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북평에서 온 사신 (4)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버린 몸이니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섬서군이나 지원해. 말 그대로 장성이 무너지면 끝장이니. 형주의 조 안찰사에게도 일러라. 우리가 살길도 그뿐인 거다!”
“명!”
도위부는 계속 침묵했다.
황제를 휘어잡아 패장에게도 상을 주는 세상에, 도위부의 인선까지 멋대로 하는 판국인데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나섰다가는 도위부에 밀릴 것을 두려워한 일파들이 그냥 있지도 않을 것이었고.
“점령하라! 어떻게든 올라가라!”
“와아아아아!”
콰차차창!
“으아아악!”
피가 튀고 살이 튀고.
도깨비 장난 같은 내전 속에 같은 시간에도 군도산 일원의 전투는 치열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힘내라! 어떻게든 막아 내야만 한다!”
“흐아아아!”
콰창-!
“아아아아악!”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 날이 풀리면서 계곡을 막았던 눈이 녹자 전력을 보강한 북원군이 더욱 무섭게 공격을 감행해 오기 시작했던 것으로 군도산 주위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핏물은 끊임없이 가파른 비탈을 타고 흘러내렸고, 지속된 포격과 화공으로 시커멓게 산이 타 이젠 나무들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정확히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 병력은 섬서군뿐으로서 악전고투를 치르고 있는 것이었다.
석천중은 대동왕부와 연합, 계속 보급물자와 지원군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래도 싸움은 쉽지가 않았다.
벤야시리가 끊임없이 동부의 전력을 끌어들여 삼십만으로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기 때문. 시체가 산을 메우다시피 했으나 그래도 개미 떼같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장정희 등에게 지휘를 맡기고 막여사도 병사들과 함께 백병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당대의 천하제일로 불리는 그!
병사들이 그를 신으로 믿고 있으므로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서라도 힘을 보여 줘야 하는 것이었다.
“크아아아압!”
콰차차차창-!
“으아아아악!”
나설 때마다 살바람을 일으키는 다섯 자의 대장검! 신위는 그대로 상상을 불허하고 있었다.
감히 그의 검을 맞받을 정도의 인물은 없었다. 마주치는 것은 적의 수장들이었지만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폭우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검영의 회오리가 일어났고, 그때마다 부딪친 자들은 누가 되건 여지없이 피를 뿌렸다.
눈을 부릅뜬 채 혼전장 속을 누비며 적장을 찾곤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장神將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추룡을 키워 낸 그의 검 역시 철저히 적의 허를 파고드는 살검으로서 감히 맞설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물러서라! 물러선다!”
“와아아아!”
맹위를 볼 때마다 병사들은 악전고투 중에도 사기가 충천했고, 선봉장들이 거꾸러질 때마다 북원군은 사기가 꺾이는 등 번번이 점령에 실패해 물러섰다.
하지만 베어도 베어도 끝도 없이 몰려오는 원군에 위험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참 짜증 나는군. 대체 어찌 된 괴물인 거야! 아무리 고지전이 힘들다 해도 삼십만으로 팔만을 넘어서지 못하더니 사십만이 되어도 여전히 지지부진이라니! 이런 멍청한 꼴이 어디 있나!”
이쯤 되면 벤야시리도 화가 꼭지까지 치밀 수밖에 없었다.
“놈들도 만만찮게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습니다. 십오만에 육박하고 있어요. 섬서 연안과 대동이 지원하고 있고, 북평까지 은근히 물자를 대는 눈치입니다. 설상가상 막여사란 놈이 워낙 설쳐 대어 병사들의 사기가 꺾이지를 않습니다.”
“주체는?”
“이경륭을 대파한 후 제남에 진을 쳤다 합니다. 참정이었던 철현이란 자가 부장들과 맞서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인데!”
벤야시리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하는 수 없다. 잠시 공격을 중단하고 와랄 녀석들에게 화친을 청해 봐라. 대를 위해 잠시 내전을 중단하기로. 동부를 완전히 준다고 해라. 다 쓰러진 상태에 싫다 하진 않을 것이니, 다짐받은 후 동부 전선의 전력을 모두 이끌고 오라!”
“명!”
잘 버텨 왔지만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 봐야 했다.
앞서도 잠깐 거론되었지만 달단의 동부 전력이 오십만! 상당수가 왔다고 해도 주력군은 그대로 와랄과 맞서 있는 터였는데, 만에 하나 와랄이 화친에 응하면 최하 삼십만이 더 보강된다는 뜻이었다.
그리되면 총병력이 무려 육칠십만. 아무리 고지전에 강군이라 해도 뚫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네 배가 넘는 병력을 막아 낼 수는 없는 것이니까.
다시 시작된 뙤약볕.
“제방을 쌓아라!”
그런 속에 도연은 제남성의 머리 위로 흐르는 황하의 지류를 막고 계곡에 거대한 보洑를 쌓기 시작했다.
