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무림이 존재하는 이유 (4)
패전敗戰!
황자징, 제태, 방효유 등 일파들 및 건문제의 낯빛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퇴각하리라 생각했던 북평군이 설마 강을 건널 줄은 몰랐고, 두 배에 가까운 병력이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줄은 더욱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건문제의 얼굴은 공포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이하오? 어이하면 좋겠소? 그렇게 장담하더니만 결국 진강까지 함락되었다 하니? 코앞인 곳이 아니오?”
참으로 딱한 일이었다.
누구를 탓해야 할 것인지.
하지만 황자징 일파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사색이 된 건문제가 묻자 방효유는 이런 대답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국가를 이 같은 위기에 몰아넣은 책임자 이경륭을 사형에 처해 민심과 연왕의 마음을 달래야 할 것이옵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할 소리였다.
이경륭.
대장군이었던 만큼 분명 그에게는 패전의 책임이 있다.
번왕들의 삭번에 앞장선 무엇도 있었고. 하지만 그가 대체 무슨 죄인가?
대장군이었다 해도 오래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덕주에서의 패배로 실각되어 성용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소환당해 왔고, 일부러 패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가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것인지? 없는 능력이나마 명령을 받들어 열심히 싸운 잘못밖에 없는데, 그가 어째서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것인지?
사록史錄은 방효유를 천하에 다시없는 학자라고 했다. 많은 저서들을 남겼고, 한림원의 시강학사로서 황족들까지 가르쳐 온 만큼 확실히 대단한 학자일 수 있었고.
하지만 인격까지 제대로 된 학자는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임을 이경륭에게 씌우며 계속 그럴듯한 이야기를 했다.
“더불어 주변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끌어들여 밀집시키고 성 밖의 물건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북쪽 병력이 오기까지 수성전을 펼쳐 고비를 넘기는 게 좋겠습니다! 그사이 사신을 보내 도처의 번왕들에게 지원군을 청해 공격을 감행시키면 희망이 없지 않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이래도 번왕, 저래도 번왕.
번왕이 무슨 동네북인 것 같기도 했다. 세가 있을 때는 모조리 삭번해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숙청을 감행하더니 급할 때마다 번왕 타령을 하고 있다.
어느 쓸개 빠진 번왕이 좋다고 나서 주겠는가?
당장도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폭우 속에 끌려 나와 황궁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백성들을 더 끌어들여 성안을 메우면?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무얼 어찌하자는 것인가?
양심도 아닌 소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에서도 분명히 묘한 사실 하나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은 주체라는 남자의 성품에 대해서다.
병정개미라 할 만치 억세게 잘 싸우고 두렵다 할 정도로 강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지만, 아버지의 신패를 향해 포를 쏠 수 없다 하여 공격을 중지시킨 점 등, 여러 정황을 미루어 결코 그가 악당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힘없는 부녀자, 백성을 방패 삼자는 누군가에 반해, 그들을 향해 포격을 가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
그러니 이런 짓을 하자는 것이고, 여린 점을 이용해 수성을 하자는 이야기니 누가 악당인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들도 다 소용없었다.
같은 시각 진강 방벽을 장악한 주체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진격해 금릉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얼빠진 자들을 돕겠다고 달려올 번왕도 없을뿐더러, 있다 쳐도 더 먼저 자신들이 끝장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기가 막힐 소리들만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건문제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국토의 반을 주겠다고 전해 주시오. 군을 물리면 맹세코 약조를 지키겠노라고.”
사형에 처하는 대신 이경륭을 사신으로 주체에게 보내 또 화의를 청했다.
황자징 등 일파들이 몇 번인가 거짓 화의 교섭을 했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인 것 같았다. 목에 비수가 와 닿다시피 한 상태인 만큼 거짓 화의를 제의할 수 없기도 했다.
하지만 진심이라 해도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의 희생을 치르며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온 상황에 어느 인물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겠는가.
받아들인다 해도 국토는 두 동강, 싸움은 또 일어나게 마련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무슨 수작이냐! 썩 돌아가라!”
