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습무사-143화 (143/150)

# 143

새로운 시작 (2)

지나는 곳마다 주민들은 다투어 물을 떠다 목을 축여 주는 등 웃음으로 이들을 반겼고, 이런 양민들을 보며 행군하는 병사들도 터질 듯 기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지켜 낸 것이었다. 이 땅과 하늘, 그들의 웃음을.

병사로서 이보다 더 큰 기쁨과 자부심은 있을 수 없었다.

“무사로서 최고의 보람이겠지?”

뒤따르며 친구들 모처럼 활짝 밝은 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평생을 두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중원이 위험하던 날 나는 군도산에 있었노라고. 이 업적을 무시할 사람은 있을 수 없지.”

“신기해. 삼 년이 짧지 않은데 유혈의 고지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나 같으면 미쳐 버렸을 것 같은데.”

한동안 웃음을 잃었던 추룡 역시 밝아져 있었다.

“가족을 생각했을 걸세. 그밖에 없지. 그리고 또…….”

시선이 가장자리에서 오고 있는 악벽강에게로 향해졌다.

친구들은 다들 공감했다.

“확실하군.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만 생각했을 것 같아. 내가 물러서면 그들이 죽는다, 하고.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가 그들을 만날 생각만 했을 것이고.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야.”

“진정한 영웅들이지.”

전소가 빙그레 웃으며 임백호를 향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능 소저와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돌아가서 곧 혼례를 올릴 줄 알았더니만 소식이 없더군.”

치기를 벗어난 그들, 임백호도 묵직하게 미소 지었다.

“시간이 좀 걸리지. 오랫동안 외부와 등지고 살다 보니 우리는 이족과 혼인하지 않는다는 전통 같은 것이 생겨 있네. 여자들 경우는 아예 한족과 혼인할 것 같으면 죽는 게 낫다고 할 정도일세.”

대단한 폐쇄증.

“부작용을 우려해 능 매의 좋은 점을 알려 긍정을 끌어내려고 늦췄었네. 내전까지 일어나서 더 미루게 된 것이지. 이번에 돌아가면 식을 올릴 거야.”

되물었다.

“오히려 전 형이 더 이상하군. 전 형이야말로 가장 먼저 정혼했잖아. 그런데도 늦군. 연락이 오면 핑계 삼아 달려오려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말일세.”

전소도 그냥 웃었다.

“나도 뭐, 이유는 비슷해. 올리려면 진작 올렸겠지만 왠지 계곡 속에서 식을 올리고 싶지는 않더군. 돌아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올리고 싶었네. 완 매도 그런 혼인은 싫어하는 것 같고.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지. 돌아가면 나도 식을 올릴 걸세.”

“막 형도 그렇지? 사귀는 사람들이 있으니 다들 마찬가지일 거고?”

싱글벙글, 다들 웃었다.

“어, 그럴 거야. 꽤 기다려 왔으니까.”

문제가 하나 생겨 있었다.

“그런데 목장은 어떻게 되었나? 투자한 것이 또?”

“하하…… 망했네! 부지는 남아 있지만 말은 타고 있는 녀석들뿐이야! 일이 일어날 기색이 보이자 아버님께서 서둘러 헐값에 정리하셨어. 전쟁 중에 말은 무조건 징발되거든.”

“적자인가?”

“하하…… 그런 거지. 그래도 땅과 약간의 밑천, 타고 있는 녀석들이 남았으니 새로 시작하면 돼. 완전히 밑진 건 아냐.”

“늘 신경 쓰고 있으니 내 몫을 잊지 말아 줘.”

“하하하…… 여부가 있겠나?”

지금에 와서는 대단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단으로 시작하여 처음 벌인 사업이었다. 추억이 담긴 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오랜 긴장 속에 비로소 여유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임 토사, 정말 큰 결심을 했군. 잘은 몰라도 연왕이 크게 감사해할 거야. 왠지 꼭 자네가 나서 줄 것 같다 생각했지만 역시 그렇게 되었군.”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속에 선두에서 가는 막여사 등도 미소와 함께 대화하고 있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까요. 죽어도 녀석이 나서겠다 하니 도리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고 나서도 잘한 일인지 모르겠군요.”

“잘한 일일세! 묘의 기백을 과시함과 함께 중원의 주인임을 천하에 알린 것이니까. 유사 이래 처음인 일로 아는데, 기왕 시작했으니 지속적으로 보여 주게나. 그래야 주위에서도 어려움을 알고 함부로 망동하지 못할 테니. 사돈을 비롯해서 여러 명의 향용 패주들이 계시지만 다들 같은 생각이실 걸세.”

