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권력의 횡포 (4)
악가군岳家軍의 후신이 악충보이므로 탕음악가의 무예에 방패 기술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 사 무림의 무사들이 수련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방패 술법까지 풀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과의 수련은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치고받고 뛰고 뒹굴고! 계곡 속에 완전히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
지도는 악벽강이 했다. 가슴을 싸 묶고 다시 남자의 차림으로 돌아온 그녀가 특과의 지휘관으로 변신한 것이다.
섬광이 번쩍이는 눈하며, 얼음 같은 표정이 추룡을 처음 만날 때보다 몇 배나 더하다.
“흐아아아아-!”
훙! 훙! 훙!
그런 속에 추룡도 새 무예를 수련했다. 또한 악불비의 배려로 시작된 것인데, 뜻밖에도 그가 악가창의 정수 중 정수라 불리는 대언월도偃月刀의 비급을 건넨 것이었다.
거용관에서 우양이 선보였던 거병!
휘젓고, 치고, 찌르고! 일 장 길이의 대월도가 휘돌아 갈 때마다 전신이 시퍼런 도광 속에 가려지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이를 무엇이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막여사의 군위검만 해도 막아 낼 사람이 없다고 봐야 할 판국에 탕음악가의 월도법까지라니.
당연히 일반 사 무림에는 이런 거병을 쓰는 사람이 없다.
길이가 일 장이 넘는 마당에 날[刃]만 해도 두 자 반, 무게가 사십 근이 나가는 무기를 누가 들고 다니겠는가.
무관이 되려 하는 만큼 장인으로서 선심 쓴 것일 수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 속에 두 달!
콰두두두두!
“죄인 주숙은 무릎을 꿇어라!”
기필코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예견되었던 대로 첫 번째 바람은 개봉왕부에서 불었다. 황자징의 건의를 받아들인 건문제가 조국공曹國公 이경륭李景隆을 불러들여 개봉왕부를 기습, 주왕周王 주숙을 체포케 한 것이었다.
느닷없는 기습 포위에 주숙은 수하의 군력을 집결시킬 여가도 없이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무슨 일이오, 이 장군! 무엇 때문에 내가 금군에게 포위되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이오?”
한데 그 죄명이 좀 모호했다.
“황명이 내렸다! 발고가 들어왔건대, 고 황제께서 돌아가셨을 당시 너는, 남기신 유명을 미심쩍다 하며, 입궁하지 말라 한 것을 비방해 민심을 혼란시켰다 하더구나! 불충불의한 일로서 있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이다! 항거하면 목을 칠 것이니 순순히 무릎을 꿇고 포승을 받도록 하라!”
“대체 누가 그런 발고를……!”
야릇한 죄명이었다. 부친상에 아들들을 오지 말라 한 홍무제의 유언은 누가 생각해도 사실 이상한 점이 없지 않았는데, 이런 전갈을 받은 만큼 친자들에게서 한두 마디의 말이 나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주숙 역시 몇 마디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데 그것이 죄명이 되어 금군이 떴다는 것.
너무 황당한 일이라 주숙으로서는 눈만 끔벅거렸다.
“들이쳐라!”
콰차차차창!
“으아아악!”
그런 사이 왕부를 포위한 이경륭은 벼락치기로 부하들에게 문을 부수게 하고 밀고 들어가 눈 깜박할 사이에 주숙을 사로잡았다.
명 태조본기太祖本紀에 의하면 주숙은 개봉의 무장들을 대동하고 필절畢節의 여러 만족들을 평정하는 등 공이 크다고 기록되어 있는 만만치 않은 번왕 중 하나였으나 기습에 의해 꼼짝없이 사로잡힌 것이었다.
대항 한번 못한 채 주숙은 그 자리에서 왕작王爵을 박탈당하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금릉으로 압송당했다.
삽시간에 중원이 들썩해진 것은 기정사실!
“주숙이?”
북평에 소식이 전해진 것은 열흘 만이었다.
주체는 화병으로 병석에 누워 있다 말고 소식을 들었는데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없다.
북평에도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데 우양, 주탁 등 무장들이 문 앞에서 체포되어 단근질을 당해 불구가 되지 않나, 그런가 싶더니 또 보름 전에는 공부시랑이었던 장병 및 사귀, 송충, 경현 등이 포정사사, 도지휘사사, 병마도독으로 임명되어 올라왔다.
오자마자 장병은 세무감사에 나서는 등 도처의 행정 부서들을 벌집처럼 쑤시고 있었고, 좌군도독이 된 송충은 거용관의 군병들에게 느닷없이 군비가 부족하니 둔전屯田*(*군량을 충당한다는 취지로 황무지를 개발, 농토로 바꾸는 것)을 가꾸라고 명령했다.
국경만 지키는 것도 벅찬 병사들이 졸지에 자갈밭을 매고 농사까지 짓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경현은 산해관으로 들어가 제대로 도독 행세를 하며 내 부하인 양 부총령인 주능朱能 등 장수들을 부리고 있었다.