사신으로 온 이경륭을 본 주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벌컥 소리쳤다. 성인聖人이라 해도 받아들이기 쉬운 제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절했다고?”
교섭에 실패하고 돌아온 이경륭을 본 건문제, 황자징, 제태, 방효유 등의 낯빛은 더욱 사색이 되었다.
포위당한 채 금릉성은 고립되었고, 수비 병력조차 이젠 일만도 안 된다. 대승을 거뒀다 해도 장강을 넘어서며 북평군 역시 사만여가 전사했는데 그래도 십만이 남은 상황.
금릉을 함락시키기란 여반장인 상태였다.
“입성한다!”
“앞으로!”
쿵쿵쿵쿵.
마침내 주체를 선두로 한 북평군은 금릉성을 압박하며 성의 관문인 조양문과 금천문, 두 곳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한데 우스운 일이 있었다.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은 책임을 지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던 방효유가 급해지니 죽이자 한 이경륭을 금천문의 수비장으로 임명하고 또 싸우라 명령했던 것이다.
다행히 목이 달아나진 않았지만 사형감이 되었던 이경륭 역시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충성할 이유도 싸울 이유도 없어 주체가 당도하자 그냥 성문을 열고 그를 맞이해 들였다.
인질이 된 백성들을 생각했던 것일까.
장수로서의 능력은 좀 없었지만 어리석기까지 한 인물은 아닌 셈이었다.
“끝내 최후가 왔구나…….”
이경륭이 항복하고 금천문까지 뚫렸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건문제는 완전히 절망했다.
스무 살.
열여섯 살에 황제가 되어 대신들의 권언에 따라 숙부들을 삭번했던 황제.
무엇이라 그를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려져 있기로는 영혜 온화한 성품이라 하나 영혜라는 말과는 거리가 있었고, 온화하다기도 무엇한 바가 있는 것 같았다.
사실史實을 찾아보면 그냥 ‘심약하고 겁이 많은’ 정도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인물.
기록에 의하면 북평군이 양주를 치던 날부터 ‘종일토록 넓은 궁정을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라고 했는데, 마침내 금천문까지 무너지고, 주체의 금릉 진입이 시작되었으니 그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내전의 침소.
사색이 되어 주저앉아 있던 그의 눈에 문득 뜨이는 상자 하나가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방치했던 것으로 죽기 전 홍무제가 남겼던 상자였다. 속에는 여전히 머리를 깎는 삭도와 한 벌의 승의, 궁전을 빠져나가는 지하 통로의 지도, 약간의 은자, 이 네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고.
홍무제는 이를 남기면서 이 뜻을 헤아리면 화가 없을 것이라 유언했는데, 즉위할 당시에만 해도 그는 이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황제가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은 채 혼자 달아날 일도 없다고 생각했고, 몇 푼의 은자가 든 것은 더욱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금천문이 무너진 지금, 상자를 다시 본 그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그는 상자 속에 든 물건들의 뜻을 깨달은 듯했다.
죽기 전 홍무제는 내내 상잔相殘의 꿈을 꾸었고, 그에게 혈육 간의 상잔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러나 그는 대신들에 휘말려 결국 상잔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런 상자를 남기면서 뜻을 헤아리면 해가 없을 것이라 한 홍무제의 말은, ‘혹시 상잔이 일어날 경우 네게 남을 것은 이것뿐이다.’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확실히 지금의 건문제는 달아나도 기댈 데조차 없었다. 백성들까지 흉혐의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내가 황제다 밝힐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숙부들을 삭번하면서 상잔을 시작한 그를 좋다고 받아 줄 친지도 없다.
그대로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채 지하 통로로 빠져나가 탁발승인 양 행세하며 몇 푼의 은자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만 금짜리 장신구에 금포를 두르고 있었으나 탁발승이 이런 것을 팔려고 한다거나 하면 바로 수상히 여겨져 체포되게 마련이었으니까.
약관의 황제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직후 주체와 북평군이 황궁 앞까지 다가왔을 즈음!
“불!”
“불이다!”
