계획이 있지만 될지 모를 일이라서요. 시도해 본 후 연락 올리겠습니다.”
“파격적으로 입문을 받아 줬는데 말이지……!”
유원헌 등은 퉁퉁 볼이 부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잡고 싶었지만 악불비의 이야기도 있었고,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출발.
“소저, 행복하십시오!”
“너무 감사했습니다!”
“오! 오! 오!”
마침내 마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장완옥이 무예를 모르므로 악벽강과 함께 사두마차 안에 탔고 송민이 마부석에 앉았다.마차가 움직이자 배웅 나온 무사들은 저마다 소리쳐 악벽강의 행복을 빌었고,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목이 터져라 연호성을 토했다.
알려져 있듯 그들에게 악벽강은 각별한 존재였다. 사랑스러운 주인의 딸이자 멋진 상관이었으며 더러는 호랑이같이 엄한 상관이기도 했다.
천하에 많은 향용 방파가 있고 어디나 사랑스러운 처녀들이 있지만 악벽강처럼 부하들과 고락을 함께한 처녀는 거의 없을 것이었다.
갖은 궂은일과 위험에 앞장섰고, 서른이 넘도록 서류를 뒤적이다 혼인해 떠나는 처녀.
과연 천하를 다 뒤져야 몇이나 될까.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악벽강은 마차 밖으로 나오거나 그들을 보지 않았다.
그녀 역시 가슴이 시린 것이었다. 그냥도 집을 떠나는 처녀들의 마음은 시릴 수밖에 없었는데, 악벽강의 경우야 오죽하겠는가.
장완옥과 함께 마차 안에 앉아 부하들의 외침과 연호 소리를 들으며 또 눈물을 흘렸다.
누구보다 성격이 강한 그녀였지만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마음 아픈 게로구나. 네게는 특히 더 많은 추억과 정이 담긴 집이고 부하들이겠지만, 그러나 이젠 새로운 삶을 일구어 가야 한다. 그것이 여자의 일생이니까. 전날 개봉을 떠날 때 나도 많이 울었지. 힘내거라.”
장완옥은 이런 악벽강을 이해했다.
“고마워요, 어머니.”
마음이 시려 자꾸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악벽강을 다독였다.
마차 앞에는 추룡과 전소, 임백호, 곽영이 앞장서 움직였고, 뒤에 막여사와 임대백, 백여 명의 달의 무사들이 움직였다.
대부분의 무사들은 하루 앞서 능설운을 호위해 황석으로 떠났고, 임대백, 임백호는 추룡, 막여사와 함께 나선 것이었다.
악벽강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말 간다고 생각하자 추룡 역시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남평을 출발해 어느새 육 년이 되어 가는 시점, 역시 너무 정이 들었던 것이다.
“…….”
입을 다문 채 다들 묵묵히 길을 재촉했다.
변함없이 씩씩한 것은 적낭자뿐이었다. 적낭자도 이젠 나이가 들었다. 열 살배기로서 굵은 골격에 더 늘씬하고 멋진 준마가 되어 좋다는 듯 흥흥, 갈기를 휘날리며 발굽을 옮겼다.
장강 싸움에 나서면서 재갈을 물렸지만 어느새 또 풀어 놓은 상태였다.
짠한 마음으로 이동하기를 한참, 연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지역에 도착했을 즈음에야 임백호가 쩝쩝, 입맛을 다시며 말문을 열었다.
“거참, 알 수 없단 말이야. 성격이라면 나도 어지간히 강한 편인데, 어찌 된 일인지 휘주는 왔다 하면 가기 싫고, 갈 때마다 허전하니…… 처음에 떠날 땐 정말 장난이 아니었네. 가슴이 찢어지듯 한 것이, 황석에 가서도 내내 잊을 수가 없었지. 자네들과 악충보, 황산 등이 꿈에서까지 막 나타나는 거야.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리면서 죽어라 수련만 했는데, 또 허전함이 시작되는군.”
전소가 미소 지었다.
“멋진 곳이잖나. 자랑 같지만 황산을 본 사람은 죽기까지 잊지 않는다고 해. 쏟았던 비지땀만큼 악충보에 정도 들었고. 고향이라 쥐 방구리 드나들듯 할 것이지만 우리까지 마음이 허전하군.”
장엄한 둔계, 연화봉, 십왕봉, 서해 대협곡, 굉촌이 있는 곳.
“인심도 최고지.”
하루하루 지내온 날들을 생각하며 임백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한데 자네들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계획이 대체 뭔가? 왜 쉬쉬하며 흉물을 떠는 거지?”
“별건 아닌데…….”
곽영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사실은 무과를 치르려 가는 것일세.”
“무과?”
임백호는 물론 추룡까지 멈칫하는 기색을 떠올렸다.
“지금 무과라고 한 것인가?”
“어, 시작은 어떻게든 악충보의 무사가 되어 지역을 지키는 게 꿈이었지. 향용으로서 이름을 떨쳐 보겠다는 정도. 간부가 되겠다는 꿈조차 지니지 못했어. 어리기도 했고, 실력도 없었으니까.”
