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도모圖謀 (2)
악충보의 무사들도 망설이지 않았다.
일찌감치 이웃과 지역을 위해 헌신해 왔던 그들! 오랫동안 정세를 지켜봄으로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판단하지 못한 게 아닌 터라 또한 우측으로 몰려섰다.
한 덩어리가 되다 보니 좌측이라는 게 없었다.
“반드시 우리는 이길 것이다! 곧 출정할 것이니 만반의 채비를 해 두라!”
파파파파.
포권으로 사의를 표시해 보이며 악불비는 몸을 돌렸고, 오래잖아 빗속을 뚫고 도처로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악불비가 보내는 것도 있었지만 핵심인 것은 추룡이 보내는 것이었다.
가진 것 없는 백두의 청년이 날려 보내는 전서구.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무슨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 들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실로 대단했다.
“북행이라……!”
첫 번째 전서구를 받은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셈이군.”
불안도 하고 망설여지는 심정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물에 고기가 놀기 어렵다고, 이보다 어리석은 결정은 없을 것인데 말이지. 하나 지금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으니…… 힘을 총동원해서 도와라.”
“명!”
그 역시 도처로 바로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설마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지만 그가 하는 마지막 일이었다. 이제 그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두 번째 전서구를 받은 그들 역시 크게 긴장했다.
“어려운 일이거늘…… 가능하겠는가?”
보낸 서찰들은 내용이 모두 유사한 것이었는데, 속에는 실로 뜻밖이라 할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실행 불가능하다 할 그런.
앞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거라. 도연이 그에게 운명을 걸었으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잘못된 단추는 다시 꿰어야 하고 이것으로 어제 못다 한 일을 마치는 것이다.”
“명!”
강철의 몸을 지닌 승려들이 무섭게 눈을 번쩍였다.
또 전서구가 하늘을 날았다.
세 번째 전서구를 받은 그가 가장 핵심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필사적인 몸짓으로 부친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또 하나의 그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천 년을 선조들께서 겪었고, 나 역시 평생을 겪었다만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들이 한족이다! 돕는다고 그들이 눈이나 깜박하겠느냐? 지금까지 핍박받으며 등을 돌리고 살았던 우리가 오늘날 부질없는 일에 휘말려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마음은 알겠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부친을 설득했다.
“물론 그들을 믿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유사 이래 한 것이 없으니 시험 삼아서라도 한번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루어진다면 마침내 우리도 어엿한 무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자는 그의 판단을 믿습니다! 아버님께서도 막 장군님은 믿지 않으십니까?”
그의 마음이 다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시험이라는 것에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종족이 몰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느 수장이라도 이런 모험을 하지는 않는 것이다. 한다면 자격이 없는 것이지.”
“반대로 흥할 수도 있습니다! 출로가 없는 막힌 길에서 언제까지 이만 갈고 살아야 할 것입니까? 흥망을 걸지 않고는 돌파해 나갈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생각을 돌려주셨으면 싶습니다!”
무릎을 꿇었다.
“사실 오랫동안 싸워 오지 않았습니까. 그 천 년에 수도 없이 많은 일족이 희생되었사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덧없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 천하에 영향을 미친 적도 없었사옵고, 일족의 앞날을 생각해 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헤아리자면 수백만이 죽었사온데, 한 번쯤은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쟁취하기 위해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필생의 소원이오니 들어주십시오!”
그의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사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싸워 왔다. 시마다 싸웠고, 해마다 싸웠으며, 그 피가 바다를 이룰 지경이었으나 앞으로도 계속 싸워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싸움들은 덧없었다.
천하사와 상관없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으로 결과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강인함에 경계심만 더했을 뿐, 주위는 좋게 여기지 않았고 그럼으로 더욱 큰 벽에 둘러싸여야 했다.
수천수만 번을 싸우고도 손해만 본 상태에 한 번으로 이 벽을 부수고 흥할 수 있다면……!
