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습무사-112화 (112/150)

# 112

운명의 주사위 (4)

“불!”

“불이다!”

관료들과 식솔들을 내보낸 후 스스로 궐에 불을 질렀다.

“불을 꺼라!”

“와아아!”

둘러싼 금군들에게조차 대소동이 일어났는데, 그러나 불길을 잡았을 때 주편은 이미 숯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노기를 참지 못하고 분사焚死함으로 결백을 입증해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삭번은 여기에서도 그치지 않았는데, 황당한 것은 산동의 청주왕부에게까지 미친 것이었다.

추룡이 산동을 지날 때 관군들이 보여 줬듯 청주왕부의 제왕齊王 주부는 대세를 따라 비교적 중앙의 지시를 잘 따르는 인물이었는데, 그에게까지 화가 미쳤던 것이다.

북평의 바로 아래이므로, 연속되는 삭번 단행에 불만을 품고 주체를 도우면 어쩌나 하는 우려심이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실제 죽거나 유배되고 있는 번왕들은 모두 형제다. 형제들이 쓰러져 가는데 좋다 할 사람은 없었고, 상왕 주백이 자결을 함으로 주부 역시 심한 일이니 아량을 바란다는 참언을 했던 것이다.

“역시 미쳐 돌아가는군……!”

연안도위부에도 마침내 명령이 떨어졌다.

군력을 이동해 산서山西의 대동왕부大同王府를 치라는 명령이었다.

막여사의 눈이 칼날처럼 번쩍이는 속에 석천중의 안면이 돌처럼 굳어졌다.

“너무 심한 것 같네! 병력을 삭감하고 힘을 뺏는 정도로 진행되리라 생각했는데, 무조건 부수고 폐서인일세. 자결로 결백을 증명할 정도면 황상도 생각을 좀 해야 할 것인데 혈연血緣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자르는 꼴이 아닌가? 도위부도 힘을 잃었고 친지들도 끝장나고 나면? 대신들의 횡포를 황상 홀로 어떻게 막을 것인가?”

당연히 막을 수 없다. 황제는 들러리일 뿐이고 대신들이 천하를 좌우하는 것이다.

“기호지세騎虎之勢이니 어쩔 수도 없겠지.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 황상의 마음이 변해 번왕들을 부르기라도 한다면 화가 삼족에 미칠 테니까. 황상이라도 잘 섬기기를 바랄 수밖에.”

석천중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할 생각인가? 복지부동하는 게 아니었나?”

막여사는 거듭 눈을 번쩍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복지부동이라도 할 만한 일은 해야지.”

마침내 막여사의 첫 명령이 떨어졌다.

“연안군, 대동으로 간다! 채비하라!”

둥! 둥! 둥!

연안군의 출격!

여간하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섬서군이 움직였다!”

“맙소사!”

그러나 막여사는 간단히 생각할 인물이 아니었다.

원칙을 깨고 쉽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여기에도 까닭이 있었던 듯했는데, 그는 섬서삼군 중 동천東川, 유림楡林, 양군을 북으로 올려 보내 국경을 단단히 틀어막게 해 놓고, 일만의 연안군만 이끌고 태원으로 향했다.

지난봄, 홍무제에 한발 앞서 급사한 진왕 주강이 거느렸던 태원왕부가 있는 곳!

한데 상황이 장난이 아니었다.

어찌 된 노릇인지 이르는 곳마다 주둔하고 있던 군부들이 기다렸다는 듯 속속히 연안군을 중심으로 운집하고 있었는데, 태원 양군과 대동왕부의 참령들까지 병력을 끌고 와 합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출발할 때 일만이었던 병력이 태원을 휘돌아 대동에 도착했을 때는 무려 팔만에 달했다. 동천, 유림에 배치시킨 병력까지 합하면 십만!

“대체 어찌 된 노릇이냐, 저게?”

보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한발 앞서 그는 장정희 등 대동군부에 소속된 상당수의 장수들을 끌어들여 결속을 도모했고, 때맞춰 진왕 주강이 병사함으로 태원군부의 병력까지 흡수되었던 것이다.

이것도 운運이라 했듯 주강의 죽음이 섬서에 더 막강한 힘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십 일 만에 대동왕부는 팔만의 대군에게 포위되었다.

늠름하게 보란 듯 밀고 와도 대왕代王 주계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냥도 섬서군을 감당하기 어려운 판에 부하들까지 함께 왔으니 이야말로 짹소리도 못할 수밖에.

“전하.”

하지만 막여사는 무례하지 않았다.

대군이 왕부를 둘러싸자 주계는 사색이 되었지만 도착한 막여사는 예의를 갖춰 주계에게 만나기를 청했고, 만나자 곧 한 무릎을 꿇고 번왕에 대한 예를 갖췄다.

