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도모圖謀 (4)
추룡은 당시 악불비에게 그럴 경우라면 주체까지 치겠다고 하였는데, 같은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그가 악불비와 달라 삼가는 것이라 봐도 이 내용은 분명히 크게 달랐다.
더 전에 세워진 다른 계획이 있다는 것!
이중의 결계結界가 있다는 것으로 그것은 무조건 이행될 것이라는 뜻인 셈이다.
그 전에 자신이 한 발 앞서 움직일 생각이라는 뜻!
“마음으로 보았다라……!”
한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또한 노걸인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적잖은 의혹을 느낄 것인데, 듣자 바로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은은한 자광이 비치는 눈으로 추룡을 보며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
“얼음과 불이 함께 한 곳에 공존했던 것이군. 참으로 드문 일인 것인데……. 하나 더러는 마음으로 보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지.”
턱을 주억였다.
“흡사 하늘이 천하에 복을 내린 듯하군. 그렇다면 마음 놓고 돌아가도 될 것 같네. 하나 그냥 가긴 서운하고, 기왕 왔으니 천하에 명성 높은 막 장군의 술수를 견식하고 싶은데 그것을 좀 보여 줄 수 있겠나?”
멈칫, 숙여진 추룡의 눈이 다시 한 번 크게 치켜뜨여졌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이것은 또한 예사의 일이 아니었다.
천 외 천이라 했듯 이 노걸인이 자신이 생각해 낸 사람이 맞다면 그는 실로 보통의 사람이 아닌 것인데, 그가 자신에게 겨룸을 청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천하에서 다시없는 영광이었다.
하지만 추룡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만한 인물이 실없이 자신에게 비무 따위를 청할 이유가 없는 만큼 이것은 시험인 셈이었다.
자신의 실력을 보고자 하는 것. 하나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일에 차질이 빚어짐은 물론 막여사에게도 큰 누累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회피한다는 것도 뭣한 상태였고……. 망설였지만 추룡은 곧 심호흡과 함께 고개를 들어 급기야 노걸인을 깊숙이 응시했다.
솔직히 그도 알고 싶었다! ‘막여사를 능가하는 유일한!’ 분명 여기가 절정이었다.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해도 그 위에 더는 없었다. 그렇다면 부족하더라도…… 기회에 부친의 군위검에 대한 척도와 자신의 기량을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에 비하자면 어차피 자신은 코흘리개 어린아이도 아니었으니.
“뵙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복이온데, 하찮은 제가 이인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몇 생生을 가도 얻기 어려운 영관일 것입니다. 하나 말학의 능력은 부친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미흡한 점을 감안해 주시겠사옵니까?”
깊숙이 가라앉은 눈!
불같은 정광이 흐르기 시작했다.
몽마를 상대할 때는 물론 정명들이나 왕평, 유곡, 한상필을 대할 때도 이 정도의 눈빛은 아니었다.
극한의 힘을 사용할 기세였다.
노걸인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어찌 자네를 부친에게 비교하겠는가. 하나 그와는 인연이 없으니 늙은 거지는 이참에 그저 무늬라도 보고 싶은 걸세.”
한데 그와 함께 노걸인은 또 한 번, 전혀 뜻밖의 모습을 보였다.
“그대들은 잠시 뒤로 물러서 주게.”
추룡의 실력을 파악하고자 겨룸을 청하는 듯했던 그가 홀연 부복하고 있던 정명, 벽허 등을 십여 장 밖으로 물러서게 한 후 자신 역시 사오 장가량 물러서더니 느릿하게 어떤 동작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주 특이한 동작으로서 발 간격을 어깨너비로 하고 약간 무릎을 구부린 기마식의 자세를 취한 후 솥뚜껑만 한 양손을 아래위로 엇갈아 천천히 휘젓기 시작한 것이었다.
상하에서 미묘한 곡선을 그리는 반원! 두 개의 손이 엇갈려 돌아가고 있으므로 커다란 태극太極의 모양새를 이룬 형상이었다.
느린 듯 부드럽게 휘돌아 가는 양손의 움직임 속에 음양의 조화가 있고 숨이 막힐 듯한 막중한 정기가 서려 보이는 동작!
느릿하게 보법도 함께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전진하고 나아감이 물의 흐름과 같이 부드럽고 큰 보폭인 것 같으면서도 세 걸음 이상을 떼지 않아 짧았으며, 어느 방향을 향하든 양손은 상하에서 반원, 미묘하게 곡선을 그리며 태극을 이루었다.