그 수만 번의 싸움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그는 눈을 번쩍이며 계속 말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경쟁이 있고, 경쟁의 끝에는 늘 승자와 패자, 희생자가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다 생각합니다. 승자는 노력으로 쟁취하였으므로 아름다운 것이며, 패했을지언정 이루기 위해 사력을 다함으로 패자 또한 아름답다 생각합니다. 안타까우나 참여해 소신을 지니고 함께 싸웠으니 희생자 역시 아름답습니다. 모두가 자신들이 머문 세계의 주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주인들.
“그러나 한 세계에 살면서도 상이한 사람들이 있는데, 방관자가 그들입니다. 방관자는 영원히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언제나 저 하나만 생각하며, 눈치만 살피는 것입니다. 소자는 우리 일족이 결코 그렇게 비루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선 방관자입니다. 그리하여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보고 있는데, 진정으로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라면 주인의 면모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적 같은 도적이 집안을 거덜 내려 하는데 말입니다!”
황적黃敵! 황자징.
일찌감치 어떤 정의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
피식! 이야기를 들은 그의 입가에 실소가 떠올랐다.
“입만 커진 것 같군. 천하를 다 뒤져도 그를 이렇게 일컫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것이다.”
오락가락 뒷짐을 진 채 한참 서성였다.
“하지만 그자가 황적이라는 것에는 나도 동의한다. 역사를 다 뒤져도 이런 기도 안 찰 벼슬아치는 없었지. 그러나 주인 행세라는 것에 대해서는……!”
짜증스럽다는 듯 소리쳤다.
“도무지 왜 이런 미친 짓을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라는 것만큼은 틀림없으니, 정히 그렇다면 한 번만 그 ‘행세’라는 것을 해 보기로 하자!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차기 토사의 의견을 존중해 하는 것이다! 하나 일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들어 보고 계획이 부실하다면 참여치 않겠다!”
“아버지!”
순간 그의 커다란 눈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존경하는 친구.
그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결코 크지 않았다. 크다 해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옳았으며, 돌아와 그는 노력했다. 쉴 새 없이 수련했고, 소홀함 없이 맡은 일을 했으며 주위에 충실했다.
결실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다시 푸른 매가 바쁜 날갯짓을 하며 창공으로 치솟았고, 천 리를 날아 십왕봉으로 돌아갔다.
연화봉.
추룡은 가파른 봉우리의 정상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하아아압-!”
쉭! 쉭! 쉭!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왔다.
새도 날아오르기 힘든 황산의 최고봉이건만 평지를 밟듯 빛살처럼 신형을 솟구치며 뛰어오르는 인영들.
먼저 도착한 것은 다섯 명의 승려였다.
“사제.”
죽장에 죽립을 눌러쓴 회색 승의를 입은 정명, 정어, 정견, 정정, 정업!
소림사의 철인들.
“와 주셨군요.”
“반갑네. 설마 이런 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몽마 사건으로 처음 악충보를 찾아왔을 때나 다름없이 굳어진 표정이었다.
추룡 역시 편한 표정은 아니었다.
나타나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진중히 포권을 취했다.
“장문인 및 다들 평강하신지요?”
“잘 지내고 있네. 사제는 어찌 지냈나?”
“편안히 지냈습니다. 송구스럽게도 사형들께 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정명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들었다.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군. 계획은 잡혔느냐?”
추룡은 거두절미하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와 계십니다. 산채로 가시지요.”
“여기에는? 우리들 외에는 아직 안 왔던가?”
그들 외.
추룡은 고개를 저었다.
“사형들 외에 오실 분이 없습니다.”
정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청한 벗이 있다. 잠시 기다려 보자.”
추룡은 일순 멈칫하는 표정이 되었으나 침착하게 질문했다.
“설마 타에 말씀을 전한 것입니까?”
정업이 대신 대답했다.
“믿어도 될 사람들일세.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의지를 지녔네. 피치 못해 한 일이나 회안에서 연왕 전하를 호위했던 사람들이지.”
