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북평에서 온 사신 (6)
하지만 더 나은 의견이 없어 건문제는 즉시 칙서를 써 경성군주慶成郡主를 사신으로 삼아 주체에게 보냈다. 주체의 사촌 누이인 옹주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경성군주가 당도하기도 전에 더 먼저 또 누군가가 사실을 폭로하는 전서를 보내 주체는 한발 앞서 계책임을 알았다.
아니라 해도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당도했는데 그냥 돌아갈 사람도 없다.
특히 설암이 사자로 왔을 당시 거짓 화친 제의로 한번 속은 바 있었고, 여전히 황자징과 제태가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는 만큼 그들이 정말 중원을 둘로 나눠 자신에게 주려 할 리도 없었다.
모처럼 사촌 누이를 본 주체는 눈자위가 빨갛게 달아올랐으나 할지론을 거절했다.
“거병 당시에도 밝혔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폐하의 총명을 어지럽히는 역신들을 처단하는 것일 뿐입니다. 부황께서 주신 영지마저도 바르게 지키지 못하고 있는 터에 더 땅을 준다 해도 주체하기 어렵습니다. 입성하여 간신들을 소탕하고 부황의 묘소에 성묘한 후 폐하를 알현한 다음에는 곧 돌아갈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간신들이 할지를 조건으로 진격을 막아 화를 피한 후 공세를 펼칠 속셈인가 보지만 그런 꾀에 속지는 않습니다. 돌아가셔서 폐하께 뜻을 전해 주십시오.”
경성군주 역시 눈물만 흘리다가 돌아갔다.
화친에 실패하고 돌아온 경성군주를 본 건문제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마침내 스무 살이 된 그. 철없던 열여섯 살 당시, 대신들의 권고에 따라 시작한 왕부 삭번이 결국 자신의 목을 조였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계책이 통하지 않으니 어찌했으면 좋겠소?”
방효유, 황자징, 제태 등 모두를 불러 다시 대책을 물었다.
그러나 방효유는 여전히 자신감을 보였다.
“장강은 백만의 병력과 맞먹는 방어 효과가 있습니다. 강 북 쪽의 배들을 모두 태워 버리게 하면 날개가 달리지 않은 한 북평군은 건너오지 못합니다. 강폭에는 장강수군이, 건너에는 성 대장군이 대군과 함께 진을 치고 있으니 심려할 게 없사옵니다.”
학자답다고나 봐야 할지, 참으로 기가 막힐 이야기였다.
말은 옳았지만 강 북쪽인 양주는 이미 주체가 점령했다. 건너가서 배를 태우는 것을 보고만 있을 주체가 아닐뿐더러, 양주를 점령하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도강할 배를 모은 것이었는데 지금에서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소신이 직접 남부로 달려가 병력을 모으겠습니다! 심려치 마소서!”
황자징과 제태도 같은 소리를 했다.
북평군이 코앞까지 닥쳐와 있는데 남부로 가서 병력을 끌고 오겠다는 것이다. 절대 주체가 강을 넘지 못할뿐더러 패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지닌 듯해 보이는 모습들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북평군은 과연 도강하기 어려운 무엇이 있었을까?
있었다.
도강할 배까지 확보했지만 장강의 건너에는 이야기대로 성용이 대군을 포진시킨 채 버티고 있었고, 전함을 대동한 장강수군이 강폭을 사수하고 있는 상태였다.
건너기가 실로 쉬운 일이 아닌 것이었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적지의 한복판이라는 것! 이야기 나온 그대로 주체와 북평군은 이겨서 점령하며 남하한 게 아니라 충돌을 피해 속행으로 우회해 왔으므로 배후 및 사방에 그대로 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긴 했지만 고립된 상태나 같았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보급도 없다. 도착한 병사들은 밭에서 무 뿌리를 캐 먹어야 할 형편이었고, 쉴 새 없이 남하한 강행군에 지쳤으며 양주를 함락시키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도강에 사활을 걸고 있었던 터인데, 돌파하여 황자징 일파를 제거하면 사는 것이고, 실패하면 죽게 되는 최대의 고비에 서게 된 것이었다.
