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도모圖謀 (1)
후두둑, 후둑!
금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늘 안개와 구름에 휩싸여 있는 황산의 특징으로 오월(음력)이 되었으니 우기가 시작될 때도 되었다.
그러나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추룡도 주고치도 유곡, 맹광도 어둠 속에서 굳어져 버린 듯 아무도 움직이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와 달라.
무엇을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 하나뿐인 추룡이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고사하고 지금 상황에 내전으로 뛰어드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기나 할까?
오랜 시간.
빗방울이 굵어질 즈음, 굳은 듯 한 무릎을 꿇고 있던 그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두의 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모르겠사오나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돌같이 굳은 표정, 어둠 속의 눈이 불이 붙는 듯했지만 아는지조차 모르겠고, 주첨기와 유곡, 맹광은 잠자코 따랐다.
도연이 보내서 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여기에 왜 온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잠시 후, 이윽고 산채 속 거처에 도착한 네 사람은 관솔불이 흔들리는 탁자 주위에 둘러앉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산채의 목옥木屋 속은 흙바닥에 나무 탁자, 옷 궤짝 하나, 나무로 된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정도로 조촐했다.
주의를 기울여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추룡이었다.
“전황戰況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인山人이 되다시피 한 몸이라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군요. 어떤 상태인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유곡에게 물은 것으로, 그가 대답했다.
“어려운 상태일세. 전하께서는 현재 양주까지 진격해 와 계시네. 하지만 점령하며 온 것이 아니라 우회하여 남하하신 것일세. 소모전이 계속되어 언제 싸움이 끝날지 모른다 판단하셔서 바로 금릉을 치기로 결심하신 느낌이야. 북쪽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네. 끊임없이 공격을 계속해 오던 벤야시리가 갑작스레 소강상태를 보여. 그렇다고 군을 철수시킨 것도 아니고. 포기하지 않은 것인 이상 필경 다른 속셈을 가졌다고 봐야 하네.”
무겁게 말을 이었다.
“동부의 군력을 빼돌릴 생각으로 그러고 있다면 크게 위험하네. 막으려면 무조건 내전이 끝나야 하는 걸세. 감안하여 전하께서도 단행하신 듯하지만 장강에서 막혔어. 이십만을 이끌고 오셨고, 양주를 치며 오만가량이 전사했네. 성용군은 이십삼만으로 장강 남쪽을 봉쇄하고 있네. 장강수군까지 이십사오만 정도일세.”
돌아갈 수도 없고 정면충돌로도 승산이 없는 상태.
방치하고 온 북부의 병력까지 압박해 내려온다면 그때는 완전히 끝이었다.
유곡조차 뭐라고 말을 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궁실 쪽은?”
“정상인 상태라면 피신해야 할 것이지만, 이길 것이라 보고 움직이지 않고 있네. 금천문 등 팔 문을 봉쇄하고 부녀자와 아이들을 잡아 황궁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있다는 소문일세.”
“부녀자와 아이들을 방어벽으로 삼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걸세. 무엇이라 할 말이 없어.”
한마디로 기가 꽉 막힐 일인 것이었다. 황제란 사람이 힘없는 부녀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삼았다는 것. 포격을 가하지 못하게 하자는 뜻이다.
추룡의 뇌리에 많은 것이 떠올랐다.
봉황산, 구곡하, 적낭자, 친구들, 악충보, 막여사, 장완옥, 악벽강.
그가 가진 모든 것.
심호흡을 하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늦었으니 쉬시지요. 누추한 곳이라 ‘편히’라는 말씀조차 올리지 못하겠나이다.”
번쩍이던 눈빛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가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장완옥이었다.
“송구하오나 어머니, 소자가 싸움터로 나가고자 합니다. 모쪼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자시가 넘어가는 시각. 장완옥 역시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난 터였는데, 찾아온 아들을 본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까닭을 말해 보거라.”
