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새로운 시작 (3)
무예에 앞서고 학문과도 다른 지모智謀.
“병법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그러나 의미가 다른 것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병법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십중팔구가 그것이 군사를 움직여 적을 치는 수법이라 생각하지. 물론 틀리지 않고. 하지만 책사들의 지모는 훨씬 더 방대하여 천하의 모든 권모술수를 포함한다. 병법이라 불리는 용진, 용병술은 기본이고 지리를 헤아리는 지리학, 기후를 헤아리는 천문학, 사람을 헤아리는 심리학,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학까지 포함되어 있다. 무예와 일반 학문은 잔가지일 뿐이지.”
“도연 대사님은 역학易學까지 공부하신 것 같던데 얼마나 해야 그 정도가 될 수 있을지.”
얼핏 의문이 생겼다.
“송구스러운 질문이지만 아버지께서 조정의 편에 서셨다면 승부를 돌릴 수 있으셨을까요?”
막여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칼자루가 나쁘기 때문이지. 조정이 패한 원인은 첫째 인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군왕이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민심을 헤아리는 것인데, 건문제에게는 그것이 없었던 것이다. 즉위 후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다독이고, 장수들을 불러 격려하는 등 몇 가지 일만 했어도 패하지 않았을 것인데, 무작정 문신 정책을 시도해 삭번부터 단행함으로 패착을 불렀던 것이지. 연왕을 잡았다 해도 숙부들을 죽인 비정한 황제로 기록되었을 것이니 이겨도 패하는 것이다.”
군왕의 덕목.
“인물을 택함에도 큰 실수가 있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이 내 자신과, 상대와, 상대가 지닌 여건과 지리, 기후를 살피는 것인데, 이것을 책사들은 인人, 지地, 천天이라 한다. 하지만 건문제는 자신을 몰랐고 아랫사람도 몰랐지. 황자징을 너무 믿은 것인데, 옳고 그름을 떠나 그는 문사일 뿐이었다. 문사가 전쟁을 주도할 수는 없거니와, 정확히 그가 건문제를 망친 것이다.”
건문제를 망친 것은 황자징.
“장수를 선발한 것을 봐도 그러하다. 첫 출정 했던 경병문은 대단한 맹장임에 확실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 싸움에서는 주위도 헤아리지 않고 추적하다 당했을 정도로 좀 급했다. 차후에 대장군이 된 이경륭은 더 성급했고. 그래도 경병문이 훨씬 나은데 황자징은 서둘러 그를 끌어내렸고 반대로 이경륭은 너무 오래 두었다. 이것 역시 결정적인 패인 중 하나다. 장수를 보는 눈도 없었다는 것이지. 설상가상 대패한 이경륭을 승장이라 속였을 정도이니 이것은 아예 썩은 칼자루인 셈이다. 이런 칼자루를 잡았다가는 이긴다 해도 내 손만 다친다. 그러므로 패하는 것이다.”
잡은들 손만 다치는 칼자루.
부연 설명을 했다.
“비교해 도연과 연왕은 잘 맞는 칼과 칼자루였다. 세상사가 다 그렇지만 병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땅이 넓을수록 더 그렇다. 제갈량을 비롯한 역대의 이름난 책사들 중 단숨에 적을 공략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전술을 살펴보면 아주 유사한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모두가 잘 물러선다는 것이다. 일평생 일대업一大業의 장기 안목으로 승부를 서두르지 않았고, 그러다가도 상대가 허를 보이면 단숨에 무너뜨린다는 점이 있었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도연은 이 점을 헤아려 북평을 거점 삼아 진퇴를 거듭했고, 연왕은 또한 여기에 잘 따랐다. 그리하여 승전을 취한 것이다.”
싸움에 서두르지 않고 전장을 넓게 사용하여 수시로 물러섰던 도연.
“역설하여 이경륭이 정말 추위에 떠는 부하들을 생각해 물러설 정도의 생각만 할 줄 아는 인물이었더라도 조정은 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병문 역시 도연이 물러설 때 서두르지 않고 반 호흡만 늦춰 주위를 살폈더라면 패하지 않았을 것이고. 인, 지, 천을 헤아리지 않은 성급함이 패인인 것이다. 이것만 알아도 일단 세인들이 생각하는 병법은 아는 것이다.”
오랫동안 듣고 관찰했으므로 추룡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리 등 열외의 것은요? 학문에도 없는 만큼 배우지도 못하는 것이온데 어떻게 습득하는지요?”
