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북평에서 온 사신 (2)
처음 보름, 이경륭은 도착하기 무섭게 전력을 동원해 밤낮없이 월성을 시도했지만 끝내 방벽을 넘지 못했고, 오래잖아 진압군에게 또 하나의 최악이라 할 시련이 닥쳐왔다.
황산에 단풍이 질 즈음, 음력 시월이면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북평에 한발 앞서 혹독한 추위가 닥쳐왔던 것이다.
“물을 퍼부어라!”
그러자 도연은 방벽 도처에 물을 길러다 퍼붓게 했다. 병사들은 물론 여자들까지 물동이를 이고 나섰으며 이로 인해 기온이 내려가자 방벽과 방벽 주위는 완전히 빙판이 되었다.
벽을 넘어야 하는 진압군으로서는 여간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난공불락입니다!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자들까지 발 벗고 나서고 있고, 화력까지 상상을 불허합니다. 사상자가 삼만이 넘습니다!”
보름 만에 삼만 명의 사상자.
말이 쉽지 시체가 벌판을 덮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경륭은 혼란에 빠졌다.
비로소 아차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웅현을 떠난 주체는 영평, 대녕으로 들어가 굳건하게 진영을 꾸렸고, 북평의 절기를 알므로 철저히 겨울을 날 채비까지 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치러 간들 북평보다 함락시키기 더 어려울 뿐이고, 이래저래 궁지에 몰린 것이다. 도연이 지적했듯 무능함으로 부하들에게 신임 역시 잃었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명령했다.
“어떻게든 함락시켜라! 육십만 병력으로 십칠만뿐인 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이 되었다.
“아녀자들까지 다 나서고 있는데 어찌 십칠만이라 볼 수 있겠습니까? 주체 역시 십오만이 수성하는 진정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일단 물러나 공성 채비를 더 보강하고 공격하는 게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추위에 병사들의 사기까지 죽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무슨 추위! 밀어붙여라! 어떻게든 북평으로 들어간다!”
그는 진영 속에서 화로를 쬐고 있었다.
하나도 안 춥다.
“진격!”
“와아아아!”
콰콰콰쾅-!
“으아아아악!”
격렬한 공성전은 무려 한 달이나 더 이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경륭은 하나도 안 추웠지만 병사들은 손발에 얼음 알이 박혔고, 북평성은 여전히 견고했다. 방벽 주위가 온통 빙판이라 접근했다가는 넘어지기 일쑤인데 퍼부어지느니 화살이고 장창이라 가까이 갈 엄두조차 안 날 지경이 되고 있었다.
설상가상 이들은 중남부에서 온 병력이었다. 중부만 해도 심한 추위가 없고, 남부에는 겨울에도 얼음조차 얼지 않는 중원인데 급강하하는 북벌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 낼 재간이 없을 정도였다.
보름이 더 지나자 눈까지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진압군은 사기를 완전히 잃었고, 공성전은 중단되었다.
진영 속에서 덜덜 떨며 또 싸우러 가라 할까 봐 눈치만 볼 정도가 된 것이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전군 앞으로!”
“와아아!”
콰두두두두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센 눈보라가 치기 시작한 시기!
마침내 영평에 머물며 힘을 축적한 주체가 앞장서 기병과 함께 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재진격하기 시작했다.
북부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웃통까지 벗고 뛰던 강병들이었다. 민병들 역시 모두 북부의 출신이므로 겨울에 강했다.
“전하께서 도착하셨다! 공격하라!”
“와아아아-!”
도연 역시 성문을 활짝 열고, 웅크리고 있는 진압군을 향해 앞뒤에서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벼락 치듯 굉음을 토하는 화포가 이경륭의 진영을 향해 다시 불을 뿜었고 눈밭에서 범처럼 날뛰는 북평군의 기마대가 손발이 오그라진 진압군의 중심을 관통했다.
이경륭은 지휘를 한답시고 군의 뒤편에 있었으나, 병정개미인 주체는 눈을 번쩍이며 격렬하게 기마대의 선두에서 여섯 자의 대장검을 휘두르며 진압군의 별장들과 부딪쳤다.
사서史書에는 ‘말이 세 필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쉬지 않고 전장을 질주하며 앞장서 싸웠고, 전통의 화살이 다 떨어지고 칼이 부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시작부터 결과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천기까지 헤아리는 군사軍師에 용맹이 충천하는 수장, 범처럼 날뛰는 장병들 앞에 결국 추위에 오그라진 진압군은 무너졌다.
시산혈해를 남긴 채 두 달 만에 이경륭은 덕주德州 아래까지 도로 밀려났고, 주체와 북평군은 일 차에 경병문과 삼십만, 이 차에 이경륭과 오십만, 총 팔십만을 대파하고 하북을 온전히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예상되었던 대로 후퇴는 또 압승을 위한 책략이었던 것이다. 힘만으로 마주쳤다면 이런 신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공격!”
