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운명의 주사위 (5)
현재는 무조건 연왕이 불리했다. 황제가 건문제이고, 대신들은 명령에 따라 나라를 안정시키려 한다는 명분이 있으니까.
“왕부의 세가 우려되었다면 병력을 감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히 되지 않습니까?”
장완옥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되지. 하지만 감하라 해서 감해지겠느냐? 왕부들 또한 온갖 이유를 댈 것인데. 불만 삼아 반군反軍을 일으키는 등 선수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온건해 보여도 번왕들에게 역심이 없다는 것을 누가 보장하겠느냐. 상왕 주백은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자살까지 했다. 연왕이 정녕 결백하다면 북평왕부를 내놓고 물러나면 될 것인데, 그러지 않고 있지 않느냐?”
핵심核心!
장완옥은 계속 차분히 권력의 속성을 가르쳤다.
“자신이 해야만 한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왜 그여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따라서 바람직한 것은 최대한 일찍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래야만 큰 희생이 없지. 하루속히 분란이 수습되고 대신들이 국정을 잘 이끌고 나가는 게 가장 좋은 것이다.”
“폭정으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든다면요?”
장완옥은 다시 미소 지었다.
“또 싸움이 일어나겠지. 그러나 차후의 일이다. 폭정을 할지 선정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어쨌건 그들의 위에는 황상이 계신다. 황상의 뜻을 거역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군주 지상주의의 시대인 만큼 거역하는 게 역적인 셈이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은 결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
추룡은 침울한 심정으로 입을 다물고 일어섰다.
그대로 막여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누가 이기든 이런 힘겨루기는 민생과 안정을 봐서라도 최대한 빨리 끝나야 한다는 게 그르지 않았다.
오래가면 혼란만 더 가중될 뿐, 일반이 보기에는 여전히 금밥그릇 다투기였으니까.
“면목 없습니다, 악 매.”
그럼에도 추룡은 괜스레 모두에게 미안했고, 순박해 보이던 주첨기와 마삼보, 눈을 반짝이던 주고치가 마음에 밟혔다.
깡다구 세었지만 자신을 높이 보아 주던 도연, 북평왕부의 모두가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우양, 주탁도 떠올랐다.
그들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악벽강의 표정도 편하지는 않았다.
“……어쩌겠습니까, 정쟁이 원래 그런 것인데. 빨리 끝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길게 가면 정말 세상이 혼란해지니까요. 아직은 좋은 상태이지요. 왕부들이 쉽게 손을 들고 있고 희생도 심하지 않으니까요. 안타깝지만 어머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봅니다.”
상태를 보면 연왕부의 손을 들어 주고 싶지만 누가 이기든 빨리 끝나야 한다는 것에 생각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북평도 훨씬 좋아질 수 있었다. 알력 중이라 병력이 부족한 등 사정이 좋지 않은 북평이었지만 패권이 가려져 하나가 되고 나면 병력도 보강될 것이고, 안정될 것이니까.
한데 정작 돌풍은, 바로 이즈음에 일어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울추는 비슷했으나 오래잖아 황자징 일파의 치명적이라 할 패착이 드러나고 있었다.
시작은 역시 응천부.
“연왕이 미친 척하고 있다고?”
“그렇다 합니다. 연왕부의 갈성이란 자가 우리 쪽으로 넘어오면서 귀띔한 이야기로 도연의 계교라 하더군요. 미친 척하여 화를 모면하려는 수작이라 합니다. 황상을 기망하는 짓으로 단호히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황자징의 눈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주숙을 비롯, 여러 왕부들을 쳤지만 구실을 주지 않고 온건함을 보였던 주체! 마침내 치죄할 명분을 잡은 것이었다.
서둘러 건문제를 찾아갔다.
“연왕이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때를 엿보고 있다고 합니다! 황상을 기망하는 행위이오니 죄를 물어 서둘러 처벌하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그를 잡고 나면 나머지 번왕들은 자연적으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부친인 주표 당시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경계되는 숙부!
계속 숙부들을 치는 게 바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건문제도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질도 그렇고, 염려가 되었다.
“연 숙왕의 힘이 약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쉽게 제압이 되겠습니까?”
황자징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대비해 손을 써 두었으니 심려 마옵소서! 대동에 팔만의 대군이 집결해 있고, 청주에 오만의 병력을 보내 놓았사옵니다. 따로 사신을 보내 달단의 벤야시리에게도 압박을 가하라 해 뒀으니 그들이 공격하는 사이 진입하면 간단히 끝날 것이옵니다! 윤허만 해 주소서.”
벤야시리!
건문제의 안색이 크게 돌변했다.
“무슨 말씀을……? 설마 달단의 힘을 빌렸다는 말씀입니까? 그들로 하여금 북평을 치게 하겠다는 것?”
