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어떤 충신의 최후 (5)
“놈들에게 새로운 원군?”
벤야시리의 눈이 다시 무시무시하게 번쩍였다.
“틀림없습니다. 방벽 전투는 별다름이 없었습니다만 북문 쪽에서 이변이 벌어졌다 하더군요. 공격 중에 느닷없이 수천기의 철갑 기마군이 쏟아져 나와 일대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전에 없었던 병력입니다.”
“갑마甲馬라. 터무니없구나! 송 대에나 활동했던 무식한 기갑마가 이 시대에 나타났단 말이냐?”
무식한 기갑마.
사실 그런 면이 좀 있었다.
철갑 기병들은 오래된 옛날, 삼한시대三韓時代 이후부터 송나라 말기까지 등장했던 기마군이었는데, 이후부터 자취를 감췄다.
전투에 있어 실효력이 떨어진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방어와 공격력에 있어 최상의 힘을 지니긴 하지만 말이 곧 지쳐 버리기 때문에 지속력이 없다는 취약점을 가졌던 것이다.
방향을 전환하는 것도 굼뜨고 무게로 인해 말의 운신이 부자유스러워 함정을 잘 피해 내지 못한다는 약점 역시 있었다.
기마대끼리의 싸움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속도를 요하는 게 기마전이라 여간 강인한 말이 아닌 다음에는 철갑까지 두르고 상대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이 활약하던 당시는 말이 부족해 기마군도 많지 않았고, 귀한 말을 보호하자는 뜻에서도 철갑을 씌웠지만 말이 늘어나면서 취약점이 되었고, 요구창腰鉤槍이 개발되면서부터 더욱 문제가 생겼다.
낫같이 생긴 가지 날을 지닌 창으로서 철갑마에 있어 이 창은 거의 치명적인 무기였다.
전문적으로 말의 발목을 걸어 당겨 절단해 내는 창으로서, 은폐물들을 만들고 대비하고 있다가 역습을 가하면 방향 전환이 빠르지 못한 철갑마는 피하기 어려워 십중팔구가 혼전 중에서 당하고 말았다.
휘어진 날로 마상의 사람을 찍어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던 것.
하지만 이 약점을 제외한 나머지 전투력에 있어서는 역시 최강이었다.
워낙 강력한 힘과 무게로 밀어닥치는 철갑마라 일반의 무기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돌진해 올 때 잘못 얼쩡거리다가는 짓밟혀 죽는 수까지 있었다.
일반의 보병에게는 그대로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
따라서 철갑마를 상대하려면 요구창대를 조직하고 은폐물과 함정을 마련하는 등 따로 대응할 채비를 해야 했는데, 갑마가 사라진 현재 따로 그런 창대를 둔 곳이 없다.
알고 대비하면 모르되, 모르는 상태에서는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는 전력이었다.
“중앙 돌파를 위해 편성한 선봉대 같사온데, 요구창대를 편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짜 골고루도……!”
벤야시리는 짜증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금릉에 있던 자들이 올라왔을 리 없는데! 몇이나 되느냐?”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좀 더 정보가 와야 알 것 같습니다.”
“북문 공격은 잠시 중단하고 요구창대를 편성해라! 그때까지 고지전에 집중하고! 지칠 대로 지친 놈들이니 대규모 원군이 아니라면 곧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어라!”
“명!”
일 차에 북문의 공격은 뜸해진 것이었다.
“공격하라!”
“와아아-!”
펑! 펑!
“으아아악!”
하지만 섬서군이나 막여사 쪽도 머리가 비지는 않았다.
철갑마가 뜬 이상 어떤 행동으로 나오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만큼 첫 전투 이후 추룡 등은 말을 두고 별동대別動隊로 재편성되었다.
방벽과 관성을 지키는 수비대와 떨어져 따로 움직이는 전투대가 된 것이었다.
“공격!”
“흐아아-!”
콰차창! 펑-!
“모조리 섬멸시켜라!”
“으아아악!”
도착한 첫날 전투 후, 북문을 포기한 북원군은 방벽 공격에 집중해 더 맹공을 퍼부었는데,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이 별동대에 의해 커다란 손해를 봤다.
수비대와 상관없이 따로 움직이기 시작한 별동대는 수성이 아니라 지역 상관없이 움직이며 취약한 쪽으로 밀고 나가 집중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수성이 아닌 공격조로 등장한 것이었다.