콰콰콰콰쾅!
“와아아아아-!”
같은 시점 군도산에도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진격로를 뚫기 위해 벤야시리가 총력전을 펼쳐 온 것이었다.
“바위를 굴려라!”
콰르릉! 쾅!
“으아아악!”
막여사의 눈도 불줄기를 뿜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석천중이 병력을 보내 오만이 더 보충되었고, 십삼만으로 고지에 진을 친 채 집채만 한 바위를 북원군에게 굴리는 등 엄청난 저항력을 보였다.
도연과 유사하게 물을 뿌려 사방을 빙산氷山을 만들고 계곡마다에 철질려鐵?藜를 깔고, 기름통과 마른풀, 나무까지 준비하여 접근하면 도처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지독합니다! 아주 고지에서 죽을 작정인가 봅니다!”
“차라리 우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와랄 놈들은 어쩌고?”
두 달에 거쳐 밤낮없이 빗발치듯 신화비아를 퍼붓고 포격을 감행하며 인해전술로 밀어붙였지만 엄청난 사상자만 남긴 채 벤야시리는 진격로를 뚫지 못했고, 눈이 퍼부어져 계곡들을 막자 결국 이를 갈며 물러섰다.
“고슴도치 같은 놈들!”
북평을 포기하고 감숙 쪽으로 우회하는 것이 좋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쪽은 와랄이 버티고 있었다.
전력이 거의 허물어진 상태라 해도 함부로 진군할 수 없었던 것인데 중원에 있어 큰 다행이기도 했다.
더 다행인 것은 이경륭이 큰 상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패보가 금릉에 전해진 것은 덕주로 밀려난 지 한 달 후였는데, 오십만이 패주한 만큼 온 세상이 들썩했다.
“해도 바뀌고 날씨가 심히 추운데 이 대장군과 정토군은 어쩌고 있습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건문제만 사실을 몰랐다.
환관들까지 물갈이가 되어 그의 주위에는 이제 위에서 아래까지 황자징의 일파들만 득실거리고 있었고, 황자징은 패전을 함구하라고 이른 후 이렇게 대답했다.
“심려 마옵소서. 승승장구로 북평성까지 밀고 올라갔사오나 기온이 급강하함으로 부하들을 생각해 덕주로 내려와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위엄에 눌린 연왕은 꿈쩍할 생각도 못 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풀릴 무렵이면 자진해 무릎을 꿇을 것이옵니다.”
무슨 소린지 알쏭달쏭.
그러나 건문제는 승전을 눈앞에 두고도 부하들을 생각해 물러선 위대한 장수를 떠올린 것 같았다.
“참으로 덕장德將 아닌가! 이 장군을 태자태사太子太師로 봉하고, 삼품의 봉록을 내리겠습니다.”
“황공하옵니다.”
참 기도 안 찰 노릇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시간에도 주체는 동절기에 강한 정예들을 이끌고 서북의 울주까지 진영을 넓혀 나가고 있었고, 신승에 고무된 북부 도처의 향용들과 호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천하가 손가락질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건문제가 실망할까 봐 그랬는지는 모르나 이것으로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미친 척한 주체를 황자징은 황제를 기망한다 했지만 실제로 기망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라는 것! 이들 일파를 결코 충신이라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차후에 더 치명적인 일이 밝혀지기도 하지만 당장 보이는 사실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어쨌건 황자징과 제태는 마음이 급해졌다.
“어찌했으면 좋겠소? 설마 이 장군까지 패하다니? 연왕이 서西로 진출하고 있고, 정신 나간 지주 놈들과 향용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이오. 방치했다간 걷잡을 수 없게 되지 않겠소?”
“걱정할 필요 없소! 실력이 부족해 당한 것이 아니니. 추위가 문제였을 뿐이오. 병력의 손실 역시 그리 크지 않다 들었소. 그래도 모르니까 도처의 왕부에 병력을 보내라 하고 징병도 해 봅시다! 이십 세에서 삼십 세 장정들을 끌어냅시다!”
어이없음 반, 기도 안 참이 반이었다.
돌고 돌아 제자리라고 번왕들을 칠 생각으로 삭번에 나서더니 급해지니 손을 벌리자는 것이다.
게다가 징병이란 강제징병을 말한다. 권력이 있고 급하니 할 수밖에 없겠지만 마침내 상황이 백성들에게까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징…… 징병이란 말입니까?”
당연히 백성들 중에서 이를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하다! 나라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 썩 나서라! 시간이 없다!”
자진해서 나설 사람이 없는 만큼 포고령이 내려지자 곧 관사에서 나섰고, 도처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당장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가더라도 가족들과 작별이라도 하고 가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불시에 들이닥친 포사들로 인해 영장을 받은 사람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포사들은 사정이 없었다.