약관의 나이에 만난 그들. 다시 돌이켜 봐도 다들 잘 웃고 소년스러운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다들 스물대여섯, 치기를 벗어나 어엿한 장부다.
“내전 기간을 보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네. 향용도 보람되고 훌륭한 일이지만 지역을 지나 좀 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장성을 본 후로 특히 그런 생각을 했는데, 전투를 치르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네. 우리가 아니라도 휘주에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군부로 가야겠다고 말일세.”
추룡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일 차 목적지는 항주일세. 막 형이 배를 타는 것을 본 후 개봉으로 갈 거야. 대리사의 무관 시험을 보려 하네. 이것도 막 형이 심어 준 생각이지. 막 형이 우리 눈을 열어 줬네.”
뜻밖의 이야기였다.
“햐!”
임백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끔벅거렸다.
“어쩐지 필사적으로 수련한다 했더니……. 송 형은 관인이기를 거부했잖나? 뜻밖인데?”
처음 추룡을 만났을 때부터 권문세족들과 정쟁이 싫어 향용이 되겠다고 한 송민!
마부석에 앉은 송민을 돌아보며 곽영이 미소 지었다.
“우리도 뜻밖이긴 마찬가지지만. 장성에 갔을 때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 파계승 보러 절에 가느냐는 말이 가슴을 찔렀던가 본데, 주탁 장군에게 완전히 감격한 것 같아. 앉아서까지 장성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꾼 것 같더군.”
이해했다는 듯 임백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진짜 영웅이지. 보는 순간 나도 가슴이 뭉클했네. 참 대단한 분이셔. 그러기가 실로 쉽지 않은데.”
‘몸이 부자유할 뿐 마음까지 부자유하지 않다.’ 하던 주탁의 말이 절로 떠올랐다.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전소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 형은? 역시 군부로 갈 생각인가?”
친구들의 새로운 포부는 이해했지만 전소는 역시 불안하다. 미달인 체격 조건이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소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그러려고. 잘될지 모르지만 기회가 좋아. 원래부터 난 관인이 되고 싶었는데 체격 때문에 주저앉았지. 하지만 내전이 기회를 제공했네. 지금은 어디나 사람이 부족하거든. 이 년에 한 번 치르던 과시 제도까지 불문한 채 계속 시험을 보고, 어지간하면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일세. 정 뭣하면 문관 시험이라도 보면 되겠지.”
“문관?”
곽영이 다시 웃었다.
“같이 자라다시피 했지만 전소는 정말 대단해. 막 형도 노력파지만 거의 같은 수준이 될 거야. 원래도 그랬지만 지난 삼 년 동안 십왕봉에서 죽어라 주경야독했네. 피신해 오는 사람들을 구하면서도 틈날 때마다 무예를 수련하고, 밤마다 죽어라 글을 팠어. 코피 쏟는 것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네. 하루 두 시진이나 잤으려나?”
“컹!”
변함없이 대단함을 보여 주는 친구였다.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만…… 정말 막 형이나 자넨 못 말리는 뭔가가 있어. 둘 다 괴물이라니까!”
전소는 별거냐는 듯 미소 지었다.
“막 형이야 뭐, 진짜 괴물이고, 난 그밖에 방법이 없거든. 워낙 체격이 이래서. 무예로 대성하기 어렵다는 것도 알아. 열심히 했지만 갈수록 차이를 느끼겠던데, 당장만 봐도 자네들은 대장검을 찼잖나. 난 넉 자 이상은 뽑을 수도 없거든. 같은 노력, 같은 실력으로는 무조건 밀리는 거야. 그러니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고, 해도 극복되지 않는 부분은 어쩔 수 없으니,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지.”
키가 작아도 체격을 능가하는 기인들이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 촌이 길면 일 촌만큼 강하다는 말이 있는 게 무예인 만큼 같은 재능, 같은 노력이라면 체격의 열세는 무인에게 분명히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자신을 알고 주위를 인정하는 게 이 친구의 강점으로서 그것이 그를 계속 거인으로 키워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임백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예로도 누구에게건 쉽게 패하지 않을 것인데 기대되는군. 뜻을 이루면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천하의 재사가 되는 건가? 전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이번에 세운 도하 작전만 봐도 군사軍師로 혁혁한 명성을 떨칠 거야.”
“혼자 세운 계획도 아닌데 뭘.”
힐끗 추룡을 보며 전소는 다시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출사는 둘째, 그의 일 차 목적은 추룡인 듯해 보였다. 아니, 친구들 모두의 표적인 느낌이었다.
“……!”
뿌리치기 위해 더 보태 주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던가.
추룡은 내내 말이 없었다. 휘주를 떠나는 서운함을 지나 골몰히, 다른 어떤 생각에 잠긴 듯했다.
“막 형, 다시 보세!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도전할 거야. 기대하게!”