성벽 도처에 홍무제의 신패를 내걸고 고슴도치처럼 방벽 뒤에 웅크린 채 병력을 증강시키는 등 뒷수습을 하고 철현을 잡기 위해서인데, 이순문이 말했듯 철현이나 성용은 만만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홍무제의 신패를 향해 포격을 가할 수 없다는 주체의 고집으로 쉽사리 성을 공략할 수 없는 상태에, 전술과 지모가 빼어나 이경륭이 저질러 놓은 패전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도 번번이 기병을 이끌고 기습적인 공격을 가해 오곤 하는 게 여간 상대하기 까다롭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황하의 지류를 막아 물을 가둔 후 큰 비가 오면 보를 터뜨려 제남을 물바다로 만들어 쓸어 내자는 작전을 세운 것이었다.
뙤약볕이 시작되었다 했듯 오월을 지나 유월, 머잖아 우기雨期가 시작될 기간이 되기도 했다.
물로 어떻게 성을 쓸어 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책략은 실제로 무서운 것이었다.
해마다 범람하는 황하는 주위를 물바다로 만들며 걷잡을 수 없이 큰 피해를 야기하곤 했는데, 보까지 만들고 물 위에 통나무들을 띄워 뒀다가 터뜨리면 방벽이고 뭐고 다 무너지고 성 하나가 초토화되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승려라는 놈이 실로 악랄한 수법을 쓰는군!”
철현도 이 책략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경각하고 있었다. 후퇴하지 않으면 대홍수가 일어나는 속에 모두가 수장되어 물귀신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제남을 포기하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잘 버티고 있긴 하지만 사정이 크게 어려웠기 때문인데, 이경륭이 너무 크게 당해 말 그대로 병력이 반 동강이 나 있었던 것이다.
서둘러 수습하고 있었지만 귀환하는 자들도 많지 않았고, 남은 것은 삼십오만 정도로서 중앙에서 아직 지원군도 오지 않고 있었다.
물러서기 시작하면 산동을 다 내주고, 다음 방벽이 있는 개봉까지 밀려갈 수도 있었다. 어쩌면 금릉까지 밀릴지도.
그만치 제남이 요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저렇게 무서운 수법을 쓰려 하고 있으니……!
“하는 수 없다. 성문을 열고 백기白旗를 걸어라.”
맞서 철현도 계교를 냈다.
‘하늘이 낸 분을 어찌하리오.’ 하는 글과 함께 닫았던 성문들을 모두 열고 항복의 뜻을 보인 것이었다.
“하는 것을 보면 지독히 약은 자입니다. 쉽게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연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원기와 도연은 경계심을 보였지만 그러나 주체는 고개를 저었다.
“철현은 청백리다. 부하들의 목숨을 아끼려 하는 것일 수 있다. 제남의 병력을 흡수하면 싸움은 끝난다. 거짓이라 해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어찌 될 리 없거니와, 백기를 들었는데도 입성하지 못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입성한다.”
대인배의 생각이라 할지.
그러나 이것은 큰 패착을 불렀다.
“역적 놈이 왔다! 철판을 떨어트려라!”
쾅-!
“와아앗!”
히히히힝!
계교라 했듯 철현은 주체가 성문 아래에 도착하자 느닷없이 성문 위에서 거대한 철판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다행히 주체가 몸을 날려 피함으로 타고 있던 말만 동강이 났다.
그러나 정작 불행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연왕을 잡아라! 총공격!”
“와아아아-!”
콰두두두두!
항복 의사를 표시하고 겉으로는 순순한 모습을 보였던 철현은 한발 앞서 대규모의 기병들을 성안 도처에 매복시키고 있었고, 철판을 떨어트림과 함께 일제히 기습 공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역시 계략이다! 전하를 보호하라!”
완전히 방심하기까지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북평군에게 최악의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
서둘러 주체를 호위한 채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철현은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밀어붙여라! 어떻게든 이 기회에 연왕을 잡아야 한다!”
“모조리 베어라!”
“와아아!”
반쪽이 났다지만 전열을 갖춘 삼십오만의 대군이었다.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한 삼십오만의 총공격에 주체는 계속 쫓겨야 했고, 북평군은 육 만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낸 채 다시 덕주까지 밀려났다.
“쉬고 싶다.”
“오랜 싸움으로 확실히 너무 지치셨나이다. 장졸들 역시 그러하고. 잠시 북평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을 듯하나이다.”
연속된 신승으로 자만했다고 봐야 할지, 큰 손해를 보게 된 주체는 심한 피로의 기색을 드러냈고, 결국 도연의 의사에 따라 북평으로 귀환했다.
“덕주의 성벽은 견고하다. 한 번 이겼다 해도 여전히 병력이 부족하고, 번번이 추적하다 당한 것을 생각하면 서투른 행동은 위험하다. 우리도 진영을 꾸리고 재기를 꾀한다!”
