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습무사-145화 (145/150)

# 145

새로운 시작 (4)

“명료하면서도 공순한 글이나이다. 보필의 뜻을 지닌 것 같기도 한. 하나 실제로는 경고의 뜻이 감춰져 있나이다.”

주체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피식, 곧 다시 실소를 머금었다.

“거 괘씸하군! 그가 감히 짐을 견제하겠다는 말인가?”

도연 역시 쓴웃음을 머금었다.

“견제라기보다 선정을 기대하는 것이나이다. 하나 이런 글을 남길 정도로 섬서의 군벌이 막강하다는 뜻이기도 하온데, 실제 군도산의 전투로 섬서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나이다. 이 힘을 먼저 흡수하셔야 하나이다. 참전한 전원에게 세금 감면과 포상을 내리시고, 전사자의 가족들을 살피소서. 또한 이순문을 귀주포정사사로 임명하시고 그곳에 영지를 내려 묶어 두소서.”

“오군도독이었던 자 말인가? 내내 북평을 누르고 기습까지 계획했던 것으로 아는데 처벌이 아니라 오히려 중용?”

도연은 계속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그의 임무였으니 헤아리셔야 하나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막 장군의 벗으로서 암중에 그를 도우며 큰일을 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나이다. 결과로 난관이었던 장강을 쉽게 넘은 것이기도 하온데, 아뢴 대로 귀주로 보내 안남 및 남부를 감시하게 하면 큰 효과를 거둘 것이나이다. 북평을 괴롭힌 만큼 그런 방면으로는 능력이 있는 인물이고, 영지까지 있다면 소임을 다할 것이옵니다.”

“너무 잘할 것 같지만 거 좀 기분이 그렇군.”

주체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코뚜레를 채우자는 것이렷다?”

도연은 히죽이 웃었다.

“그렇나이다. 그리고 석 안찰사는 중부로 불러들여 정주를 맡기소서. 그리하면 형주의 조해흥과 공조하여 중부도 안정될 것이나이다. 그렇게 하여 중부와 남부를 제압하고, 연안, 대동 등 섬서, 산서의 군부를 취하시면 모양새도 좋고 큰 득이 될 것이나이다.”

주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들이 사인방이라 들었다. 그러면 막여사와 녀석은?”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막 장군은 잡을 수 없는 인물이나이다. 오래전에 조정을 떠나 세상의 먼지가 된 인물이오니. 바람과 함께 지낼 인물이나이다.”

“거, 먼지 한번 심하게 크군!”

주체가 웃는 속에 도연은 계속 일렀다.

“격변의 시대가 될 것이지만 사상의 시대도 함께 열 수 있을 것이나이다. 운명이 그러하니 폐하께서는 장황將皇으로서 업을 다하시되, 치정은 세자 저하께 맡기소서. 옹이가 없는 성품으로 백성들을 편하게 할 것이며, 그것으로 그 또한 움직일 것이나이다. 세손 저하께서는 마 태감을 늘 제독이라 하셨는데, 선견지명이나이다. 개명改名하여 정화鄭和의 이름을 하사하시고, 수군 제독으로 등용하셔서 함대와 외교를 맡기소서. 마침내 그가 날개를 펴 중원의 부를 이룰 것이나이다.”

마삼보, 정화!

내전에는 특별히 나서지 않았으나 영락 시대에 있어 그의 활동은 세계에 명성을 떨칠 정도로 대단했다.

알려진 대로 운남 곤명의 귀족 출신, 회교를 신봉하는 무슬림가家의 아들로서 집안이 원나라에 협력했던 관계로 홍무제에 의해 몰락하고 사로잡혀 거세가 되어 환관이 되었으나, 마침내 주체를 섬겨 귀히 등용된다.

주체와 조정이 격돌한 정난의 난을 거쳐 이름을 개명한 후 수군 제독이 된 그는 직접 구축한, 길이 사십사 장(140미터)의 엄청난 전함과 일천 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동왜를 누르는 한편,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반도 및 아프리카까지 원정하여 각국과 친선을 도모하는 등 조공까지 받는 엄청난 일을 해치웠다.

유럽보다 칠십 년이 앞선 대항해의 시작으로 이날이 바로 그 *전설의 시작(*가장 유명한 건물이 무당산 천주봉 꼭대기의 금전金殿이다.동銅으로 만들어진 전각으로서 지금도 남아 있는 명 대 건축물의 걸작들이다.)이었다.

