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운명의 주사위 (2)
석천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심이 클 거야. 하지만 그러려 할지 모르겠군.”
막여사의 눈이 재차 빛을 쏟아 냈다.
“늦어지면 퇴출은 물론 투옥당할 수도 있어. 순문이 경우는 완전히 칼날 위지. 보다 미심쩍은 게 이도로 간 사신인데 분석이 안 되는군. 화친을 맺고자 간 것인가?”
골몰히 생각한 후 석천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쉽겠지. 늘 말썽을 일으키는 자들이니 구슬리어 침습을 못 하도록 하자는 뜻이 아닐까 싶어. 그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을 테니.”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연왕은?”
“금릉에 다녀온 후 몸져누웠다고 해. 화병이라는 것 같던데 그럴 만도 하지.”
“순문에게 최선을 다해 사신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게. 뭐가 되건 빨리 끝내야 할 테니까. 빠를수록 희생도 줄어들어.”
“그리함세.”
중앙에서 아직 아무런 명령이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전 같았으면 빗발치듯 전서구가 오가고 전국의 도위부가 총가동되고 있을 것이지만 금의위의 기능이 정지되었다는 증거였다.
소림사.
“아미타불……!”
원혜 대사의 백미가 크게 찌푸려졌다.
방장실이었고, 추룡을 만날 때와 똑같이 주위에는 정명, 정업 등 나한들과 여덟 장로가 앉아 있었는데 다들 뜻밖이라는 기색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확실히 연안입니까?”
“그렇다고 하는구나. 연안도위부에 있다는 기별이다. 군력이 집결했다더니 설마 막 장군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설마 복권을 꾀하고 있는 것입니까?”
원혜 대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다. 그냥 그렇게만 적혀 있으니.”
장로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려야 하지 않겠소이까? 가까이서 군력까지 운집시켰다면 큰 파국이 예상되니.”
무슨 뜻일까?
정업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제자가 아뢰올 일은 못 되지만 좋지 않습니다! 막 장군 같은 인물이 지금 와서 복권을 꾀하고 있다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사제의 성격을 봐도 확실합니다. 특히 사제는 서주에도 나타났었습니다. 잘못 알리면 오히려 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서찰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입니다.”
서주! 마차가 습격당할 당시.
원혜 대사는 묵묵히 염주를 굴리며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결과 그 역시 정업의 말이 옳다고 판단했다.
“워낙 무서운 인물이 막 장군이라서……! 당대 제일의 고수이기도 하지만 지모로도 당할 사람이 드물다 들은 만큼 칼을 들면 맞설 수 없을 만치 위험하지. 하지만 이 경우는 정업, 네 말이 옳은 듯하다. 무서우나 그는 인명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고 한 번도 그릇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명예가 천하 무림을 덮고 있고 금전 역시 부족한 사람이 아니지. 그런 인물이 오늘 권력을 탐내어 복권하지는 않을 것이거니와, 필경 깊은 뜻이 있는 것 같구나.”
장로 중 또 하나가 말문을 열었다.
“뜻이라시면……?”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뭐건 의義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들 하나로 피를 뿌릴 인물이 아니라 여겨지는 터이오라. 어쩌면 오히려 잘된 것이 아닐까 싶군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팔순의 장로가 동감을 표시했다.
“내 생각도 장문인의 말씀과 같네. 그가 칼을 뽑는다면 모든 일이 빨리 매듭지어질 수가 있네. 희생이 줄어든다는 이야기지. 우리로서는 좋은 일일세.”
원혜 대사는 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운명이 길흉을 가리기 어렵더니 이젠 천하의 운명까지 길흉을 가리기 어렵구나. 정명.”
“분부하십시오.”
“정주에 악보의 사돈 되시는 대마님이 계신다 하니 조용히 이리로 모시거라. 북평 숭효사崇效事에 기별하여 유사시 일이 생기면 장 사사의 가족들을 안전히 지키라 이르고. 황산성의 보리사에도 서찰을 넣어 악보의 움직임을 살피되 막 장군의 거취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어라.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천하의 길흉화복이 네 사제의 어깨에 달려 있다. 도연이 한발 앞서 이를 내다본 것 같구나.”
“받자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대화를 미루어 보면 소림도 풍운 속에 있는 듯했다.
실로 특이한 일이라 볼 수 있었는데, 소림이 조정의 일에 직접 관여한 적은 당나라 초기 때밖에 없었다.
나한들이 쫓기던 이세민을 구해 대업을 이루게 한 일은 천하에 유명하고 이로 인해 이세민은 소림사에 봉지를 내리는 등 승병僧兵을 키우는 것까지 허가했다. 한데 지금 또 북평왕부와 관계가 있는 듯한 것이다.
