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습무사-106화 (106/150)

# 106

비적匪賊 (6)

원기의 눈에 얼핏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하나 사사로운 감정으로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감사드리면서 그럼 이만……!”

한 번 더 포권을 취해 보인 후 급히 명령했다.

“전하의 안전을 위해 나눠 가기로 한다! 서둘러라!”

“구해 주신 대협들께 감사드립니다!”

“하-!”

콰두두두두두!

그러자 부상자들을 마차에 태운 우양, 주탁 등 군장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일제히 포권을 취해 보인 후 지체 없이 남하할 때 그러했듯 전속력으로 마차와 말을 몰아 다시 북쪽으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서주성을 지나면 오래잖아 하남, 산서, 산동으로 갈라지는 나들목이 나온다. 그곳에서 마차들은 셋으로 나눠 각자 다른 길로 달릴 것이다.

내막 모르는 이들은 어느 마차에 주체가 탔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 경로를 나눠 달리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

계속 마차를 노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젠 추적해도 소용없다. 마차 셋을 다 잡아도 소용없는 것이었다.

위험이 닥치면 이젠 저들도 마차를 버리고 피할 것이고, 주체가 없음을 알면 상대도 뒤쫓지 않을 것이니까.

위험한 것은 역시 여기였던 게 확실했다. 아직은 주체가 안전한 곳까지 가지 못했을 것인 만큼 사라진 게 확인되면 도처에 비상을 걸어 따로 추적을 할 것이었으니.

멀어지자 흑의인은 비로소 시선을 옮겨 나중에 나타난 봉을 든 오십여 인물들을 향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있었다.

“흠흠! 그럼 우리도 이만!”

그들도 두건으로 얼굴을 감추고 각자 제멋대로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시선이 닿자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눈길을 피해 슬그머니 나타났던 숲 속으로 어영부영 사라져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오래잖아 주위에는 흑·백의인과 십여 명의 인물들만 남았는데, 흑의인은 비로소 애매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자네들이 여기에는 또 웬일인가?”

그러자 또 이상한 일이 있었다.

각자 나타났지만 아는 사이인 듯 백의인이 먼저 크게 화가 난 시선을 그에게 보냈고, 십여 명 중 하나가 말문을 열었다.

“히히! 하는 게 수상해서 말이지. 떠난 후 곧 전서구로 알아봤네. 산채에 오지 않았다 하더군. 그렇다면 갈 곳이란 게 뻔해서 달려온 것일세.”

흑의인의 눈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고맙네. 자네들이 아니었으면 크게 위험할 뻔했어. 난 그냥 일이 어찌 되는가 궁금해서 갔다가, 돌아서는 모습을 보니 몹시 마음 아프더군. 걱정도 되고, 강소를 벗어날 때까지만 뒤따라 보기로 했던 걸세. 그랬더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군.”

난처한 시선으로 백의인의 눈치를 살핀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꾸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이건 아주 무모한 짓이야. 나야 그렇다 치지만 자네들은……!”

그러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십여 명 중 엄청나게 눈빛이 번쩍거리는 회의인이 휙 고개를 저으며 잘라 말했다.

“바보가 아닐세. 여러 가지를 생각했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뭔지도 모르지 않아. 이건 자의自意일세. 자네를 만난 게 동기가 되긴 했지만 우리들 인생에는 우리가 주역이지. 그러니 자꾸 미안하다는 소리 하지 말아 줘. 우린 좋은 일을 할 기회를 만들어 준 자네가 더 고마우니.”

그들의 인생에는 그들이 주인공!

말인즉 맞았다. 사람이란 누구나 각자의 인생이 있고 그 삶에의 주인공은 본인들이다.

어느 누구도 남의 인생을 대신해 줄 수 없고, 각자의 갈 길은 각자가 결정해 일구어 간다.

하나에 초점을 맞춰서 그렇지 바꾸어 다른 누군가를 조명하면 그가 곧 또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보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다.

멋진 말이라 생각하며 흑의인은 감격 어린 눈빛으로 모두를 살폈다.

“그렇게 이야기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틀림없이 자네들은 모두 천하의 대협이 될 걸세. 개개인이 모두 칭송을 받으며 무림의 전설이 될 거야.”

포권을 취해 보인 후 힐끗, 한 번 더 화난 눈빛을 하고 있는 백의인의 눈치를 살핀 후 얼른 눈총을 피해 이번에는 앞서 쓰러뜨린 대한에게로 다가갔다.

“유 대협!”

대한은 여전히 죽은 듯 큰 대자로 뻗어 있었는데, 우려스러운 듯 흑의인이 상태를 살피려 하자 또 희한하기 그지없는 일이 일어났다.