여러 향용의 태두들.

월명, 명성, 덕주부 외에도 출발할 때보다 너덧이 늘어 있었다. 자의로 나섰을 수도 있고, 마지못해 나섰을 수도 있지만 조정 쪽에 섰던 인물들로서 북평으로 가면서 합류해 수장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말씀 올리지만 돈독히 지냈으면 싶습니다. 워낙 주위와 담을 쌓고 지내셔서 솔직히 묘족이 아주 막힌 사람들이라 생각했소이다. 사교라는 이야기까지 돌아서 더욱. 한데 막상 뵙고 보니 사실무근일뿐더러 상하가 한결같이 호걸이시니! 오해까지 받으며 지내실 필요가 무엇이겠소이까?”

오가며 대화하고 함께 싸우므로 임대백도 상당수 마음을 연 모습을 보였다.

“생각해 주시면 필부야 고맙지요. 우린들 등을 돌리고 지내고 싶어서 돌렸겠습니까. 선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감정이 워낙 크다 보니 담을 쌓게 되었던 것이지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웅주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나온 김에 동맹으로 연대하기로 합시다! 내전은 끝났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심상치 않소이다. 내전으로 인해 파인 골이 더 악화될 조짐이 보이고, 달단 역시 만만히 물러설 기색이 아니니. 또 싸움이 나면 이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가 될 것 같소이다. 내전만 해도 남북의 자존심 충돌이 될 것이니. 우리라도 나서서 완화시키는 게 좋지 않겠소이까.”

악불비도 공감을 표시했다.

“필요한 일인 것 같소. 사실 이번 싸움도 남북 대결의 색채가 짙었소. 명나라를 세우면서 힘을 다 쏟아부은 게 북부인데, 태조가 외면함으로 북부 사람들의 유감이 짙었소이다. 이로 인해 다들 북평을 지원했고, 그래서 연왕이 버틸 수 있었던 것 아니겠소이까. 비교해 남부는 오랫동안 포만한 상태를 유지해 옴으로 전의戰意가 떨어져 있었소이다. 그것이 승부처가 되었을 것이올시다. 북부에서는 사력을 다했지만 남부는 이길 것이다, 하는 안일함으로 힘을 다하지 않았던 것이오.”

내전에의 분석.

“다시 싸움이 시작된다면 패배가 기폭제가 되어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커질 것임에 분명하오이다. 침묵했던 남부의 기인이사들이 모두 나설 것이니 중원 전체가 핏물에 잠기게 될 수 있소이다. 기회 삼아 북원은 또 남하할 것이고. 어떻게든 막아야 할 일이니 향용들이라도 연대하여 주위가 안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구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소이다. 악 보주께서 중심에 나서 주시는 게 좋겠다 싶구려. 지역을 지키고자 있는 게 향용이지만 사실 힘도 너무 부족하오. 도처에 녹림적들이 들끓는데, 고작해야 수백, 많아야 천으로 주州 단위를 살펴야 하니. 문제가 생기면 연대하여 대처하는 쪽으로 협의해 보지요.”

향용 쪽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려는 눈치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해산.

“오랫동안 고생들 많았다. 여기에서 해산한다. 징병으로 온 사람들은 집으로, 전역을 원하는 사람들은 신고하라! 모두 받아 줄 것이다. 천하가 그대들을 영웅으로 칭송할 것이며, 헤아려 조정에서도 포상할 것이다. 한마음으로 사선을 넘은 그대들을 죽기까지 기억할 것이다!”

“와아!”

대동으로 돌아온 섬서군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정확히 섬서삼군과 대동, 태원 등, 산서의 군부가 운집한 연합군이었는데, 소속된 지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대로 그냥 간다고?”

막여사 역시 다시 갑옷을 벗었다.

“가야지. 천중, 그동안 고생 많았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몰라. 자넨 좀 더 남게. 틀림없이 조정에서도 공을 인정해 줄 걸세.”

“말도 안 돼! 나야 한 게 뭐 있다고! 진짜 공을 세운 것은 자네인데 그냥 옷을 벗어 버리면? 그러지 말고 기왕 나섰으니 좀 더 같이 있지?”

남평으로 돌아갈 뜻을 비치자 석천중은 바로 펄펄 뛰었다.

그러나 막여사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대로 좋아. 오래전에 관직을 떠난 내가 무슨 미련이 있다고. 난 그냥 차 밭이나 가꾸는 게 좋아. 오랜 싸움에 지치기도 했어.”