“아시겠지만 시국이 혼란하나이다. 이런 시기에는 누구나 몸을 사리는 게 좋사옵고, 와신상담의 일념을 지녀야 하나이다. 불편하시더라도 당분간만 소장의 말에 따라 주소서. 전하와 우리 모두를 위하는 길이옵니다.”

주계는 핼쑥한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말을 받았다.

“나를 치려고 온 것이 아니란 말이오?”

막여사는 예를 갖춰 계속 한 무릎을 꿇고 정광이 번지는 눈으로 그를 보며 차분히 말을 받았다.

“천민이 어찌 왕야를 치겠나이까. 하나 삭번의 명령이 내렸으니 지금으로써는 따를 수밖에 없나이다. 군의 전권만 소장에게 일임해 주소서. 그런 후 왕부에서 지내시기만 하면 될 것이옵니다.”

“폐서인하여 압송하거나 감금, 유배 보내지 않겠다는 말씀이시오?”

막여사는 확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바깥출입만 하시지 않으면 될 것이옵니다. 차후의 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사오나 폐해가 없도록 소장들이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만약의 경우에만 대비해 주소서.”

주계로서는 이만저만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물은 그대로 닥치는 대로 압송, 투옥, 유배를 시키는 마당에 온전히 신변을 지키며 왕부에서 지내는 것이니.

물론 차후는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조정의 명령에 따라야 할 군부이니 하라 하면 유배를 떠날 수도 있었고, 압송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막여사가 인정을 보이고 있고 시간이 있는 만큼 대비해 금자를 준비할 수도 있었고, 부탁해 자신이 유배지를 선택할 방안도 찾을 수 있었다.

준비하는 만큼 유배를 가도 편히 지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더 나은 경우로 막여사와 장수들이 좋게 간해 삭번이 끝날 때까지 잘만 버티면 번왕으로 계속 지낼 수도 있었다.

감격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고맙소! 어차피 군속이야 다 흡수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전권을 주나 주지 않으나 무슨 차이가 있겠소. 수장들에게 따르라 하리다. 존함이 어찌 되시오?”

“천민 막여사라 하나이다. 아직 밝혀져서 될 이름이 아니니 유의해 주셨으면 하나이다.”

“막 장군!”

주계의 얼굴에 놀랍고도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이십 대였다. 홍무제의 열셋째 아들로서 젊은 편에 속했고, 명나라의 황족이지만 자손인 주지련朱之璉이 청나라의 관료가 되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번성한 인물이기도 했다.

막여사의 덕명이 천하에 알려져 있는 만큼 삭번의 회오리 속에 그는 다시없는 행운이 찾아왔음을 알았다.

“푸푸! 팔만이라니 완전히 안심해도 되겠군. 역시 대단해! 이래서 내가 쫓아가기까지 한 거라니까. 했다 하면 뭐건 완벽에 가까우니! 운도 크게 따라! 대동으로 간 것은 보나 마나 북평을 견제하자는 것이다. 이리되면 아무도 꼼짝 못하지!”

섬서군부가 대동왕부를 쳤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는 속에 이순문의 입가에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이 번졌다.

“천중을 연안에 보내길 잘했군!”

섬서, 산서 두 개 성에 팔만의 병력을 장악한 친구가 있는 만큼 그의 입지도 든든해진 것이다.

팔만은 순식간에 수십만이 될 수도 있었다. 여차하면 징병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자징과 제태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대체 석천중이 어떤 인물이오이까? 왕부는 그렇다 치고, 어떤 인물이기에 산서군부까지 장악한 것이오이까?”

“연안도위부의 안찰사인데 성품이 좋고 우직한 인물로 알려져 있소. 그로 인해 변방으로 밀려나기까지 한 것으로 아는데 오랫동안 금의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을 핍박하지 않았다 하더구려. 덕을 기려 장수들이 휘하에 운집한 것 같소.”

“우리 쪽 사람이오이까?”

“명령에 따르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겠소? 난세에 인물이 난다더니 뜻밖의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는구려.”

“정말 좋은 일이올시다! 그야말로 도독감이니 중용토록 합시다. 그에게 연왕을 치게 하면 되겠소. 대동이 북평의 측근이니 이제 연왕은 죽은 목숨이오!”

막여사가 노리는 게 북평이라면 확실히 주체의 목이 움켜쥐어진 것과 같았다.

표면상으로 주계는 왕작 박탈, 왕부에 감금시킨 것으로 되어 있었다.

주체의 안색이 납색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섬서, 산서, 두 개 성에 팔만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경계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 하지 않았더냐?”