여전히 뻗어 있었지만 대한의 한쪽 눈이 슬그머니 뜨여진 것이다.

그러더니 깨알 같은 어조로 한다는 말이!

“어, 괜찮아. 확실히 다녀왔나?”

흑의인은 피식, 두건 속으로 실소 지으며 역시 소리 죽여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헤아려 주시지 않았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대한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것 같았다.

“자식들이 느닷없이 와서 말이지, 역적을 처단하는 일이니 도우라고 눈을 부라리는 걸세. 도리 없었지. 알았으니 어서 가 봐.”

뻗은 척 다시 눈을 감았다.

흑의인도 모르는 척 다시 돌아와 주섬주섬 도처에 깔린 시체들을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백의인 등 나머지 십여 명도 함께 시체를 정리했는데 유독 잘려 나간 한상필의 목을 보고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백 번 죽여도 시원찮을 자식!”

공처럼 ‘퍽!’ 차 버렸다.

그러고는 흑의인과 함께 다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어, 꽤 얼얼하군.”

비로소 대한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일은 모르겠지만 당장은 어느 놈이 죽일 놈인지 확실히 알겠군. 설마 이놈이 한상필이었을 줄이야. 이런 놈까지 끌어들여?”

철컥! 떨어진 대환도를 주워 다시 허리춤에 꽂은 후 ‘뻥!’구르고 있는 한상필의 시체를 또 공처럼 걷어차 십여 장 밖으로 날려 버린 후 목을 싸잡고 흔들흔들 흑의인들이 사라진 반대쪽 숲으로 들어갔다.

이래도 저래도 동네북이 된 거마.

하지만 뭐, 그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이쯤은 아주 양호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로부터 한 시진.

“하-!”

두두두두두두!

멀리 떨어진 서안의 남쪽, 서현에서 안휘 쪽으로 가로지르는 대로에 꽤 재미있는 일당들이 나타났다.

추룡, 악벽강, 장청, 송민, 전소, 한자방, 임백호 등, 또 그 일당들이 여기에는 무슨 일인가 싶게 나타나 신 나게 말을 치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뭐,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니었다.

앞서 내용은 다 나왔고, 원기를 도운 흑의인이 바로 추룡, 백의인이 악벽강, 나머지는 하는 짓이 수상쩍다 싶어 산채에 연락을 취한 후 달려온 친구들임을 알 수 있으니까.

악벽강의 화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가가! 실력은 알지만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것 알지요?”

찔끔, 추룡은 시선을 피했다.

옷을 또 갈아입은 듯했고 얼굴에 붕대까지 감은 모습이 높은 언덕배기에서라도 구른 사람 같았다.

“아, 예. 잘못했습니다. 진짜 일이 어찌 되려는지 궁금해서 와 본 것이었어요. 싸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악벽강은 검미가 쫑긋했지만 그러나 심하게 바가지 긁지는 않았다.

“많이 다치지 않았나요?”

추룡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대충 대답했다.

“그냥 잔 상처뿐입니다. 녀석이 얼마나 드센지……. 잡아서 큰 다행입니다. 설마 도마 같은 자가 나설 줄은 몰랐는데, 끔찍하군요. 호면도 유 대협이 물러서 주셨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싸웠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호면도, 호면도황 유곡!

전소가 씩 웃었다.

“소저와 힘을 합치니 더 가공스럽더군. 호흡이 척척이던데 두 사람을 누가 당할지 몰라. 그냥 아버님과 한번 붙어 보지?”

추룡과 악벽강.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은 정말 막강 연인에 찰떡궁합이다.

특별히 뭔가를 약속하고 싸우는 것도 아닌데 몽마를 상대할 때부터 그냥 알아서 박자가 척척 맞았다. 그래서 칠천마의 둘.

추룡은 고개를 갸웃했다.

“해 봐야 아버지에게는 어림없네. 제외하고 아무래도 나중에는 자네들일걸. 보니 자네들이야말로 호흡이 척척 맞고 실력이 일취월장이던데 오래잖아 분명히 우리를 능가하고도 남지?”

“말이라도 듣기 좋군! 물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걸세만!”

변함없이 만족하게 웃는 얼굴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앞일이 걱정되어 왔다고 했듯 무난히 주체가 입궁해 윤문을 만나 화합되기를 기대했지만 상태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주윤문은 그를 밀어냈고, 누가 계획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습격까지 감행했으니 이야말로 점입가경 아닌가.

오로지 윤문이 아닌 다른 자의 장난이기를 바랄 수밖에.