“우선 북평왕부의 쪽에 서고자 합니다. 까닭은 소자가 보아 온 관료들의 행악이 여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황실의 법통을 따른다고 하고 있으나 자신들이 유리할 때만 들먹일 뿐, 바르게 지키지 않았고, 죄 없는 장수들을 잡아 단근질을 하는 등 어린 천자를 부추겨 골육상잔을 일으키고 달단까지 끌어들여 마침내 대란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이미 백만에 달하는 인명이 이슬로 스러졌다 들었습니다.”
행악 중의 행악.
“북평을 옹호하는 소자의 마음이 사사로운 것일지 모르겠사오나, 황자징 등은 오래전에 처벌받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학자가 아닌 권력에 눈이 먼 무뢰배에 전범들일 뿐입니다. 부녀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궁실 주위에 방벽까지 쳤다고 합니다.”
흥분하지 않고 차근차근 소신을 이야기했다.
“말로만 백성이지 결코 백성을 위하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자들로서 이런 자들이 다스려 나라가 바로 돌아갈 리 없습니다. 소자는 나라의 주인을 백성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법과 정치가 있는 것이지 일부 권력자들을 위해 있는 정치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숙고한바, 아버지께서 소자를 여기에 둔 것에는 뜻이 있다고 보았사오나 숙고하여 의지에 따르고자 하니 부디 허락해 주셨으면 싶습니다.”
막여사가 추룡을 남긴 뜻.
그러자 놀라운 일이 있었다.
지금까지 추룡을 잡아 혼란에 휘말리지 않게 했던 장완옥!
막여사에게조차 못 가게 했던 그녀의 고개가 뜻밖이라 할 정도로 끄덕여진 것이었다.
“오랫동안 잘 참아 주었다. 긴 시간 지켜보며 생각하여 한 결정이 그르지 않을 것이다. 남아 스물다섯이면 대장부거니와 뜻을 세울 때가 되었다. 신념에 따르거라.”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추룡은 장완옥에게 큰절을 올렸다.
참 멋진 어머니.
달리 더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완옥 외에도 그의 주위에는 스승이 많았다.
장인이 될 인물이라고는 하나 평소 한마디도 않고 지내던 악불비.
장완옥을 만난 추룡은 그를 찾았는데, 마찬가지로 싫은 기색 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추룡을 맞았다.
“싸움에 가담, 북평 쪽에 서려 한다고?”
묻고 있는 표정이 매우 담담했다.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산채로 오기 전 분명히 아버지와 어떤 이야기가 있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내용과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소자 반드시 그리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크흠……! 이야기는 무슨.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그냥 의지대로 하라는 정도셨지.”
뭔가 숨기는 기색으로 헛기침부터 한 후 말문을 열었다.
“어쨌거나 이유나 한번 들어 보자. 솔직히 나는 어느 쪽의 편도 아니다. 어쩌다 장 도사를 사위로 뒀을 뿐인 사람이지.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거니와 알았다면 서희가 발목을 잡고 매달려도 허락지 않았을 것이다. 휘말려 피신해 있지만 지금도 내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장신을 사위로 뒀을 뿐인 그.
틀리지 않았다.
전후의 사정을 다 살펴봐도 그는 권력과 무관하게 지내온 인물로서 그냥 휘주 향용의 수뇌일 뿐이었다.
“사돈께 송구할 뿐, 나 하나로 부질없는 정쟁에 수하들을 희생시킬 이유가 없고,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싸움이 현재 고비에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 어느 쪽이 이기건 여기에서 승패가 날 것이라 보는데, 작은 힘 하나가 저울을 건드려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도 있지. 삼가야 할 일이거니와, 북평을 도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삼자라면 나서야 할 필요가 없었다.
현 상태를 보면 남은 싸움으로 천하의 풍운은 갈라진다.
조정이 이기든 주체가 이기든 거의 여기에서 승부가 나고 내란은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한데 여기에서 잘못 저울추를 건드려 놓으면 싸움은 또 새로 시작될 수 있었다.
가령 주체가 패한다고 볼 때 누군가가 그를 살려 북평으로 돌려보내면 싸움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가능할지조차 모르겠지만 주체를 도와 이기게 한다 해도 문제가 많았다. 그의 행동에 따라 만고의 역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패할 경우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 것 같으면 역시 나서지 않는 게 현명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추룡은 분명히 대답했다.