막여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인人이 가장 힘든 부분이다. 수시로 변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니 늘 돌다리를 두드리는 조심성을 가져야 하고, 아무리 친해도 속을 다 보여서는 안 되며, 매사 퇴로를 확보하고 행동해야 하지. 그것이 처세다. 지, 천은 경험과 관찰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너는 십 년간 봉황산에서 나무를 했지. 구곡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할 것이지만, 정확하게 물길이 돌아가는 모퉁이가 모두 몇 개인지 아느냐?”
구곡하의 물굽이.
“그것을 어떻게 다……?”
“정확히 여든셋이 있다. 그중 사람이 빠지면 위험한 소沼가 서른다섯이고. 보면서도 무심코 지나쳐 모르는 것이지. 문사와 책사의 차이는 눈으로 읽는다는 것과, 발로 읽는다는 차이가 있다. 문사는 눈으로 글을 읽어 만 자를 알지만, 책사는 발로써 세상을 읽어 천하를 아는 것이다. 똑같이 길을 걸어도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 얻는 것이 달라지기도 하지. 문사는 풍경을 보지만 책사는 지형을 본다. 무엇이건 흘려 보지 말고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추룡은 갑자기 골이 아파졌다.
“머리가 터져 버리지 않을까요?”
“그래도 뜻이 있으면 해야지.”
막여사는 불쑥 손을 내밀어 갑자기 앞을 가리켰다.
“저기 앞에 산이 하나 있구나. 무엇이 보이느냐?”
“나무와 숲…….”
추룡은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아! 가파르군요. 매복이 있으면 피하기 어렵겠는걸요?”
“핫핫…… 숲이 우거져 있으니 화공을 하면 역으로 득이 되기도 하겠지. 지점까지 외우는 게 책사의 눈이다. 기억해 두거라.”
“옙!”
산 교육.
머리가 아팠지만 추룡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변함없이 좋은 부자지간이었다.
그런 중에도 북평의 상황은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주체가 제위를 잇기로 결심해 조칙을 새로 마련하는 등 각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결심하셨다니 하례 올리나이다!”
도연이 북평으로 달려온 것은 보름 후였다.
“어서 오라, 도연.”
오늘까지 주체를 이끌었던 공신 중의 공신!
좀처럼 웃음이 없는 주체의 얼굴에도 그를 보자 웃음이 떠올랐다. 더불어 공공연하면서도 뜻밖인 비밀 하나가 밝혀지고 있었다.
“그대는 어린 시절, 짐이 좌천되어 북평으로 갈 당시부터 견마지로를 다해 위업을 달성케 했지. 짐이 오늘을 맞이한 것은 모두 그대의 덕분이다. 신세를 어찌 갚아야 할까.”
“하찮은 승려가 도움이 되었다 해 주시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나이다. 신이 바라는 바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지금 이대로 폐하의 곁에 머물면 그것으로 삼생의 복이 될 것이나이다.”
도연은 변함없이 쏘는 듯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굳이 해 주시겠다면 오직 하나, 선종禪宗을 어제처럼 부흥케 해 주소서. 도강하실 당시 소리 없이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온즉 그것이면 족하나이다.”
도강, 선종.
주체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함께 나온 다음 말.
“그리하리라. 원 참모에게도 한 말이다만 숭산은 석년 명에 적잖은 실수를 했다. 하나 마침내 그 빚을 모두 갚았다. 그대, 소림의 승려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선종에 거치적거릴 것은 없을 것이다. 문호를 크게 열고 번성케 하라!”
도연이 소림의 출신.
바로 그러했다. 공공연하면서도 뜻밖의 비밀이라는 것은 바로 도연의 신분이었다. 정확히 남은 기록으로서 그는 선종의 승려였고, 선종의 종주가 소림사! 달마대사로부터 선불교가 시작되었으니 그 역시 소림에 적籍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덕주의 싸움 당시 이를 보기 위해 갔을 때 유곡이 말했던 것으로, 도연이 선종의 승려로서 숭산에 힘이 미치고 있다던 말이 사실이었던 것.
주체는 계속 원기를 보며 말을 이었다.
“원 참모 역시 공이 크다. 무당과 공동 역시 번성할 것이다. 문호를 크게 열고 민간에 바른 도리를 심어 백성들을 제도하는 데 앞장서 주었으면 한다.”
더욱 놀라운 발언이었다.