왕부의 감시는 가일층 강화되어 산동도위부까지 가세해 눈을 번뜩이고 있을 정도! 부친상을 당한 아래 장례식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온 울화까지 보태져 화병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식을 듣고 온 도연의 표정도 돌같이 굳어져 있었다.
“황상을 비방하셨다 합니다. 우려했던 일이 시작된 것으로 주군을 표적으로 한 일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이야기 나왔던 대로 주숙은 주체의 동모제同母弟로서 한 어머니에게서 난 친동생이었다.
주원장의 본처인 마 황후가 회임을 하지 못해 비妃들이 낳은 아들 중 뛰어난 아이들을 적자로 삼았다 했듯 주체는 고려에서 보내진 공비가 출산한 아들이었고, 주숙 역시 공비의 소생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우애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를 쳐 왕부의 힘을 줄이는 등 주체를 흔들어 또 다른 죄를 만들어 내자는 뜻이었다.
주체의 주먹이 으스러질 정도로 움켜쥐어졌다.
계속 상태가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주숙이 죽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래도 저래도 울화가 치밀었으나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 상소문을 썼다.
소식 들었사옵건대 주왕의 행동에 불경함이 없지 않은 듯하옵니다. 하오나 원하옵건대 지친至親의 정을 아끼시어 온정을 베푸소서. 백성들의 동요가 우려되나이다. 일월의 광명함과 천지의 인덕으로 선정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곡히 탄원 올리나이다.
절대 흥분하거나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그야말로 황자징의 계교에 넘어가는 꼴이었으니까.
그러나 뭐, 탄원은 소용없었다.
여기에서 대단히 황당하다 싶은 사실史實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렇게 쓴 주체의 상소가 건문제에게 전해진 것은 보름 후였다.
“……!”
상소문을 읽자 건문제의 심경도 흔들렸다. 주숙도 숙부였다. 아버지의 형제. 즉위하자마자 숙부를 거덜 냈으니 마음이 편할 리는 없는 것이었다.
다시 황자징을 불렀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숙부를 폐위시켰으니 이래서야 민심을 얻을 수 있을지요? 삭번을 중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자징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하기 전에 말했다면 몰라도 이것으로 그들 일파는 완전히 번왕들과 등을 돌린 셈이다.
여기에서 건문제가 마음이 약해져 삭번을 멈추고 번왕들과 가까이 하기 시작하면 어찌 되는가.
크게 건문제를 꾸짖으며 동문각에서 한 말 이상의 명언(?)을 남겼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옵나이다! 일찍이 태조께서는 연왕에게 태위를 전하실 뜻을 지니셨습니다! 그때 일이 그대로 진척되었다면 황상께서는 결코 오늘의 보위를 누리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부디 한번 작정하신 일을 번복하지 말아 주셨으면 하나이다! 취하실 바는 오로지 선수를 쓰는 일뿐이나이다!”
왜 선수를 써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건 뭐, ‘널 황제로 만든 게 우린데 배신할래?’ 하는 소리였고, 스승으로 받들어 온 황자징의 강경한 주장을 십육 세의 황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딱한 일이지만 달려온 주체를 돌려보내는 등 번왕들을 만나지 못했고, 일파에 둘러싸여 금의위까지 접근하지 못하는 지금, 그는 고립된 상태와 같았으므로 이래도 저래도 그들만 믿어야 할 형편이 된 것이었다.
자신을 태위에 올려 준 사람들이니 친밀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공과 사가 다른 것을 생각지 못하고 너무 쉽게 칼자루를 넘겨주고 말았던 것.
“그러면 알아서 계속……!”
영민함과 지혜로움이 극에 달한 것을 영혜英慧하다 표현하는데, 전해지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어쩌겠는가.
황제가 이러니 회오리는 계속될 밖에.
“죄인 주숙과 가족들을 당장 운남으로 유배시켜라! 폐하의 안전에 더 힘쓰도록 하고! 계획을 계속 진행한다!”
압송된 주숙은 폐서인되어 그날로 칼을 쓴 채 운남 벽지로 유배되었고, 환관들까지 대폭 물갈이가 되었다.
도깨비놀음이 더 심화된 것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각! 더 결정적인 진짜 도깨비놀음은 어이없게도 세외世外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도성�都城.
몇 번인가 거론된 바 있었던 곳으로 몽고에 위치한 북원군의 전략 기지이자 도성인 곳이었다.
십만의 원군이 집결해 중원의 재침공을 노리는 곳.
“막북왕漠北王?”
길게 찢어진 그의 눈이 기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넓은 이마에 시커먼 피부, 몽고 전통의 가벼운 복장을 한 그는 열흘 전 기묘한 연락을 받고 이도로 달려왔는데 벤야시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와랄(오이라트)과 달단으로 갈라져 내전 중인 몽고의 달단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동몽골의 지배자인 셈이었다.
북원을 통합시켜 중원을 치고 옛 원을 되찾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인물로서 거칠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자이기도 했다.