장성 자체가 고지인 만큼 북원군은 아래서 밀려오는 상태였고, 별동대는 위에서 쳐 내려가는 상태로서, 위치 면에서 우선 크게 유리했다. 향용 출신으로 이루어진 병력이라 개별 전투에 더 능한 바도 있었고.
이렇다 보니 백병전이 벌어지면 항상 한 지점은 쑥대밭이 되곤 했다.
가뜩이나 점령에 성공하지 못해 애가 타는 벤야시리에게 정말 골치 아픈 존재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열흘.
개전 초기부터 끈질기게 중원을 노려 왔던 북원군에게 기어코 화가 닥쳤다.
“가소로운 놈들! 어설픈 수작 끝난 거다! 죽어도 너희는 장성을 넘지 못할 것이다!”
“본군의 화력을 보여 줘라!”
쿠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악!”
마침내 도연이 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당도한 것이었다.
내전이 끝났다는 소식 때문인지(?) 대동에서 지원하던 석천중 역시 연안 등에 남아 있던 병력을 모두 보냈다.
이순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난 싸움에 버텨서 뭘 하자는 소리야? 말 들어!”
“끝까지 충성하겠다는 생각은 높이 사겠어. 하지만 황상은 붕하셨고, 더 중요한 게 백성이고 장성 수비야. 안위를 생각해서 복지부동하자는 것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뒤탈이 없을 것이라는 것, 절대 보장할 테니까 무조건 이동해!”
홍묘 등 악충보가 움직일 수 있게 물고를 터 준 직후 그는 금릉을 빠져나와 형주안찰부로 피신했는데, 금릉 함락 소식과 함께 일을 재개해 도처를 돌며 성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기에 들어간 태수들 및 장수들을 으르고 달래 장성으로 끌어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침묵하던 도위부가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 것.
조정에 비협조적으로 나왔던 내륙의 왕부들 역시 속속히 병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서고 싶어도 힘이 크지 않아 눈치만 살피고 있었던 터에 주체가 중앙을 무너뜨린 만큼 이젠 도울 때인 것이었다.
초상집 상태로 남부 쪽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이제야 간신히 뭔가가 좀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끝난 것…… 같습니다. 계속 원군이 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주체가 금릉을 장악했고, 도연 역시 전진해 있던 병력을 끌고 돌아왔다는 소식 같습니다. 도처의 왕부들도 협조한다는 보고이옵고.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과로 꼭지가 돈 것은 벤야시리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그렇게 수월하단 말이냐! 아무리 금릉을 쳤다 해도 그렇지, 반역으로 조정을 엎은 자가 두 달 만에 주위를 안정시켰다는 게 말이 된다는 소리냐?”
분명히 이상 현상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반역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면, 성공한다 해도 안정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방에서 인물들이 일어서고 군부들이 항전해 이를 진압하는 것만 해도 수년이 걸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는 놀랍다 할 정도로 빠른 안정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듯하기도 합니다. 건문제가 즉위한 후 워낙 상태가 엉망이었사오라. 사람들은 시작부터 열여섯 살의 황제가 제대로 나라를 끌어갈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왕부들과 대신들의 알력을 염려했던 상태입니다.”
건문제의 나이와 자질에 대한 걱정.
“한데 즉위하자 일어난 사건들은 우려했던 점들을 그대로 보여 준 것일 뿐이었던 셈입니다. 졸속 국장을 치르는 등, 제일 먼저 번왕 삭번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다 보니 민심도 안 좋고, 몇몇 친분 있는 대신들을 위주로 집권을 하다 보니 도위부도 멀어지고,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거의가 주체가 낫다고 생각하는 눈치로서 당장 들고일어서기보다 하는 것을 좀 지켜보자는 판세로 기운 것 같습니다.”
“남부 쪽은! 원래 그들의 텃밭 아니더냐!”
“그렇긴 한데 그조차 전처럼 그리 확고한 무엇이 없습니다. 워낙 황자징 등이 멋대로인 행동을 해 버려서 큰소리칠 만한 게 없는 상태입니다. 황자징 일파 외에도 많은 남부의 중신들이 조정에 있었지만 그들조차 지난 체제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 상태입니다. 주체가 양주를 함락시키자 대부분의 인물들이 건문제를 피신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그는 궁실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한 채 죽었으니 황자징, 제태, 방효유 외의 말은 먹혀들어 가지도 않았던 셈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조차 지난 구도에 회의를 느끼고 있고, 주체에게 황위에 오르라 하고 있다는 소식이더군요.”