유연함 속에 터질 듯한 긴장감이 함축되어 있고, 온유함 속에 폭풍을 감춘 듯한 기운이 있었다.
내공이 극치에 이르면 손에서 폭풍 같은 기화(氣火-장력)가 뻗어 나온다는 게 허풍 같은 무림의 속설이지만 허언이 아니라 이 걸인의 손에서는 정말 산악이라도 날려 버릴 듯한 장력이 뻗어 나올 것만 같다.
그야말로 손끝에서 폭발적인 압박감이 느껴지는 모습.
‘설마!’
순간 추룡은 멈칫, 자신도 모르게 한 번 더 눈을 크게 치켜뜨고 말았다.
‘논무?’
바로 그러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는 노걸인이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자 비무 형식으로 겨룸을 청한 것인 줄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걸인이 자신을 키워 주려고 하는 것이다! 비무가 아니라 논무성의 겨룸! 전날 정명 등이 그러했듯 가진 것을 자신에게 주려고 하는 것!
그렇다면 그가 선보이고 있는 것은…… 천하 무림에 살아 있는 전설이 되어 있는 어떤 수법인 게 분명했다.
시험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다는 것!
추룡은 퍼뜩, 정신을 챙겨 즉시 마음을 비우고 노걸인의 수법을 머릿속에 암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설이라 했듯 수법은 암기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노걸인은 이각여에 걸쳐 같은 수법을 세 번이나 느릿하게 시전해 보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분명히 동작은 같았으나 시전하는 수법은 세 번이 모두 달라 보였던 것이다.
시작과 끝이 모두 같다 할 정도로 유연함의 극치인 움직임으로서 진퇴하는 보법이나 태극을 그리는 팔의 형상은 같았지만 그 태극이 세 번 모두 달라 보였던 것이다.
크고 작고와 아주 조금 빠르고 느리고에서 내용이 달라졌던 것인데, 차이가 완전히 하늘과 땅이라 할 정도로서 크게 원을 그릴 때는 흡사 태극의 기세가 하늘을 덮을 듯 커 보였고, 작게 원을 그릴 때는 바늘귀 속으로라도 들어갈 정도로 작게 느껴졌던 것이다.
한 수법을 어떻게 수련해야 이런 형상이 이루어질까!
춘추대회에 출전하기 전, 격렬하게 말을 타고 실전에 가까운 겨룸을 하면서도 붕거창법을 훔쳤을 정도로 무예라면 어지간히 정수를 꿰뚫는 추룡조차도 핵심을 이해하기 어려워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그런 사이 세 번의 시전을 해 보인 노걸인은 이윽고 손을 멈추며 말문을 열었다.
“보잘것없는 늙은 거지가 지닌 수법은 이뿐일세. 허물하지 말아 줬으면 고맙겠네.”
겸례였지만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정사 양도의 무림, 마魔까지 합쳐 삼도를 다 뒤져도 그의 실력을 흠잡을 사람은 천하에 있을 수 없었다.
“일천한 후진에게 어찌 그런 말씀을!”
추룡은 배우는 자세로서 무조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크아아압!”
다음은 그의 차례였다. 한 치도 마음을 흩뜨리지 않고 인사와 함께 바로 ‘쩡!’ 하는 포효와 함께 불같이 눈을 번쩍이며 그 특유의 남평격권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르고 휘두르고 막고 차고 하는 속도와 힘의 격권!
노도인의 술수가 미풍이라면 추룡의 격권은 폭풍이었으며, 추룡의 격권이 노도라면 노걸인의 술수는 대하大河와 같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오묘한 이치는, 노도와 대하라 할 정도로 두 사람이 다 상상치도 못할 큰 힘이 함축된 기예를 시전했지만, 일반의 눈에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음으로 보지 못하면 모두 실實이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유연한 움직임으로 하늘을 덮을 듯한 태극을 그렸던 노걸인이지만 막상 옆에서 보면 하늘은커녕 그냥 오락가락, 전후좌우, 세 걸음의 반경 안에서 걸음을 떼며 태극의 문양으로 양손을 휘저은 것에 지나지 않았고, 추룡의 경우 역시 군부에서 누구나 수련하는 권법인 격권, 그것을 시전해 보인 것에 지나지 않는 형상이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그런 동작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이런 동작들이 노도, 대하, 혹은 하늘을 덮는 듯한 힘을 보이는 것은 그 기운이 전해지는 마주 선 사람에 한하는 것이다.