주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니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려라! 죽어 마땅한 자가 아닌 한 사형을 감면해 주고, 소소한 죄를 범한 자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은 후 모두 석방하라. 상당한 중죄를 지은 자도 갱생의 기회를 주겠다! 사회 노역으로 폐허를 복구하는 데 동참시켜 죄를 씻게 하라. 내전에 참여했다가 도주한 모든 병사들도 제자리로 돌아오라 하라. 황금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망극하여이다!”

대사면령과 함께 마침내 주체는 황제로 즉위했다.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고―훗날 성조로 바꾸었다―시호를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라 하였으니 그가 바로 홍무제와 더불어 명 역사에 가장 유명한 영락永樂 황제였다.

홍무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태위의 물망에 올랐으되 좌천되어 북평의 연왕으로 봉해졌고, 오랜 내전 끝에 마침내 황위에 오른 인물로서 세상은 그를 명의 대방룡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런 조정의 일과 관계없이.

“오고 있다!”

“악가군이다!”

“와아!”

마침내 악불비를 비롯한 막여사, 임대백 등 휘주, 황석의 의군들도 다시 안휘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경계를 들어서자 악충보 역시 안휘에서는 어마어마한 환영을 받기 시작했다. 내전의 일보다 올바른 향용으로서 환영받는 것이었다.

사실 그러지 않을 수도 없다. 원래도 협의로 이름 높은 곳이 악충보였지만 당장 자신이 위험한데도 난민들을 위해 양곡을 마련하는 등 쫓기는 사람들을 도우며 사명을 다했으니 당연히 호응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지역민들에게는 자신들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 향용이 최고다.

이렇다 보니 안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쉽게 휘주까지 가기도 어려웠다.

움직이는 내내 도처의 현감들이 나서서 악불비를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헛헛…… 악가군이 선 후로 내내 대명을 떨쳐 온 게 악충보이지만 또 큰일을 하셨더구려. 번거로우시겠지만 우리 숙주宿州 쪽도 좀 살펴 주셨으면 싶소이다! 오랜 내전에 포청도 비었고, 보조하던 숙정방까지 휘말려 사람들이 다 전사하는 등 질서가 말이 아니올시다. 모쪼록 거절하지 말아 줬으면 싶소이다.”

내전에 휘말려 징병되거나 지원해 나갔던 도처의 향용들.

수장들이 죽고 방파가 해산된 경우가 사실 적지 않았다.

관포들까지 차출되어 태반이 죽어 나간 내전이다 보니 도처의 치안에 구멍이 뚫렸고, 이를 메우기 위해 다투어 악충보에 응원을 요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휘주에도 사람이 부족합니다. 보다 나라에서 거대 향용을 허용하지 않으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처의 현감들은 계속 부탁했다.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악 보주라면 괜찮을 것 같소이다. 세운 공도 작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급해서 청하는 것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소이까. 아쉬운 대로 우선 백 명만이라도 남게 해 주시오. 사람들이 모두 원하고 있소이다.”

충직하기로 명성이 높은 악충보이다 보니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눈치인 것이다.

난처하긴 했지만 세가 확장된다는 점에서 악불비로서도 사실 싫은 일은 아니었다.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시다니 그러면 백 명을 남겨 힘을 보태 드리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철수시킬 것이지만, 그래도 태수께서 언짢아하지 않도록 미리 허가를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소이까. 뒤탈 없이 할 것이니 안심하셔도 좋을 것이올시다.”

악불비는 도처에 사람들을 포진시켰다.

“자紫 당주, 이, 정 향주와 백오십 명을 줄 테니 숙주 지역을 살피도록 하게. 곧 신입을 받아 사람을 보내겠네. 급한 일 생기면 바로바로 연락하고.”

“어이쿠, 보주님!”

우선 각 지역의 분파주가 된 것은 당주급 인물들이었다.

오랫동안 악충보의 수하로 헌신을 해 온바 마침내 독자적으로 영역을 지키는 한 지역의 수장이 된 것이었다.

난세는 이렇게 무사들에게 입신의 기회를 줬다.

하지만 이렇다 보니 악충보 본진에도 대거 구멍이 뚫렸다.