처음으로 북평군을 대파한 철현과 성용은 덕주 아래서 진을 쳤으며,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려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덕주까지 밀리는 동안 질척한 우기가 시작되었고, 휴식기에 다시 세 번째 가을이 시작되었다.
폭풍 전야라 봐야 할지 벤야시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군도산 일원에도 잠시 안정감이 돌아와 있었고.
“마흔 살까지 징병해라!”
하지만 악충보의 움직임은 더욱 바빠졌다.
철현의 선전에 힘입어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 황자징이 징병의 강도를 더 높여 마흔 살까지의 장정들을 끌어내라 명령한 것이었다.
“중년층까지 쓸어 가면 늙은이들만 남아 어쩌라고?”
처음보다 더한 북새통이 일어났다.
명령인 만큼 관포들은 부리나케 징집을 하려고 뛰었고, 이를 피해 이젠 중년의 남자들까지 도망쳐 사방의 산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 번씩 접전이 치러질 때마다 수만 명씩 죽어 나가는 아수라장 속으로 끌려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해 봐야 개죽음에 불과할 뿐, 왜 나서야 하는 것인지 이유조차 모르는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이래도 저래도 내몰리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인 셈이었다.
“정말 엉망진창이로군!”
“치우란 말이다!”
“하아아압!”
카카카캉-!
“와아앗!”
십왕봉 산채의 인구는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었다.
앞서 피신한 악충보의 무사들과 가족이 삼사천, 차후에 징집을 피해 도망쳐 온 젊은 층이 천여, 이젠 중년층까지 피신해 오므로 십왕봉으로도 부족해 도처에 사람들을 분산시킬 지경에 이르렀다.
양식도 떨어져 갔다.
그럼에도 추룡과 친구들, 악불비 등 악충보의 무사들은 최선을 다해 피신해 오는 사람들을 구하고 수용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향용이 왜 존재하는지, 진정한 의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이유 같았다.
이로 인해서인지 휘주의 경우는 그래도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돕는 사람도 없어 끌려가기 싫어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도 부지기수였고, 요행히 피신해도 산속에서 먹을 게 없어 초근목피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만약을 대비해 최소한의 호신술을 가져야 합니다! 목검을 드세요!”
“하압! 하아아압!”
수련 역시 병행하고 있었다. 추룡과 친구, 무사들이 산속 구석구석에서 도망쳐 오는 사람들을 구해 내는 속에 순욱 등 간부들은 악벽강과 함께 인솔된 청장년들에게 기본적인 무예를 가르쳤고, 문인들 역시 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말 그대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었다.
십일월이 되면서 주체는 다시 기운을 찾은 것 같았다.
“남하한다!”
한 계절 가까이 북평에서 힘을 축적한 그는 마침내 다시 갑옷을 입었고, 도연에게 북평의 방어를 맡긴 후 창주로 진격했다. 그사이 진압군 역시 어지간히 회복세를 보였고, 도처의 무너진 성벽들을 보수하는 등 만반의 채비를 한 상태였는데, 유독 창주성의 성벽만 보수가 되지 않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급거 출격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전투!
“무너뜨려라!”
“와아아아-!”
콰콰콰쾅-!
한동안 그친 듯한 포성과 천둥 치듯 한 말굽성, 함성, 고막을 찢는 듯한 칼 부딪침 속에 주체는 다시 전군에 앞장서 칼을 휘두르며 치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또 창주를 함락시켰다.
천부적인 무골. 병정개미라 할 정도로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연왕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끝을 봐야 한다!”
그러나 이해 북평군에게 큰 불행이 있었다.
창주 공략에 성공한 주체는 추위에 강한 북부군의 이점을 살려 다시 덕주 탈환에 나섰는데, 성용이 이끄는 진압군 역시 만반의 채비를 해 덕주의 동창에서 북평군과 부딪쳤다.
가을이 세 번을 넘겼다 했듯 남부의 진압군 역시 이젠 어지간히 추위에 익숙해졌고, 진퇴를 거듭하는 사이 지리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밀어붙여라!”
콰콰콰콰쾅-!
“와아아아!”
선봉군끼리 몇 차례 소전투를 치른 양군은 열흘 후 마침내 대회전의 불을 뿜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철현과 성용은 늘 전군에 앞장서 전투를 치르는 주체의 특성을 읽고 대회전을 치르며 무조건 그를 에워싸 주살한다는 계책을 세웠다.
“전하가 위험하다! 지원하라!”
벼락 치듯 양 진영의 화포가 불을 뿜는 속에 포화를 뚫고 앞장서 적진을 향해 치달리던 주체는 또 여기에 휘말렸다.
양자 오십만 대군이 어마어마한 육박전을 벌이는 가운데 냉정히 전투를 주시하던 성용의 별장들과 강병들이 만사를 제치고 치달려 오는 주체를 포위한 것이었다.
이를 본 총령 장옥과 부총령 주능이 기병을 거느리고 필사적으로 치달려 포위망을 뚫어 주체를 구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에서 장옥이 대신 전사하고 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