미루어 추룡이 막여사의 거취를 알고자 했던 원혜 대사에게 서찰을 보낸 듯했고, 사실이라면 큰 실수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운을 타고난 것인지 묘하게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간다.
장신의 모친과 가족까지 살피라 했으니 뒤로 자빠져도 돈을 줍는 희한한 녀석이 바로 추룡 같았다.
황산에 또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북평에 다녀오자 어느새 봄, 산채를 보완하는 등 양곡을 적재하면서 여름이 지나더니 혼란이 일어나는 속에 또 가을이 물들었던 것이다.
“흐아압! 하아아압!”
쿵! 쿵! 쿵쿵쿵!
친구들 등 특과 무사들의 기예도 나날이 늘고 있었다.
세상과 담을 쌓은 듯 이들은 보름에 한 번 휴가가 주어져 은밀히 가족에게 다녀올 뿐 내내 한곳에서 수련만 쌓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도 빼어난 무사들만 차출했지만 붕거창과 무왕검의 기교는 거의가 단주급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고, 친구들의 경우는 일취월장이었다.
집중하여 칠우검을 수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시때때로 추룡이 담금질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체력 역시 함께 키우고 있어 서주에 나타났을 당시와 또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 튼튼한 기초에 힘입어 기어코 고수의 반열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각자의 노력이 더 빛을 발하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에는 자신이 주인공이라 했듯 처음부터 다들 자신감을 지니고 생활한 면모가 보였고, 가진 게 없어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협의심에, 향용의 협사가 되어 꿈을 이루려 한 의지가 확실했던 친구들이었다.
몰아서 말해서 그렇지 개개인 모두가 대도大道라 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추룡을 만난 것은 도중에 얻은 기연일 뿐인 것이었다.
추룡이 막여사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천운이듯 그들도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연을 만났을 뿐이다.
각자가 책임 있는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해 피땀을 쏟고 있었던 것으로 임백호도, 전소도, 곽영, 장청, 송민, 문대위도 모두 멋진 청년들인 것이다.
추룡이 이야기했듯 마침내 큰 기술을 이루고 도처로 흩어지게 되면 모두가 천하의 대협들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전설이 될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의 명성은 이미 추룡을 능가하고 있었고.
추룡을 아는 것은 몇몇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가난한 둔촌의 소년에서 시작해 악보에 입문, 몽마를 잡는 데 기여하고, 춘추대회를 휩쓸고, 빙벽의 겨울 산으로 들어가 산적을 토벌해 낸 명성이 이미 작지 않은 것이었다.
대가가 되기에 필요한 것은 시간뿐이었다.
“참 대단해. 지켜보면 진짜 물건들이다 싶어. 무얼 하건 한결같이 적극적일세. 어물어물하는 것을 본 적이 없네.”
주위에서도 이런 모두를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우연히 소저를 알게 되어 행운을 누리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닐세. 그들에게는 자격이 있어. 후회스럽지만 난 저 나이 때 저렇지 못했네.”
“나이가 마흔인데 그랬다면 여기에 머물고 있지 않겠지. 분명히 저 녀석들은 대협 소릴 듣게 될 걸세. 늦었지만 우리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겠고. 최소한 자랑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천하에 이름 높은 누구누구들이 내 아랫사람들이었다 하는.”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런데? 이럴 때 좀 부려 먹자! 전 삼호! 목마르니 거기 물 좀 가져와!”
“옙!”
기회 있을 때 사력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고 신임을 받으며 동료 간에 우애를 쌓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친구들이 함께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똘똘 뭉쳐 있던 친구들에게 마침내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버지께서 돌아오라 하셨다고?”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뜻밖에도 가장 먼저 친구들을 떠나게 된 것은 임백호였다.
가을이 다 갈 즈음, 누군가 찾아왔다는 기별이 악충보에서 도착해 가 보니 상상 밖에 임대백이 보낸 사람이 찾아와 있었던 것이다.
임백호는 크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분명히 먼저 뵈었을 때 말씀 올린 바 있다. 묘를 떠나 내 길을 개척하겠노라고! 백표에게 후계를 잇게 해 달라는 말씀도 드렸고! 아버지께서도 그러라고 하셨단 말이다. 그런데 왜 또 갑자기 오라는 것이냐? 족부族簿에서도 제명하겠다고 하셨는데!”
찾아온 것은 흑색 경장을 입은 달[月]의 무사들.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홧김에 하신 말씀이지 그게 어디 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자식 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다고요? 그냥 모두 그대로입니다. 소주군께서는 그대로 홍묘의 소토사시고 족부는커녕 족적足跡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속하들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아가씨와 함께 모셔 오라 하셨으니 무조건 가셔야 합니다.”
“아, 거 정말 미치겠네!”