“인사는 이대로 하면 된다! 개인의 사정을 봐줄 수 없는 만큼 바로 가는 것이다! 거부하면 항명죄로 투옥된다!”
“세상에 이런 법이……!”
흔히 있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징병을 하는 것이 상투적이지만 강제징병이란 늘 불시에 이루어졌다.
전장에 나가면 어찌 된다는 것을 아는 만큼 대상자가 달아나기 때문이었다.
특히 국가 간의 전쟁 같은 애국심을 요하는 경우라면 자진해서라도 나서겠지만 실없는 권력 다툼에 끌려가 목숨을 잃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포사들도 사정이 없다. 길을 가다가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그 자리에서 징집을 했다.
가지 않으려는 사람과 어떻게든 잡아가려는 사람들! 사방에서 시비가 벌어졌다. 도망가는 사람에 한해서는 칼부림도 불사하는 것이다.
“하-!”
콰두두두두두!
반면 북평군 쪽이 그렇듯이 일부 향용의 경우는 자진해서 진압군에 편입하는 예도 있었다.
중앙에서 이길 것이라 본 수뇌들이 기회에 입신의 발판을 다지려 하는 것이었다. 충국군으로서 공을 세우면 현감 및 태수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향용을 거느리면서 태수의 관직에 올라 강력한 군벌을 이루는 경우도 상당했다.
뒷줄까지 잘 대면 그게 또 철 밥통이라 몇 대에 걸쳐 태수 자리를 찜하며 늠름하게 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고.
마지못해 나서는 인물도 적지 않았다.
관의 승인을 받고 방파를 운영하는 만큼 소환을 거부하면 폐문을 당하는 등 도망치는 신세까지 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긴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사면령이 내리기까지 곤고한 신세가 참 오래간다.
친분 있는 관료들을 통해 무진장 뒷돈을 들이고서야 간신히 정상참작을 받기도 했다. 정확히 이것이 이 시대의 향용, 사 무림 방파의 주소였다.
“어디로 달아나느냐, 이놈!”
“치워라!”
쾅-!
“앗!”
“웬 놈들이냐!”
친구들 역시 다시 바빠졌다.
대단히 특이한 예로서 일반적인 향용들이 취하는 경우는 앞에 열거한 것과 같다. 자진해 싸움터로 나가거나, 마지못해 소환에 응해 나서거나, 거의 없긴 하지만 방파를 해산하고 피신하는 셋 중 하나.
이하 필요에 따라 관사와 함께 치안을 지키며 함께 징병을 하는 경우 역시 있었다. 향용도 준관부와 같아 협조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악충보는 이런 경우에서 모두 벗어나 있었다.
세 번째 경우와 유사하지만 난이 일어나기 전에 방파를 해산함으로 일단 불응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난이 끝나도 사면과 관계없다는 것.
무사들 역시 그랬다. 징집을 피해 도망치면 죄가 되지만 더 전에 세상이 싫어(?) 산속으로 들어간 만큼 역시 별문제가 없다.
그러면서도 활동을 재개했는데 향용이 하는 마지막 일 중 하나! 전장에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적군이 밀려오면 노약자를 피신시키는 경우가 있었는데, 유사한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징집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쳐 오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에 나섰던 것.
솔직히 잘못된 일이긴 했다.
원래 같으면 관사와 함께 징집을 해야 하고, 오히려 도망치는 사람들을 잡아야 했지만, 그러나 애국심을 요하는 전쟁도 아니고 명분조차 분명치 않은 싸움에 휩쓸려 죽기 싫은 사람들이 피신하고 있으므로 이를 보호하러 나선 것이다.
칼부림까지 난다고 했듯 포사들은 도처의 산기슭에 몸을 숨긴 채 도망쳐 오는 사람들을 검거하고 있었고, 몸싸움이 심해지면 살상이 일어나곤 해 이를 막고자 나선 것이었다.
포사들로서는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산속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일을 방해하는 인물들!
후사를 생각해 복장을 바꾸고 두건으로 얼굴까지 가렸다.
하지만 포사들은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다.
“네 녀석들! 악충보의 사람임에 틀림없지?”
그래도 악충보의 사람들이 ‘네’ 하고 대답할 리 없다.
“전혀 관계없소. 악충보는 해산된 지 오래지 않소? 상관없이 한발 앞서 피신해 들어온 사람인데, 강제징집이 싫어 피하는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를 필요가 있겠소? 특히 정쟁에 불과한 싸움에! 입장을 바꾸면 포사님들도 가기 싫을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소?”
사실이었지만 입장은 바꿔질 수가 없었다.
“모두 잡아 꿇려라!”
“하아아압!”
카카카캉-!
도처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나 포사들은 악충보 무사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나선 사람들이 거의 고수급이었고, 포사들 역시 사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그들 역시 이 일이 바르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