도연이 북평을 지킴으로 원기가 주체를 보좌하고 있었고, 그조차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적지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나 같사옵니다. 군량도 없고, 사월(음력)에 접어든 만큼 우기가 시작되면 회하 유역인 이곳은 늘 물이 범람하고 전염병이 만연해지는 지역입니다. 못 이기는 척 일보 후퇴한 후 전력을 가다듬어 재차 오는 것이 어떨지요?”
눈앞이 금릉인데 그만큼 상황이 최악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물러선다면? 할지론은 공염불임이 이미 드러났고, 돌아갈 때 공격해 올 시에는 도강하는 것보다 몇 배나 위험해지기까지 한다.
적지 복판에서 사방에서 협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후퇴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 저들이 곱게 우리를 보내 줄 리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왼편에 서고 진격하자는 사람은 오른편으로 서 보라.”
주체는 고개를 저으며 휘하의 장수들에게 의향을 물었다.
그러나 결과는 거의가 돌아가자는 표시로 오른쪽에 섰다.
주체는 거병 후 가장 큰 좌절감에 휩싸였다.
북평군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의욕은 좋았지만 점령 없이 너무 깊이 적지로 내려옴으로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여 도강에 성공하지 못하면 몰살을 당하게 되는 그런 상황.
어떻게든 이겨야만 살아남는 것이었는데, 싸우자는 것은 자신뿐, 병력도 부족하고, 보급도 끊겼으며, 장수들까지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것으로 이런 상태에서는 전투를 치러 봐야 막강한 장강수군을 꺾을 수 없고, 도강해도 성용의 대군에게 격패당해 물러설 곳도 없이 물귀신이 되기 쉬웠다.
이때 주체를 도와 장수들을 설득한 사람이 있었다.
“벗들이여! 저 옛날 한고조는 열 번을 싸워 아홉 번이나 패했지만 부하들과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마침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그런 인물들도 성공했는데, 거병 후 연승을 이뤄 온 우리가 여기에서 좌절해서 되겠는가! 간신 놈들의 할지론은 꿀 발림에 불과하다! 장 총령의 죽음을 기억하라! 당시에도 놈들은 거짓 항복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추살코자 해 제남을 잃고 장 장군이 전사했는데, 지금 등을 돌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죽더라도 전하를 따라 도강함이 옳다고 본다!”
철현의 계교에 휘말려 죽게 된 장옥!
장수들을 독려한 사람은 거병할 당시부터 주체의 수족으로 장옥과 함께 역투해 온 부참령(지금은 참령) 주능이었다.
장옥의 죽음을 환기한 장수들은 다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도강도 위험하지만 보급이 끊긴 상태에 돌아가는 도중 적들이 총공세를 감행해 온다면 몰살이라는 불안감이 역시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데 이때였다.
“전하! 정말 뜻밖의 일이! 북평에서 도 총사가 특사를 보내왔습니다.”
도연이 보낸 특사!
무리한 강행으로 사면초가가 된 북평군과 천하의 운을 완전히 뒤바꾸는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중부 지방에 완전히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북평군이 양주까지 진격해 옴으로 금릉 사람들은 떼 지어 피란길에 나섰고 금군들은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이를 저지했다.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수염만 희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남자들을 모두 잡아다 갑옷을 입혀 장강 앞에 세웠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관청들은 오래전에 병력이 비다시피 한 상태로 변했지만 남은 포사들은 허리만 굽지 않으면 무조건 장정들을 잡아다 다 갑옷을 입혔고,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수라장을 이룬 것이었다.