도연 역시 돌처럼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만한 인물이 못 된다 여겼사온데……. 군부에 금제령이 내리기 전, 한발 앞서 섬서삼군을 집결시켰고, 감찰을 통해 산서군부의 사람들까지 끌어들인 듯합니다. 운도 크게 따르고 있습니다. 때마침 강 왕야께서 타계하심으로 그쪽 사람들까지 흡수된 듯하오니.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도연도 이 난변에는 속수무책인 듯했다.

주체의 눈썹이 꼿꼿이 곤두섰다.

“아래 산동 청주에 오만이 주둔해 있고, 측면에 팔만의 대군이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필경 다음은 우리 차례인데 죽어야 한다는 소리냐?”

도연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직은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고 있사오니 급한 대로 우선 화를 피하는 술수를 써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무례한 청이옵지만 대책을 강구하는 동안 가치부전의 술책으로 잠시 혼을 놓친 듯 행동해 주소서.”

미치거나 바보인 척하여 적의 경계심을 없애는 삼십육계의 하나였다.

실성한 척하라는 것.

주체의 안면이 더욱 돌같이 굳어졌지만 그러나 달리 도리는 없었다.

당장 협공을 받게 될 판국에 감당할 힘이 없는 만큼 화를 피하자면 일단 도연의 권고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주체는 곧 행동을 시작했다.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왕부 속을 헤매고 다니는가 하면, 거리까지 나가 뻗어져 자고 더러는 시궁창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일국의 왕이 참으로 기막힌 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연왕이 미쳤다!”

주체에 대한 소문도 곧 도처로 퍼져 나갔다.

“안 그럴 수도 없네. 수족 같았던 형이 죽자 뒤따라 황상께서 붕하셨고, 장례식에 달려왔다가 쫓겨나지 않나, 유배에 분신자살에, 형제들이 다 당하고 있으니 온전한 정신인 게 더 이상한 거지.”

“함부로 말할 일이 못 되지만 솔직히 뭔가 잘못되었네. 누가 봐도 이건 바르지 않아. 직위 하나가 황제지, 조카인 소년이 아버지의 형제인 숙부들을 다 잡아 처단하고 있으니…… 너무 비정하군.”

“어디 황상의 뜻이겠나? 대신들이 하는 짓이지. 황자징과 제태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더군. 측근에 사람이 없는 이상 황상도 어쩔 수밖에 없네. 영혜하다 들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모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말을 돌리고 있었지만 즉위하자 숙부들을 죽게 하는 등 다 폐서인시키고 있는 건문제는 점차 아닌 황제가 되어 가고 있었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황자징과 제태는 보이는 게 없는 무뢰배 정도, 주체에게는 동정표가 몰아지는 형국이었다.

“뭐가 됐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싶네. 아이들이 배울까 두려워.”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정국. 결론에 가서는 다 같았다.

여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라 한결같이 속히 이 정변이 끝났으면 하는 바람들이었다.

“아버지께서……?”

섬서군의 출격 등 연왕이 미쳤다는 소문은 추룡에게도 전해졌다. 세상은 석천중이 일을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막여사가 연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누가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막여사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

비로소 막여사가 연안에 있었던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적잖게 당황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가 본바 북평의 사람들은 온건한 면이 있었고, 특별히 죄짓는다 싶은 게 없었던 터인데 막여사가 나서고 연왕까지 미쳤다 하니 마음이 편할 리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라 해도 심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어 서둘러 장완옥을 찾아갔다.

장완옥은 변함없이 십왕봉의 산채 속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새 겨울까지 나고 있는 상태였다.

“제가 죄를 짓는 기분입니다, 어머니. 아무리 저를 위해 하시는 일이라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까? 연왕을 만났었습니다! 특별한 문제가 보이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런 사람들을 압박해야 하는 것입니까? 잘못은 대신들이 하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요?”

그러나 장완옥은 태연자약했다. 막여사와 평생을 같이하며 홍무제의 정변까지 겪었던 여인이다.

“협의심으로 하는 이야기겠지만 배워야지. 정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죄인이 없고 모두가 번듯하다는 특징이 있지. 북평에 갔었다니 알겠지만 왕부들에게 힘을 키우라 한 것은 고 황제셨다. 명령에 따라 연왕은 군력을 키우고 국경을 지키는 데 힘을 쏟았을 것이고. 죄가 없는 게 맞지. 하지만 지금의 황상은 그 힘을 우려하고 있다. 중신들도 우려하고 있고. 그것을 없이하자는 뜻이다.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이상 황상을 위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다는 뜻이 분명히 있다.”

죄인이 없는 게 정쟁의 특징.

틀리지 않는 말이었다. 어느 시대, 누구를 막론하고 권력 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이었다.

따라서 이기면 충신이고 지면 역적인 게 정쟁인 셈이었다.

이렇다 보니 싸움이 더 치열하기도 했다. 피차 옳은 일을 한다(?) 생각하는 마당에 억울하게 죄인이 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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