회안에서 연왕.
추룡은 한 번 더 멈칫하는 기색이 되었다.
회안에서 연왕이라면 홍무제의 장례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비어 있었던 마차!
“어떤 분들이신가요?”
정명이 다시 말을 받았다.
“온다고 했으니 올 것이지만 여부를 알 수 없으니 기다려 보자. 오지 않을 것 같으면 말할 필요가 없지. 우리들 역시 내용을 삼갔으니.”
“받들겠습니다.”
추룡은 고개를 끄덕였고, 정명, 정업 등은 이 말을 끝으로 눈에 정광을 이글거리며 엄호하듯 주위에 둘러섰다.
천하의 명운이 걸린 일.
미루어 추룡이 보낸 전서구 중 하나는 소림으로 향한 것임을 알 수 있었고, 여기에 응해 소림에서 또 누군가를 청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전을 기해 내용을 전하지 않았음도 알 수 있고.
그렇다면 확실히 아직은 말할 상태가 아닌 것이었다. 추룡이 정명 등을 청했다거나 그들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도 사실 의외성이 적잖은 상태였는데, 오지 않을 사람을 들먹일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만치 일이 엄중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이각여.
“흐아아압!”
황산의 최고봉에 또다시 쩌렁한 외침이 터지며 쉭, 쉭, 쉭! 과연 또 다른 일곱 줄기의 인영들이 빛살처럼 암벽을 박차며 구름처럼 치솟아 올랐다.
정명 등이 청한 사람들 같았다.
한데 나타난 그들의 모습이 실로 놀라웠다.
형제로서 이젠 친숙해 있기에 정명 등은 언제 만나도 추룡에게 새삼스럽지 않지만 그러나 일반에 있어서는 놀라움의 대상인데, 나타난 인물들이 결코 그들에 못지않은 내력을 지녔던 것이다.
가파른 연화봉의 직벽을 새처럼 치고 올라오는 내공신법도 일반으로는 상상하기 어렵고, 올라와 보인 대단한 기도도 그러했다.
문삼 같은 형식의 남색 도복에 남색 도건을 쓴 오십 대에서 사십 대의 일곱 도인들!
공력을 일으켜 절봉으로 쏘아 왔으니 그럴 수밖에도 없겠지만 번쩍이는 눈빛들이 하나같이 비수 같고 화등 같다.
바람도 없는데 뻗어 나오는 잠력에 도포 자락이 절로 나부끼는 느낌이 들었고, 꼿꼿이 선 자세들이 하나같이 산을 느끼게 할 정도로 웅위해 보이는 것이었다.
‘설마?’
추룡은 다시 멈칫하는 기색을 보이고 말았다. 이런 복장을 한 도인들이 어느 유파의 사람들인지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라 혼란이 빚어졌다.
그가 아는 한 이들이 이곳에 올 가능성은 백에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뜻밖에도 그 백에 하나가 맞는 것 같았다.
“아미타불……!”
올라오자 정명이 합장을 하며 아는 내색을 했다.
“오셨구려. 모처럼 존안을 뵙겠소이다.”
그러자 정명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쉰 초반의 길쭉한 매의 눈에 강퍅한 인상을 지닌 도인이 마주 읍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소이다. 별래무양 하셨던지?”
“덕분에. 설마 진인들께서 모두 오실 줄은 몰랐구려.”
“장문인께서 미거한 사람들을 청하셨을 정도로 일이 엄중한데 어찌 방심할 수 있겠소이까.”
응안鷹眼의 도인은 대답과 함께 바로 시선을 추룡에게로 가져갔다.
“옆의 대협께서 막 시주이신가 보구려.”
정명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추룡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인사 나누게, 사제. 무당의 칠성진인七星眞人이실세. 각기 벽허碧虛, 벽진碧眞, 벽관碧觀, 벽오碧俉, 벽신碧晨, 벽정碧正, 벽고碧高라는 법명을 쓰고 계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