아무리 어린 그라고 해도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자징은 계속 자신 있게 간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정치나이다. 폐하의 분부라 하자 그들도 흡족해했다는 이야기고, 기회로 화친을 맺으면 북침의 위협까지 사라지니 일거양득이 되는 것이옵니다.”
비로소 건문제도 마음을 놓았다. 늘 말썽이 되고 있던 북원까지 자신을 따르겠다 했다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것이다.
“역시 태상시경이시군요. 이행하십시오.”
운명運命의 주사위였다.
황자징은 곧 북평에 나가 있는 장병 및 사귀, 송충, 경헌 등에게 만반의 채비를 하라 전서구를 보냈고, 섬서군과 청주에도 때에 맞춰 진격하라 명령을 내렸다.
그여야 하는 이유 (1)
그러나 연왕부에 배신자가 생겨 주체가 미친 척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듯 장병에게 명령이 전해질 즈음 연왕에게도 황자징의 계책이 전해졌다.
도사로 있던 장신이 사실을 알아내어 알렸다는 설도 있고 궁실에서 누군가가 보냈다는 설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는 불분명했지만 분명히 첩보를 접수한 것이었다.
당연히 주체, 도연 등 모두의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미친 짓이다! 달단에 북평을 쳐 달라고 부탁했다니? 벤야시리가 어떤 자인데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우리가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이라면 나라가 망합니다. 돕는 척 놈들은 틀림없이 장성을 넘어 남하할 것입니다. 도처의 왕부들이 쑥대밭이 되어 있다시피 한 상태에서 놈들을 막아 낼 수는 없습니다. 고사하고 황제가 주적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싸울 의욕도 없을 것입니다.”
완전히 포복졸도를 할 소식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번왕들을 우려해도 그렇지, 주적까지 끌어들이는 상식도 아닌 짓을 했다는 게 믿기지조차 않거니와…… 진상을 알아야겠으니 장병, 사귀 등을 청해라!”
“명!”
북평왕부의 움직임이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석천중 등의 머리카락도 곤두서고 있었다.
“뭔가, 이것은? 벤야시리에게 응원을 청했으니 그들이 공격을 하는 사이 진입해 연왕을 잡아라?”
찢어질 정도로 눈이 치켜졌고, 말문까지 막힌 듯 입을 벙긋거렸다.
“이것이 사신을 보낸 진의였단 것인가? 달단의 힘을 빌려 연왕을 치자는?”
“허허허……!”
한참 만에 모두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군. 정쟁이란 게 워낙 도깨비장난 같아 그러려니 하고 있었더니만. 그들이 공격을 감행하면? 당장 수천에서 수만 군사들이 목숨을 잃을 것인데,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이 무슨 소모품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책은 들어 보기도 처음일세!”
주체는 반신반의하고 있었지만 그들로서는 설마고 뭐고가 없었다. 중앙에서 내려온 전문이기 때문이었다.
원군에 맞서 국경을 지키던 처지에 이런 황당한 명령을 받았으니 그냥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막여사의 표정도 돌같이 굳어졌지만 그러나 곧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있었군. 출정할 것이니 모든 화력, 모든 군력을 집결시키게. 자네에게 모두의 목숨을 맡기겠네.”
“어.”
석천중은 계속 어이없다는 웃음만 지었다.
급기야 일이 발생했다.
서찰이 전해진 다음 날 주체는 정신을 찾은 것이다. 한동안 실성한 척하던 것에서 정신이 돌아온 양하여 도처에 알리고 축하하는 것처럼 잔치를 벌이겠다 했다.
혼미했던 동안의 일이 궁금하다는 명목으로 포정사로 있는 장병과 사귀를 왕부로 초대했다.
‘미친 척하던 놈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장병 등은 일단 초대에 응했다.
워낙 종잡을 수 없는 게 주체이고, 이젠 잡아 놓은 닭이다 싶어 무슨 말을 하려나 궁금하여 응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부 문을 들어서는 순간!
“포박해라!”
“흡!”
예상되었던 일이 벌어졌다.
왕부의 문 뒤에 도연, 원기 등이 왕부군을 매복시키고 있다가 한꺼번에 들이쳐 그들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포박된 그들은 내전으로 끌려갔고, 주체는 바로 장병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문초했다.
“솔직히 직고하라! 황자징이 벤야시리에게 사신을 보내 북평을 치라고 청했다더구나! 그게 언제냐?”
딱 부러지게 사실인가를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가부를 물으면 시침을 뗄 것이므로 날짜를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목에 칼이 들이밀어지자 장병 등은 미처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날짜까지 어찌 알겠소?”
청한 게 사실이라는 것!
주체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비분으로 뒤덮였다.
“모두 목을 잘라 효시하라!”
“크아악!”
잔뜩 찌푸린 하늘!