정명 등 여러 사람이 두 사람의 수법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은 이 엄중함을 알 수 없다는 것.
“남평격권!”
그런 속에 세 번, 추룡은 연속해 격권을 전개해 보인 후 이윽고 기본 공격세를 잡았다.
강하게 주먹을 틀어잡고 기마세로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해 발을 어깨너비에 놓은 후, 왼 주먹을 아래로 늘어뜨려 급소를 가리고 오른 주먹을 겨드랑이 아래에 놓는 그 특유의 자세였다.
끝까지 지켜본 노걸인은 이런 추룡의 모습을 은은한 자광이 뻗어 나오는 눈으로 보며 매우 좋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여 칭송했다.
“훌륭하군. 역대로부터 천하를 좌우해 온 것이 군부인 만큼 누구라도 군부의 무예를 약하다 할 수 없을 것이지만, 경지에 이르니 역시 진면모가 보이고 있어. 산 같은 위압감에 움직임 하나하나가 회오리를 일으키는 듯하니 그야말로 천왕을 보는 것 같네.”
스으읏, 노걸인은 다시 양손을 휘저어 태극을 그리며 보이지 않는 원을 잡듯 한 자세를 취했다.
“그럼 나눈 것을 시험해 보기로 하세. 선수를 양보하겠네.”
“감사드립니다.”
추룡은 사양하지 않았다. 노걸인은 자신을 칭송하고 있었지만 과할 뿐, 역시 그에 비하면 자신은 코흘리개 어린아이도 아닌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기본자세 그대로 공처럼 탄력 있게 몸에 유동을 주며 왼발, 왼발, 천천히 왼발을 앞으로 하여 반걸음씩, 최대한 신중히 노걸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노걸인은 양팔을 반을 뻗은 형상으로서 처음 그대로 원을 비스듬히 잡듯 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
그러나 결코 함부로 쳐 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대로라도 노걸인의 모습은 폭발적인 잠력이 뻗어 나오는 형세였고, 기이하게도 추룡의 눈에는 정지되어 있는 그의 손이 계속 거대한 태극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정확히 전날 친구들이 처음 추룡과 맞섰을 때 목검에 모습이 가려지듯 한 그런 엄청난 위압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추룡은 기백을 보였다.
일반이라면 숨이 막힐 듯 뻗어 나오는 이 위압감 하나만으로도 비지땀을 흘릴 것이었지만 이를 이겨 내고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 차에 노걸인을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저 거대한 태극을 부숴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네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마침내 조금씩 접근해 가던 간격이 두 걸음까지 좁혀졌을 때!
“하아아압!”
마침내 회오리 같은 추룡 특유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거리가 이르자 ‘쩡!’ 하는 외침과 함께 번개같이 오른발을 앞으로 디디며 쉭, 왼발을 휘저어 노걸인의 다소 앞으로 나온 왼쪽 다리의 무릎관절 옆을 후려 차 간 것이었다.
하체 공격!
드문 공격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누군가와 싸움을 벌일 때 우선 얼굴 쪽을 노리는 게 보통이고, 다음이 몸통의 급소이기 마련으로 이렇게 하체부터 공격하는 경우는 드문 것이었다.
상당한 예외성을 가진 공격인 것인데, 그러나 예외성을 가진 만큼 이 공격은 실제 매우 큰 효과를 가진다. 무릎의 관절부위가 결코 쉬운 급소가 아닌 것으로 제대로 격중되면 관절이 어긋나 주저앉게 되며, 아니라도 한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하면 최소한 중심이 허물어질 수도 있고!
추룡으로서도 처음 시도한 것으로서 그만치 경계심을 곧추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좋군.”
하지만 노걸인은 일반의 상대가 아니었다.
신중을 기해 그렇게 돌발 공격을 감행했음에도 전혀 당황치 않고 슬쩍 왼발을 뒤로 빼 간단히 공격을 피했던 것!
“하-!”
그러나 회오리라 했듯 추룡의 재공격은 즉각 이어졌다.
그런 한 수로 이 거인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은 터, 공격이 빗나간다 싶은 순간 바로 휘두른 왼발과 함께 휙, 몸을 돌리며 벼락같이 오른발을 날려 대룡파미! 노걸인의 가슴을 걷어차는 연속 차기를 감행했던 것이다.
한 호흡에 동작이 이어진 불꽃같은 퇴법!
그러나 노걸인 역시 이 또한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