“강제겠지! 주체란 놈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시키는 것 아니냐?”
“별로 그렇지 않다는 소식이……. 아무튼 중원 쪽 상황은 그렇고, 중요한 건 원군들이 속속히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강된 군력만 해도 삼십만에 달하고 있는데,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대로 중원을 어찌해 보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했다.
이십만으로 팔만을 넘어서지 못했고, 삼십만으로도 십이만을 넘어서지 못했다. 마침내 육십만이 진격해도 넘지 못한 장성을 지금에 와서 어떻게 넘을 것이란 말인가.
“막여사 그놈!”
쾅!
벤야시리의 손이 무섭게 탁자 위로 떨어졌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삼 년에 걸친 싸움에 희생자가 수십만에 달하는데 여기에서 어떻게 손을 든다는 소리냐! 그놈에게 당했다는 것이 더 화가 난다!”
차려진 밥상이라 생각했던 만큼 그로서는 사실 이가 갈리지 않을 수 없다.
한데 이때였다.
“칸! 밖에 뜻밖의 자가 찾아왔습니다.”
진영 밖에서 수장 하나가 허겁지겁 들어오며 뜻밖의 보고를 했다.
“사신입니다. 주체가 보내어 왔다고 하는데, 화친을 맺고자 한다는군요.”
“화친 같은 소리를 하는군! 놈들이 누구를 놀리나!”
그러나 이것은 더욱 그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신경조차 쓰지 않고 벤야시리는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다.
“보기도 싫으니 목을 잘라 버리고 전력을 집중해 공격하라! 병력이 더 오기 전에 함락시킨다!”
잔인하고 거친 성격이라는 평이 자자한 남자.
“칸……!”
수장들의 안색이 핼쑥해졌지만 그러나 명령은 이행되었다.
“악!”
찾아온 사신은 벤야시리를 만나 보지도 못한 채 목이 잘렸고, 더불어 원군의 총공격이 감행되었다.
“공격하라! 어떤 일이 있어도 함락시켜야 한다!”
“와아아아아!”
콰콰콰콰쾅-!
쒸이이이익!
퍼퍼퍼퍼펑-!
“으아아악!”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싸움보다 어마어마한 공세! 대동하고 있던 모든 병력, 지니고 있던 모든 화력을 총동원한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섬멸시켜라!”
“와아아아아!”
하지만 예측되었듯 이 싸움부터는 전세가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군도산의 전투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수성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중원의 군사들. 개미 떼같이 북원군이 사방을 뒤덮고 밀려오는 속에 마침내 그들이 반격에 나선 것이었다.
불비가 쏟아지듯 한 신화비아가 시뻘겋게 하늘을 물들이며 퍼부어지고 장성이 진동하는 포화가 천지를 흔드는 속에 섬서, 북평군을 위시한 병력이 해일처럼 북원군을 향해 밀려가기 시작한 것!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소수로도 어려움을 이겨 낸 우리가 지금에 와서 당할까 보더냐! 밀어붙여라!”
콰차차차창!
“크아아아악!”
그리고 시작된, 양군이 인해를 이룬 어마어마한 대회전.
또다시 장성 일대가 시체로 덮이고 피로 씻어지기 시작했다.
“껄껄껄…… 벤야시리는 어디에 있느냐?”
막여사와 악불비, 임대백 등도 모두 공격에 나섰다.
백만 대군이 소용돌이치듯 뒤섞여 혼전을 벌이는 속에 거인들같이 전장을 헤집기 시작한 것이었다.
콰차차차차창-!
“으아아아악!”
“크아아!”
모두가 저승사자였다.
늘 조용하거나 침울해하는 등의 모습으로 얌전하다시피 잠잠히 지내왔던 악불비!
그는 쉰 근의 화극畵戟을 들고 나섰다.
한데 그 위용이 그야말로 삼국시대의 여봉선呂奉先을 방불케 한다.
진중원의 명성을 지닌 탕음악가의 후손에 휘주 향용의 패주인 만큼 상당한 무위가 있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정도가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손을 쓸 때마다 극광만장戟光萬丈이라 할 정도의 시퍼런 화극의 소용돌이가 주위를 완전히 뒤덮다시피 했는데, 창영에 가려져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