장병 등의 목을 잘라 효시하게 한 주체는 곧바로 도연, 원기, 마삼보, 장옥 등 중신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더는 이대로 있을 수 없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오랫동안 핍박받으면서도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북평을 안정시켰고, 최선을 다해 국경을 지켰다! 하나 이들이 오늘 북원까지 끌어들여 핍박하려 드니 이는 결코 우리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도연의 눈빛도 더욱 쏘는 듯 변했다.
“때가 이른 것입니다! 북평부터 장악하시지요.”
“행하라!”
반란이라 봐야 할지? 결국 항거가 결정이 된 것이었다.
우르릉! 꽝!
콰장장창-!
이때 왕부의 내전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건문 원년, 유월.
시기적으로 비가 올 철이 되었고, 날이 잔뜩 흐려져 소나기라도 내릴 듯은 했지만 느닷없이 사방에서 벼락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강풍을 동반한 돌개바람이 일어나 대전의 기왓장이 모조리 하늘 높이 빨려 올라가고 나무뿌리가 흔들리는 소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불길한 징조……!’
거병이 결정된 마당에 변괴가 일어남으로 모두가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도연! 그의 견해는 달랐다.
“하례 올리나이다!”
변괴가 일어나자 바로 주체에게 넙죽 인사를 한 후 깡다구를 보이며 외쳤다.
“하늘이 허락한 것이다! 용龍이 승천할 때면 반드시 풍우風雨가 일거니와, 하늘이 바람을 보내 기와를 날려 버림은 황黃기와를 올리라는 뜻이다! 이야말로 전하의 앞날을 예지한 것이니 심려 말라!”
기가 막힌 해석.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황궁의 기와만 황색이다. 악재惡材 역시 호재로 돌려놓는 깡다구 센 그의 기지는 변함없이 빛을 발했고, 여기에 중신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따르라!”
“와아아아!”
콰두두두두두!
콰차차창!
“으아아아악!”
더불어 행동이 시작되었다.
결정 나는 즉시 주체는 팔백 명의 왕부 금위군에게 무장을 갖추게 했고, 자신 역시 갑옷을 입은 후 앞장서 말을 치달려 북평도위부를 들이쳤다.
“막아라!”
“결국 연왕이 반란을 일으켰다!”
콰차차창!
창칼이 번쩍이고 폭우 속에서 핏줄기가 하늘로 뻗치는 가운데 도위부와 연왕부 간의 첫 번째 싸움이 벌어졌다.
“놈들!”
“크아아아악!”
하지만 도위부는 이 첫 번째 충돌에서 견뎌 낼 수 없었다. 느닷없는 급습이기도 했고, 알려진 대로 북평군은 강군 중의 강군이었다. 왕부를 지키는 금위군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병력으로 채워져 있었고, 함께 나선 도연, 원기, 마삼보에 마침내 칼을 든 주체의 무위조차 예사가 아니었다.
일거수일투족! 창칼이 번뜩일 때마다 도위부의 인물들은 쓰러졌고, 오래잖아 북평도위부는 핏물 속에 잠겼다.
“거용관으로!”
“와아!”
콰두두두두두!
갑옷을 입은 주체의 움직임은 그대로 질풍노도였다. 북평왕부가 전투 왕부이고, 주체 역시 일국의 왕자라기보다 무장에 가깝다 했듯 도위부를 무너뜨리자 지체 없이 왕부군을 이끌고 거용관으로 치달려 갔다.
“전하께서 오셨다!”
“와아아아!”
주체를 본 군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토하며 활짝 문을 열어 그를 맞이했고, 그 자리에서 또 둔전을 가꾸라는 등 흰소리를 하던 송충의 목이 떨어졌다.
경헌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송충의 목을 친 주체는 정군을 흡수해 다시 산해관으로 치달려 경헌의 목마저 잘라 낸 후 삽시간에 군력을 하나로 단결시킨 후 북평의 구문九門을 완전히 봉쇄시켰다.
특별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북평의 군력은 그가 키워 낸 것이었고, 도위부가 누르고 있었다지만 그는 북평의 왕이었으니까.
황제의 명을 받드는 게 도위부지만 홍무제는 죽었고, 일찌감치 북평의 민심은 주체에게 쏠려 있었던 것이다.
건문제는 계속 욕만 먹고 있을 정도.
도위부의 기관들을 모두 뒤집어엎은 후 북평 구문을 잠근 주체는 병력을 집결시키고 곧 거병의 뜻을 밝혔다.
“나는 고 황제 폐하의 적자이다! 왕작을 하사받은 후 한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외적을 막았으되, 지금 조정에는 간신들이 들끓고, 어린 황상께 골육상잔을 부추겨 폐해가 하늘에 달하고 있다! 태조께서도 조정에 바른 신하가 없고 간역이 발효할 경우에는 반드시 거병하여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셨거니와, 훈육에 따라 나는 간신들을 치고자 한다! 옛적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섬길 때 그러했듯 자랑스러운 북평의 장병將兵들이여, 여予와 함께 간적들을 치고 황상을 보필해 부국강병의 강산을 이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