도연과 원기가 공동의 기인 석응진과 관련이 있음은 일찌감치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무당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별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원기 역시 선도교, 무당에 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공공연한 비밀로서 이들로 인해 명나라 초기, 주춤했던 소림과 무당은 최고조로 번성했다.
주체는 거금을 들여 장신 등과 함께 삼십만 명의 인부를 파견해 소림에 천불전을 세우고 긴나라전을 짓게 하는 등, 승려의 수가 무려 팔천까지 늘어났고, 무당에도 십사 년에 걸쳐 *구궁九宮과 팔관八館 등(*가장 유명한 건물이 무당산 천주봉 꼭대기의 금전金殿이다. 동銅으로 만들어진 전각으로서 지금도 남아 있는 명 대 건축물의 걸작들이다.) 서른세 개의 대전을 세워 줬다.
이후 주체는 사람을 보내 원혜 대사와 장삼풍을 청했으나 두 사람은 모두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으로 회수에서 쫓길 당시 그를 도왔던 인물들이 누구이며 장강을 돌파할 때 수군을 무력화시킨 두건인들이 누구인지, 어째서 도운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기이하다 싶게 수시로 도연을 거론했던 원혜 대사나 연화봉에 장삼풍이 나타났던 까닭이 무엇이었던지도 알 수 있었고.
이유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햇볕 속에 역사이고, 달빛 속에 전설이라 하듯 명사明史의 뒤에 조용히 잠자고 있는 진실이었다.
“망극하나이다.”
도연은 눈을 번쩍이며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말을 받았다.
“하오나 아직은 일이 끝난 게 아니옵니다. 아시듯 소승의 뜻은 건문 황제께서 폐하를 청해 발전을 도모하기를 원하였던 것이온데, 어긋나 틀이 크게 변했나이다. 그대로였다면 무난히 사상의 시대가 되어 안정 속에 천하가 황금의 시기를 맞이했을 것이지만, 내전으로 격변의 시대가 예고되나이다. 북에서 벤야시리가 침공을 노리고 있고, 남부의 민심이 크게 흉흉하니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할 것 같나이다.”
계획.
주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려하고 있는 바다.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도연은 계속 쏘는 듯 눈을 번쩍이며 대답했다.
“전생의 업은 어찌할 수 없는 듯, 폐하께서는 계속 병정개미로 남으셔야 할 듯하옵니다. 중부는 불리한 곳이오니 일단 도읍을 북평으로 옮기소서. 정주를 중심으로 삼으시고 북평을 대도大都로 하여 북원의 침공에 맞서셔야 하실 것이나이다. 토번(티벳), 안남(베트남), 동왜(일본)에 사신을 보내 위엄을 보여 범람을 막으셔야 할 것이며, 토이기(터키)의 제왕 티므르가 서구를 장악하고 남하를 계획하고 있다 하니 또한 화친을 꾀해야 할 것이나이다. 당장 급한 것이 달단이고 남부의 민심이오니 천도遷都부터 행하소서.”
병정개미의 업.
구도가 동왜에 토이기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유례가 없었다 할 만큼 넓은 기략이었다.
도읍을 옮기자는 이유는 남북의 대결 구도처럼 되었던 내전으로 금릉에 머무는 게 불안하다는 뜻이었는데, 중부에 있는 상태에서 북원이 침공해 오고 남부의 군벌과 실력자들이 재차 도전해 오면 외우내환으로 위험한 상황이 되므로 하자는 뜻 같았다.
주체의 눈이 다시 번쩍였다.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평생을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북원만큼은 용서치 않겠다. 티므르 또한 영웅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누가 강자인지 보여 주기로 하지. 세부 안을 작성하라! 천도를 단행할 것이니!”
“명!”
“한데 이상한 소식이 있더구나. 내전 내내 북원과 맞서던 섬서군이 철수했다는 기별이던데, 사실이던가?”
“잠시 주위를 좀 물러 주소서.”
도연은 중신들을 나가게 한 후 대답했다.
“신이 서둘러 달려온 것도 실은 그 때문이온데, 섬서군이 철수한 것은 오랜 싸움에 지친 병사들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나이다. 삼 년이 넘게 군도산에서 사투를 치른 병력이므로 많이 지친 것이 맞기도 하옵고. 하나 속의 진실은 또 다르나이다.”
도연은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막여사에게서 전해 받은 것으로서, 일순 주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막 장군의 것이군. 무운을 바라며 곁을 지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