“연왕 전하를 도우려는 뜻이 아닙니다. 부족한 견해이오나 현재의 정권이 안 된다 생각해 나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숙고한 일입니다.”
주체를 돕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권이 아니라 생각해 나서고자 한다.
악불비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그 말은 연왕이 패해도 싸울 것이라 들리는데?”
추룡은 확고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사견私見이지만 황자징 일파는 용서치 못할 무리라 생각합니다. 오래전에 처벌받았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처벌할 법도 도리도 없습니다. 우선 남기어 될 자들이 아니라 나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 치고, 만에 하나 연왕이 이겨 그들을 처벌한다 치더라도 그가 나라를 망치면?”
추룡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지금으로써는 믿을 수밖에 없사오나 결자해지로서 그때는 연왕을 칠 것입니다. 소자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연왕이 불의하면 그때는 또 연왕을 칠 것이다!
대단했다.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해도 이런 말을 할 사람은 드물다.
맑은 정광이 번지는 눈.
“크흐흐흠!”
악불비는 눈길을 피하며 못 이기는 척 딴청을 부렸다.
“딸이 둘이 있지만 사위에 사윗감인 녀석들이 하나같이 골치 아프구나! 죽을 각오까지 했다니 말린들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알겠다. 벽강이 우는 꼴을 볼 수 없으니 정히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하마. 무얼 어떻게 할 것인지 세부 안을 세워 가지고 오도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절대 나서지 않겠다.”
“감사드립니다, 아버님!”
매사 어물어물하는 악불비 같았지만 대협으로서 분명히 그 역시 소신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추룡의 뜻이 답이 되었다는 것으로서 마찬가지로 죽을 각오를 했다는 뜻!
어영부영했지만 날 밝은 후 그의 본심은 더욱 확실히 밝혀졌다. 주룩주룩, 비가 그치지 않는 속에 악불비는 산채 아래의 분지에 악충보의 무사들 및 피신해 온 장정들을 집결시키고 말을 꺼냈다.
정규 무사가 천, 수효는 도합 삼천오백에 육박했다.
“천하에 난변이 발생해 오랫동안 황산 속 깊이 들어와 생활한바, 마침내 천하의 운명이 향방을 정할 기점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북평군이 장강 앞에서 조정군과 대치하고 있거니와, 이기면 천하의 대세는 북평으로 넘어가고 지면 현행대로 조정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내 지켜본바, 지금 황상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이 하는 짓은 바르지 않았다. 이런 자들이 천하를 휘어잡으면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겠거니와, 악충보의 근본이 보국報國과 백성들을 위하는 것에 있으니, 마침내 선조의 유시에 따르고자 한다! 뜻을 함께할 사람은 우측에 서고 아닌 사람은 좌측에 서라! 지역과 양민을 지키는 향용의 한 사람으로서 냉정히 판단하여 결정해야 할 것이다!”
큰 술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잠시일 뿐, 모두의 눈빛이 번뜩이는 속에 향방은 빠르게 정해지고 있었다.
“악충보가 아니었다면 징병으로 끌려가서 오래전에 시체가 되었을지 모를 몸이올시다! 어린 천자를 부추겨 골육상잔을 하게 한 대신들이 한 짓은 자식들이 배울까 두려울 정도의 소행이고, 위한다는 백성들은 벽지로 쫓겨 여기에 있으니 이게 바로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 아니겠소이까! 보주께서 뜻을 세우셨다면 싸우겠소이다!”
제일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피신해 들어온 지역민들이었다.
악충보의 무사들도 무사지만 실제로 이 시기,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도처의 양민들이었는데, 도무지 자신들이 왜 여기에 와서 지내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조차 없다.
난이 끝나도 징병을 피해 달아났다는 죄명으로 숨어 살아야 할 처지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우측으로 몰려섰다.
이천 명이 넘었고, 피신해 들어와 무예까지 수련함으로 싸울 준비까지 된 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