황자징과 제태는 발에 불이 붙도록 도위부로 어디로 쫓아다니며 북평군을 괴멸시킬 최고의 기회임을 역설하면서 도처의 왕부들에게 남은 병력들을 지원해 주기를 청해 달라 부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별 효과는 없었다.
왕부들은 오래전에 냉소만 머금고 있는 터로, 주체와 북평군이 저항 없이 우회해 여기까지 내려온 것도 실은 내륙의 번왕들이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이 안으로 굽어 남부 쪽의 사람들과 유학자들은 그래도 호응하는 상태였지만 먼 남부에서 여기까지 문인들이 달려오기도 벅차다.
피차 어려운 상황에서 최악의 기로岐路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손님이라고요?”
그런 속에 십왕봉의 산채!
악불비를 비롯한 악충보의 무사들은 오랫동안 피신해 오는 사람들을 살피며 숙고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추룡은 실로 뜻밖의 객客을 맞이했다.
북평군이 양주로 남하한 지 보름째 되는 날 밤, 잠자리에 든 그에게 느닷없이 계곡을 지키던 무사가 달려와 누군가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틀림없네. 세 사람인데, 기도가 다들 범상찮아. 곡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나가 보게.”
나는 새도 쉽게 들어오기 어려운 험한 북협을 지나 십왕봉까지 자신을 찾아온 사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까지 저를 찾을 만한 사람은 없는데……! 바로 나가 보겠습니다.”
서둘러 옷을 입고 십왕봉의 산채로 진입하는 곡구로 나갔다.
‘흡……?’
한데 계곡 앞에 도착하는 순간, 추룡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주저앉았다.
“오랜만일세. 그간 잘 지냈는가?”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계곡 앞에는 과연 찾아왔다는 세 사람이 초조하게 서성이며 서 있었는데, 우선 그중 한 사람은 덩치가 산만 한 거구에 화등 같은 정광이 일렁이는 부리부리한 눈, 이마에 왕 자 주름을 지닌 무시무시하게 생긴 대한이었다.
호면도황 유곡!
바로 그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자상한 용모를 지닌 호인풍의 사십 초반의 인물로서 또한 유곡과 함께 신양 영웅전에서부터 안면이 생겼던 태안농부 맹광이었다.
대단한 인물들이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추룡이 정작 놀란 것은 그들이 아닌 마지막 한 사람이었다. 세 사람 중 가장 유하고 온후함으로 가득 차 보이는 모습을 지닌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 누가 봐도 선함이 느껴지는 용모였으나 체형이 몹시 좋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서 웬 살이 그리 쪘는지, 옆으로 퍼진 모습이 일반의 두 배나 되는 그런 모습을 한 청년이었다.
누구인가?
보는 순간 추룡은 눈이 휘둥그레짐과 함께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으나 즉시 심신을 추슬러 자세를 단정히 하고 그의 앞에 한 무릎을 꿇었다.
“세자 저하!”
세자! 북평의 왕세자!
그러했다. 그는 바로 북평왕부에서 스치듯 잠깐 만난 바 있었던 주체의 장남 주고치였다.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세 보인다고 좋아하던 세손 주첨기의 아버지!
주고치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늦은 밤중에 느닷없이 찾아와서 미안하군. 도 총사가 보내어 온 것일세. 전날 북평왕부에 왔을 때 첨기는 자네를 부하로 삼겠다 하였고, 자네는 받들겠다 했는데 이를 기억하는가. 부왕께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셨네. 우리 모두와 첨기의 생사기도 하지. 마지막 고비에서 도 총사가 자네만이 해법이 될 것이라 예견했네. 도와주게.”
북평에서 온 사신使臣!
꽝-!
찌푸린 하늘에서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번갯불이 하늘을 둘로 쪼갰다. 천지의 음양이 혼돈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추룡의 눈에서 찰나 시퍼런 불줄기가 ‘쭉!’ 나왔다.
모습을 보인 후 지금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불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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