금릉 중심의 웅장한 궁성, 응천부에 난데없는 일이 일어났다. 퍼부어지던 비가 잠시 그쳤나 싶은 사이, 느닷없이 내궁 쪽에서 활활, 시뻘건 불줄기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서 불을 꺼라!”
황궁 앞에 도착한 주체조차 경악한 일로서 급히 부하들에게 불길을 진압하라 명령했지만 복잡한 궁실의 구조에 비단으로 늘어뜨려진 휘장 등 인화 물질이 많은 내궁의 불길을 잡기는 어려웠다.
번진 불은 여러 채의 내전을 태우고야 간신히 진압되었는데 불길이 번지기 시작한 곳은 건문제의 거처였고, 뒤늦게 알게 된바 그의 행방이 묘연했다.
궁실 안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이라 생각하여 불을 지르고 자결을 한 것일까.
“화재 현장을 뒤져 봐라!”
서둘러 주체는 부하들에게 일러 잿더미만 남은 내전을 뒤지게 해 시커멓게 탄 건문제 및 몇 구의 시체를 찾아내었고, 보자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비분의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다.
“나는 나라를 망치려 드는 간신들을 치고 황상을 도우려 했는데 왜 이런 짓을 하신 것이오!”
많은 인물들이 이런 그를 위선자라 했는데 과연 이것이 진짜 위선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을까.
그러나 그가 본 시체가 건문제라는 확증은 없었다. 찾아낸 시체 중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인 혜 황후의 시체 하나였고, 나머지는 너무 검게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는데 그중 한 구를 건문제라 추정한 것은 타다 남은 발목에 있는 커다란 점 때문이었다. 건문제의 발목에도 점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건문제가 분사焚死했다고 판단했을 뿐인 것이다.
그만치 건문제의 최후는 분명치가 않다. 발목의 점을 보고 건문제라 여긴 주체가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가 확실히 건문제라는 증거는 없었고, 이후 그를 봤다는 소문 역시 도처에 나돌았다.
궁실에 불을 지른 후 머리를 삭발하고 비밀 통로를 이용해 달아난 그가 신분을 감춘 채 승려 행세를 하며 정통 사 년, 주체의 증손자 대까지 생존했다는 민간의 기록도 있지만, 어느 것도 진위라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된 것이었다.
도망친 상태에 내가 건문제다 밝힐 바보도 없고, 황제의 얼굴을 아는 백성도 없기 때문이다.
불이 난 까닭조차도 명확하지가 않다.
일설에는 절망한 그가 신하들에게 일러 불을 지르게 했다는 설도 있고 스스로 질렀다는 설도 있었다.
무엇이 정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이었다.
“놔라! 무식한 놈들아!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어린 건문제를 부추겨 골육상잔을 벌이게 했던 황자징과 제태, 방효유 등 일파들은 숨어 있다가 꼼짝없이 주체의 부하들에 의해 사로잡혔다.
황자의 몸으로 북평으로 좌천되어 가기 전부터 원수가 져 있었던 일파들!
잡혀 온 황자징과 제태를 본 주체의 눈에 불이 튀고 모발이 하늘로 거꾸로 치솟았다.
“추잡한 역신 놈들아! 하늘이 열 동강 나도 너희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 사지를 찢어 죽여라!”
능지처참!
“으아아아악!”
주체는 잡혀 온 황자징과 제태를 그 자리에서 오마분시五馬分屍시켰다.
양팔과 두 다리, 목에 밧줄을 묶어 다섯 마리의 말에게 당기게 하여 찢어 죽이는 최악의 극형이었다.
나머지 일파들도 잡히는 대로 모두 그 자리에서 극형에 처했고, 삼족까지 참수하라 명령했다.
사뭇 가혹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의 분노는 당연했다.
태위의 물망에까지 올랐던 몸으로 북평까지 좌천되어 내려가 온갖 어려움을 겪었고, 끝없이 지속되어 온 모함에 부친이 죽었어도 장례조차 못 본 채 쫓겼던 그! 오늘에 이르기까지 흘린 피가 또 얼마인가.
백만! 말이 쉽지 상상을 초월할 수효의 병사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주체로서는 완전히 치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