휘주로 내려오면서 악불비는 유원헌을 제외한 두 당주, 네 향주, 여덟 명의 단주를 숙주, 합비의 분파주로 삼아 수하들과 함께 남겼는데, 결과 간부진 상당수가 비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이 있어 휘주로 돌아온 악불비는 곧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벽강은 혼인을 해야 하고 숙부님께서는 연로하시니 유 내당주가 이젠 총관의 직책을 맡아 주게나. 순 향주가 내당을 맡고. 이하 비어 있는 자리는 인선을 해서 명단을 가져오게.”

“명!”

모두가 싱글벙글이었다.

세력이 지주, 청국을 지나 숙주, 합비 등 안휘성 전체에 뻗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리가 대거 비워짐으로 후기인 사람들이 치고 나오게 되었기 때문.

순욱은 당주가 되었고, 사호 무사로 고심했던 오동주도 줄타기로 만년에 향주가 되었다.

당연히 친구들에게도 좋은 일이 생겼다.

믿는 바가 있어 했다고 했듯 여덟 명이 흰색 허리띠를 묶게 된 것이었다. 신입, 견습, 말단이었던 녀석들에게 마침내 단주가 될 기회가 온 것이다.

순욱은 변함없이 눈을 부릅뜨고 으르댔다.

“솔직히 이건 벼락출세다! 때가 이렇다 보니 된 것이지 전에 없었던 출세임에 분명한 거다! 하지만 너희 엉뚱한 녀석들은 늘 괴상한 궁리만 하므로, 보나 마나 또 딴짓을 하려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간부가 된 다음에는 어림없다. 악충보도 사정이 어려운 만큼 주위가 안정될 때까지는 꼼짝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거니와, 말썽 부릴 것 같으면 일찌감치 말해라.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약속을 할 녀석들만 나서는 거다!”

“옙! 잠깐만!”

어느새 순욱도 사십 세. 세운 공에 경력, 성품도 그렇고 분명 당주로서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친구들도 이십오륙 세, 이젠 어리지 않다.

하지만 수효가 있으니 여덟 개의 허리띠로는 부족했다.

“우리 이야기 좀 하세.”

서둘러 친구들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막 형을 빼고도 사람이 열 명인데 자리는 여덟이니 어찌할까? 우선 나는 빠지겠네.”

제일 먼저 한자방이 양보했다.

그러자 신학철, 허원소, 정백하, 조태형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도 좀 기다리도록 하지. 세운 공도 그렇고, 전 형 들이 먼저 올라가야 하는 게 맞네. 그런 다음 부단주 자리를 줘. 그 좋다는 줄타기 좀 해 보세.”

다들 여유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약관에 입문해 교관까지 거친 순욱이 서른다섯 살에 단주가 된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이것은 벼락출세가 맞았다.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넘칠 만큼 실력이 있고, 든든한 인맥에 지주, 청국을 비롯해 분파만 해도 네 곳이다.

사람이 부족한 만큼 신경 쓰지 않아도 조만간 다들 간부가 될 것이고, 실수가 없는 한 향주를 거쳐 오래잖아 당주, 나아가 분파주까지 점칠 정도로 앞날이 창창했다.

악불비만 해도 예순 살이 되어 가지 않는가.

은퇴하면 악용이나 악완소가 뒤를 이을 것이고, 지주, 청국 분파주 자리가 비는데, 실제 새로 임명된 숙주, 합비 분파의 분파주들도 다들 쉰 살이 넘은 상태다.

단주까지가 어렵지 순욱의 승진을 생각해 봐도 후부터는 일사천리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뜻밖의 일이 생겼다.

한자방 등이 양보하고 나서자 우물쭈물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송민이 묘한 소리를 했다.

“아니야. 나는 좀 다른 계획이 있네. 빠지고 싶으니 나부터 제외해 주게.”

한자방 등의 얼굴에 멈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다른 계획?”

송민은 계속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있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모두가 의아해하는 속에 곽영 역시 잔뜩 눈치를 보더니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 나도야. 나도 좀 빠져야 할 것 같아. 역시 계획이 있어서…….”

곽영까지.

“대체 뭐야? 혹시 자네들끼리만 뭔가 더 나은 일을 하려는 거 아닌가? 그러면 우리도!”

그러자 다들 잔뜩 미심쩍은 기색을 보이며 포기하려는 눈치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전소가 웃으며 다음 차례로 나섰다.

“그런 건 아니라고 봐. 전혀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냥 편하게 진급하게. 나도 빠져야 할 것 같으니까. 우리 셋이 빠지는 것으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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