오래잖아 임백호와는 또 작별하게 되었다.
아쉽기 한량없었지만 호북성은 안휘성의 좌측에 있었고, 항주는 우측, 오십 리 밖에서 길이 갈라진 것이었다.
“기다리겠네. 연락할게.”
“어, 수시로. 시간 나는 대로 황석에 놀러 와. 조만간 나도 남평에 한번 갈 테니까.”
변함없이 가슴이 짠했지만 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있고, 도움 요청 하나에 병력까지 몰아 달려와 준 친구가 아닌가.
“하-!”
두두두두두두.
손을 꾹, 마주 잡으며 임백호는 태양같이 밝게 웃어 보인 후 임대백, 달의 무사들과 함께 아득히 멀어져 갔다.
끝이 없는 우정.
최고의 친구였다.
묘족 중에 가장 수효가 적은 홍묘가 그들의 중심이 된 것은 이런 의리와 기백들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지.
“어이쿠,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공자님! 그간 평안하셨던지요?”
“오랜만입니다. 내전 잘 넘기신 것 같군요.”
“핫핫…… 옥황산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포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들이닥치는데! 싸워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겠고, 돌아온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항주에 일행이 도착한 것은 칠 일 후였다.
가을을 맞이한 서호는 봄, 여름과 또 다른 향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추색으로 물은 깊이 가라앉았고, 주위의 산들이 타는 듯 화려하다.
추룡은 잊지 않고 다시 금화린金華麟을 찾았다.
처음 항주에 도착했을 때 적낭자를 맡겼던 객잔.
북부에서 벌어졌던 내전이라 항주는 변함없이 수려한 그대로였고 친절했던 점원도 그대로 있었다.
“피신해 계셨다니 고생 많았겠군요.”
“핫핫! 다들 한 고생인걸요. 좋은 일도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피신 못한 사람들이 다들 끌려가고 죽고 해서 지배인이 되었습니다. 말은 잘 있나요? 밖입니까?”
전에는 바깥에서 손님을 맞이했던 그가 지금은 주루 안에 있었고, 지배인이 된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다른 분이 맞이해 주시더군요. 구유로 데려갔을 것입니다. 좋은 여물을 부탁합니다.”
“핫핫…… 가 봐야겠군요. 직접 돌보겠습니다.”
막여사, 장완옥, 악벽강 등 모두가 있었지만 상업적인 인사뿐, 전과 똑같이 추룡과만 대화한 후 휙, 적낭자를 찾아 나갔다.
중원인들의 기본 기질이었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지만 이들은 한번 호감을 가져 친분을 맺으면 사소한 관계일지라도 평생토록 지속된다.
반대로 한번 감정이 틀어지면 또한 평생토록 그만큼의 원수가 된다.
인과를 중히 생각하는 대륙성 기질이었다.
객실을 정하고 나서는 다 함께 악묘로 향했다.
진충보국, 환아하산.
내전 끝이라 전처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악묘 역시 그대로 있었다.
악비는 죽어 상像이 되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듯 그대로 위용 있게 충렬전에 서 있었고, 진회 역시 사람들의 가래침을 맞으며 꿇어 있었다.
친구들의 인연이 시작된 곳.
다시 생각해도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남평을 나와 항주에 첫발을 디디며 제일 먼저 찾아와 분향했던 곳으로, 추룡은 당시 여기에서 금의 대군을 휘몰아치는 악비를 생각하며 나라와 백성들을 위할 수 있도록 갈 바를 정해 달라고 마음으로 기원했었다.
직후 여기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다시 악벽강을 만났으며 악충보로 가게 되는 등 북원과도 싸우게 되었다. 나아가 이젠 일가까지 된 상태다.
“정말 기연이야. 우리가 만난 곳도 여기인데, 막 형은 소저와 혼인해 악가의 사위까지 되었으니. 전생에 뭔가 있었나 봐.”
분향하고 돌아오며 친구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이 겪은 일이라도 묘하다 싶은 것이었다.
저물녘.
추룡에게 또 고민이 생겼다.
정확히 악충보를 나서면서부터 생긴 것이라 봐야 했다.
이 일로 오면서 내내 입을 다문 채 골몰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러나 답을 얻을 수 없었고 악묘에 다녀오면서 수심이 더 깊어졌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막여사를 찾았다.
“저…… 아버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막여사의 앞에서는 늘 어려지는 그.
악묘에 들른 후 막여사는 장완옥과 서호를 둘러보고 어둑해서야 돌아왔는데, 잔뜩 우물쭈물 말을 더듬는 추룡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이냐? 줄곧 생각하는 모습을 하고 있더니, 고민이라도 생긴 것이냐?”
추룡은 조심스럽게 장완옥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딱히 그렇진 않사온데 드리지 못한 말씀도 있고 해서…….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한번 부족함을 느낀 사람은 죽기까지 부족함을 느껴 떠나면 나오기 어려우니 채울 욕심 부리지 말고 부족한 것이라도 세상에 나눠 주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