넌지시 일렀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또 북새통이 일어날 걸세. 벤야시리는 절대 그냥 물러설 자가 아니거든. 보나 마나 또 침공하려 할 것이고, 어떤 형태든 싸움은 다시 일어날 걸세. 연왕 역시 만만하지는 않아. 사람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지만 그도 사실 완전히 바르지는 않은데, 그러면서도 결백함을 보이려 하니 지독한 정치를 할 거야. 조금만 실수해도 이놈 저놈 다 잡아넣고 그런 거지. 그러니까 가능한 중앙으로는 가지 말게.”

알아들은 듯 석천중도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손뼉 쳐 줄 때 떠나야지, 사실 나도 더 남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자네가 이대로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돼. 틀림없이 찾을 것인데?”

“그렇지 않을 거야. 갔다 하면 그러려니 할 것이지. 시간이 나면 가을쯤 한 번 더 보세나. 아들 녀석을 혼인시켜야 할 거거든. 바쁘더라도 꼭 참석해 줬으면 싶네. 순문, 해흥이도 함께 와 주면 더 고맙겠고.”

“정말 갈 텐가?”

“잘 지내게. 자네의 정을 잊지 않을 것일세.”

막여사는 빙그레 웃으며 석천중의 손을 꾹 잡아 준 후 훌훌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권력이고 영화고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 한 번 더 모든 것을 버린 것이었다.

그대로 학이라고 할 수밖에.

바람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들을 헤아리는 것은 잊지 않은 것 같았다.

대동을 떠나 남하하는 길.

“서운하지 않느냐?”

슬며시 추룡에게 묻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러실 줄 알았는걸요.”

그러나 뭐, 추룡도 신경 쓰는 모습이 아니었다.

다만 기색은 좀 이상했다.

만날 때부터 그랬지만 이상하게 잔뜩 눈치를 보는 태도였다.

“남아 계신다면 오히려 아버지가 아니시지요. 소자는 그냥 죄스러울 뿐이에요. 불효한 탓에 큰 고생을 겪게 하고 일까지 방해한 꼴이라서…….”

그러나 별거냐는 듯 막여사는 미소 지었다.

“네 일이 곧 내 일인 것이지. 한데 왜 연왕이었느냐?”

추룡이 연왕을 택한 이유.

추룡은 코가 빠진 모습으로 대답했다.

“이유가 워낙 많아서……. 솔직히 소자는 죽어도 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장 도사님의 일로 북평에 간 바 있었는데, 우선 사람들이 좋았어요. 그 정도로 핍박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기울어졌고, 이렇게 되려고 해서 그런 것인지 만난 사람들도 모두 북평 쪽 사람들이었어요. 결정적으로 세자 저하까지 찾아오셔서……. 죄송해요.”

픽, 막여사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주고치가 찾아왔었단 소리냐?”

“성품이 좋은 분이세요. 연왕 전하와도 많이 다른. 꼭 도와주고 싶었어요.”

피식, 막여사는 한 번 더 실소 지었다.

“결과는 같아진 것 같다만 어미, 아비가 없었다면 너는 틀림없이 피를 뒤집어쓰고 시작부터 북평 편에서 싸웠을 것이다. 하나 바른 일이 아니지. 감정에 치우쳐 싸운 셈이니 결코 자신을 바르다 말할 수도 없을 것이고. 연왕 쪽에 섰던 사람들이 현재 모두 그러하다. 억압받은 것은 있지만 찬위의 오명을 피할 수는 없지. 하나 지금의 너는 떳떳할 수 있다. 냉정히 잘못을 지켜보고 세상을 위해 나선 후 사심 없이 떠나는 것이니까. 같은 결과라도 차이가 있음을 알겠지?”

“아버지께서 왜 출사하는 게 이르다 하신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어요.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은데, 열심히 할 테니 무예 외의 것도 가르쳐 주셨으면 해요.”

막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꾸나. 사실 무예라는 게 그렇다. 너는 아비가 관직을 떠나 환경이 변한 것에 우울해서 오랫동안 무예만 수련해 왔는데, 실제 무예는 작은 것이지. 정말 큰 것은 세상을 헤아리는 눈이다. 당장 전쟁만 봐도 힘을 쓰는 것은 무사인 것 같지만 그들을 이끄는 것은 책사이니.”

힐끗 저만치서 오고 있는 전소를 본 후 말을 이었다.

“듣자니 연왕이 전장에서 내내 맹위를 보였다던데. 그러나 뒤에 도연이 있었지. 그가 없었다면 연왕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세상을 헤아린다. 학문과도 다른 것이지. 무예를 떠나 이젠 그걸 배우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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