도착한 연락은 새로 등극한 건문제가 비밀리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었는데, 와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가관도 아니다.
“그러니까 건문제가 나를 막북왕으로 인정하고 형제로 여길 테니 친선을 도모하자 이건가? 병력을 전진시켜 북평왕부를 좀 공격해 달라?”
주적注敵 중의 주적인 사람을 왕으로 봉하고 형제로 삼는다?
완전히 귀신 따까리 같은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 명을 받고 온 만큼 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연왕이 반란을 꾀하려 해 삭번코자 하지만 세가 만만치 않아서. 원군이 장성을 압박하면 한눈팔 여가가 없을 것입니다. 북평군이 출정하면 왕부를 들이쳐 잡아내려 하는 것입니다.”
“거 묘책이로군!”
벤야시리의 눈빛이 더욱 기묘해졌다.
정말 묘책인 것이었다. 북원으로 하여금 북평군을 치게 한 후 주체를 잡겠다는 희한한 이야기.
“누가 이런 계교를 생각해 냈는가?”
“황자징, 황 태상시경입니다.”
“생소한데 무얼 하던 사람이냐?”
“지난 한림원의 수찬이셨던 분입니다.”
벤야시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다! 이야말로 공명도 따라가지 못할 계책이거니와, 역시 중원에는 인물이 많군! 요청대로 이도군을 장성 앞까지 전진시켜 공격할 것이니 그리 전하라. 단, 장성 앞에 갈 때까지는 요령껏 북평군을 잡아 둬야 한다. 주체와 도연이 눈치채면 더 전에 일을 벌일지도 모르니.”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신은 한시라도 있기 싫다는 듯 서둘러 물러 나왔다.
‘냄새가 여간 아니군. 아무리 더워도 그렇지 왕이라는 자가 가죽조끼 하나만 입은 채 맨 몸을 드러내고 있지 않나, 달리 오랑캐가 아니야.’
대충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야 무슨 생각을 하든, 물러 나가자 벤야시리 등 수장들의 눈빛은 더욱 기묘해지고 있었다.
“철부지가 황제가 되었다 듣긴 했습니다만, 내란의 조짐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북평을 쳐 달라?”
벤야시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묘한 계책이지! 그렇게 하면 확실히 주체는 죽게 될 테니. 암! 북평도 중원도 다 무너지는 최고의 묘책이고말고!”
“하늘이 환도還都를 돕는 듯하군요! 마침 와랄과의 힘겨루기도 끝나 가는데.”
벤야시리의 눈이 으슥해졌다.
“은밀히 전력을 집결시켜라! 단숨에 북평을 무너뜨리고 금릉으로 진격할 것이니!”
“명!”
참 기도 안 찰 원교근공의 책략이 세워진 것이었다.
이야말로 호랑이를 집 안으로 끌어들인 셈이 아니겠는가.
운명의 주사위 (1)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직 천하에 몇 되지 않았다.
정확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벤야시리와 수장들, 사신으로 찾아간 자, 황자징, 제태, 이들뿐으로서 중원 쪽에서는 서넛, 오히려 북원 쪽에서 더 많이 아는 셈이었다.
막여사의 눈빛이 다시 번쩍이기 시작했다.
“북원에 사신?”
변함없이 앞에는 석천중이 함께 있었는데 흡사 소태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그렇다 하더군. 황자징이 보낸 모양인데 무슨 내막인지는 모르네. 순문이에게서 갔다는 연락을 받았어. 포정사에 장병이, 사귀가 도지휘사가 되었다더군. 북평안찰부는 이제 우리 산하가 아닐세. 전례 없이 문관이 군도독이라니 대체 무슨 꼴인 것인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우려했던 대로 도위부에도 화가 미친 걸세. 솔직하게 그들이야 우리가 밉겠지. 홍무 폐하의 직속에서 압박해 왔으니. 무리한 짓을 한 친구들도 작지 않았어.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었지. 소수로 군·관·민을 누르자면 공포심을 줘야 하거든. 아니면 체제가 유지될 수 없으니.”
“덕德으로 할 수도 있잖나.”
“아무나 다 남을 승복시킬 덕이 있는 게 아닐세. 베풀어도 좋게 승복하는 사람은 더 드물고. 다 자신들이 똑똑하고 잘나서 잘해 주는 줄 알고, 베푼 사람을 오히려 우습게 여기네. 그나마 태평세월이라도 된다면 모르겠지만 당장 세상을 휘어잡아야 했던 홍무 폐하의 체제에서는 통하지 않는 일인 걸세.”
별로 틀린 말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도 각오를 했었어. 세상이 바뀌면 우리 쪽도 다칠 것이라 봤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문사인 사람들에게 군부를 맡기다니? 머리만으로 되는 영역이 아닌데 완전히 잘못된 일이라 보네.”
막여사도 여기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분명히 머리로 되는 세계가 아니지. 적당히 버티다가 사직서를 쓰라고 하게. 해흥이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