임백호는 머리에 쥐가 나는 듯한 기분이 되어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찾아왔던 임대백은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괘씸죄를 물어 홍묘족에서 임백호를 제명시키는 등 직위를 박탈하고 그 자리에 동생인 임백표를 올리겠다고.
혼인 하나를 허락받는 나머지 무엇이든 멋대로 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뭐, 협박일 뿐, 사실 아들을 버릴 아버지는 세상에 없다. 일단 임백호가 황석에 있을 때보다 잘하고 있는 것 같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 노력하는 게 보이므로 내친김에 더 배우고 오라는 뜻으로 협박해 놓고 돌아갔던 눈치다.
아가씨라 함은 능설운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함께 오라는 것도 그렇고 수하들이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원래는 더 기간을 두려 하신 듯하지만 세상이 혼란한 만큼 서둘러 오라는 뜻 같습니다. 혹시라도 휩쓸리게 되면 일족 전체에 문제가 생기기 쉬우니까요. 가뜩이나 관과 등진 우린데 큰 변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악충보가 처해진 상황을 모른다 해도 우려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난세에는 무사들이 휩쓸리기 쉽고 그리되면 묘족의 경우는 특히 위험한 것이었다.
지금도 관과 사이가 벌어진 그들인데, 더 밉보였다가는 토벌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백호의 생각은 또 다르다.
일족을 위해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겠다는 뜻을 가졌고, 진심으로 독자적인 일가를 이룰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여기에서 돌아가게 되면 또 원점이 된다.
맞지 않는 묘족의 울타리 속에서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하고, 뜻을 접어야 했다.
“못 가! 때려죽여도 안 갈 것이니 그렇게 전해! 어제의 내가 아니고, 죽어도 뜻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어림없었다.
순간 흑의인들의 눈에 섬뜩한 빛이 감돌았다.
“좋지 않으실 것인데요? 그리되면 또 주군께서 오실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속하들은 무조건 명을 받들어야 하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가셔서 직접 하시죠?”
원래 이들이 좀 이랬다.
“햐……!”
모르는바 아니었지만 임백호는 기가 차서 또 눈을 끔벅거렸다. 이런 것이 싫어 족속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인데 간신히 해방되었나 했더니 또 이 꼴이다.
하지만 끝까지 우길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임대백을 잘 아는 만큼 자신의 주장만 펼쳐서 될 일이 아니었다. 명을 받고 온 만큼 이들은 코를 꿰어서라도 자신을 끌고 가려 할 것이고, 안 되면 임대백은 틀림없이 또 달려온다.
피하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의 그는 친구들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임대백을 만나 다시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기다려 봐!”
머리에 쥐가 나는 기분으로 임백호는 눈에 힘을 주고 으르댄 후 일단 산채로 돌아갔다.
“아버님께서 사람을 보내셨다고?”
오자 곧 임백호는 추룡 등을 만나 울상으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집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먼저의 말씀으로 포기하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봐. 가서 이번에는 진짜 완전히 담판을 짓고 오겠네.”
하지만 친구들은 그냥 미소 지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일세. 아버님과 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사실 그게 당치가 않았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식을 아끼는데, 임 형만 한 아들을 버리겠다는 부친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다시 홍묘로 돌아가게.”
추룡 역시 미소와 함께 같은 뜻을 보였다.
“내 생각도 같네. 임 형을 위해서도 그게 나아. 임 형의 뜻은 분명히 훌륭하네. 일족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려 하고 있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그리 크지 않을 걸세. 크지 않다기보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고.”
묘족을 위해 임백호가 가려는 길.
“간략히 아버지의 예를 들어, 순찰사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십 년이셨지. 일족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되려면 적어도 그 직위는 되어야 하는데, 실제 쉽지가 않아. 엄청나게 운이 따라야 되는 것인데, 개봉부에서 무관 시험을 본다고 다 대리사에 있지는 않거든. 군부 쪽으로 가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일세.”
군위제일검의 대명을 지닌 막여사의 경우가 십 년.
개봉부에만도 천에 달하는 무관이 있는데, 사실 순찰사의 직위까지 오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설명하며 추룡은 계속 빙긋이 미소 지었다.
“된다 쳐도 문제가 작지 않아. 아무리 임 형이 묘의 사람이라 해도 그 정도로 오래 일족을 떠나 있으면 진짜 열외의 사람이 될 수 있네.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게 묘의 영지라 들었는데, 그 세월 동안 문제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럴 경우라면 또 모든 게 헛수고지. 임 형은 돌아갈 것이니까. 주어진 운명을 따라가는 게 가장 좋네. 아버님의 뒤를 이어 대토사가 되어 잘못된 법을 하나하나 고치면 되지 않는가? 더 많은 인재들을 키울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