그냥 한 가지 의문만 남았다.

마지막에 나타난 오십여의 인물들이 누군가 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정체 역시 사실 짐작하기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이 어떻게 거기에 나타났는가 하는 게 의문이었다.

까닭이 있으니 나타났겠지만…… 한동안 주저하고 있었던 일로서 고심 끝에 추룡은 돌아가서 소림사에 서찰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권력의 횡포 (1)

피식, 막여사의 입가에 실소가 떠올랐다.

“역시 무사히 돌아갔군.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도깨비놀음을 한 것인가.”

회안 사건이 생긴 지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이즈음 중원 전역에는 들썩하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는데, 첫째는 역시 홍무제의 장례에 대한 것이었다.

가장 황당한 것은 홍무제의 장례가 주체가 회안에 도착한 다음 날, 속전속결로 치러졌다는 것인데 어지간한 사람도 구일장을 치르는 시대에 삼 개월 이상, 칠 개월 장*(*교통이 불편하여 생긴 관습. 빨리 장례를 치르면 멀리 있는 친지들 및 신하들이 영결을 볼 수 없어 신분이 높을수록 기간을 길게 했다.)으로 치러지는 황제의 장례를 칠 일 만에 치른 예는 역사에 없었던 일이었다.

온갖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숙부인 번왕들이 금릉으로 오면 무슨 변이 생길지 몰라 겁을 낸(?) 대신들이 서둘러 장례를 치른 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고, 번왕들을 만나기 싫어 주윤문이 그랬다는 말도 나돌았지만 뭐가 정확한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초유의 신속 장례라는 점이 돋보이는 국장으로서 묘는 금릉의 남쪽 종산 기슭에 세워졌다.

그리고 둘째는 새 황제의 즉위에 대한 소문이었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또한 주윤문은 속전속결로 황제로 등극했다.

묘호를 혜종惠宗, 시호를 양황제讓皇帝라 한 그가 바로 건문제였다.

셋째는 연왕 주체에 대한 소문이었다. 막여사가 예상했던 대로 모든 사람들은 그를 칭송했다. 눈치를 살피느라 타 번왕들은 금릉으로 향하지 않았지만 그는 북평에서 단숨에 회안까지 치달려 왔다.

부친에 대한 효성이 빛나고 있었고, 비례해 회안까지 달려온 그를 되돌려 보낸 누군가들은 역시 아주 졸렬한 인물이 되고 있었다.

겁을 내어 그랬건 만나기 싫어 그랬건 속전속결로 치른 장례식까지 싸잡아 욕을 먹고 있었고, 모두가 윤문의 그릇이 작다, 주체야말로 황제감이다, 하는 말들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지어낸 것인지, 시기에 맞춰 요가謠歌라 해야 할지 아주 특이한 노래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제비[燕]를 쫓지 마라, 제비를 쫓지 마라. 제비를 쫓으면 날로 더 높이 날아, 제기帝畿까지 오르리라.

주체가 연왕인 만큼 제비가 주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내용 속에는 쫓기는 주체가 나왔고, 그럼에도 무사히 돌파해 나간 것 등 그의 기상까지 암시된 노래인 것 같았다.

석천중은 쩍쩍 입맛을 다셨다.

“글쎄, 뭐, 나야 멀리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지. 유언이라니 유언인 줄 알고 다녀갔다니 갔는가 보다 할 수밖에. 그냥 좀 석연치가 않군.”

“제대로 된 일이라 생각하나?”

“아, 글쎄, 나야 뭐, 조금 심했다 싶긴 싶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아. 뒤처리라도 좀 확실히 하든지. 무슨 꼴인지 원.”

막여사는 냉정히 말했다.

“잘못된 걸세. 어설피 머리를 쓴 거야. 회안까지 왔으니 막아도 입궁하리라 계산했겠지. 꼬투리 삼아 처벌하려 했겠고. 하지만 주체는 그걸 알았어. 우연히 그리된 일일 수도 있지만 머리싸움이라면 패한 걸세. 황상이 무조건 잘못한 것이 되니. 부친상 소식을 듣고 만 리를 달려온 아들을 돌려보낸 것이지. 더욱이 유례도 없는 칠일장에다가 무슨 일을 이렇게 하는 것인지.”

손을 깍지 껴 턱을 괴었다.

“처리도 부실해. 하려면 눈 딱 감고 들어오게 해 체포하거나 금군을 동원시키거나. 체면만 생각해서 어설피 건드려 놓고서는! 그의 분노가 눈에 보이는 듯하군.”

주체의 분노.

“도연의 머리인가?”

“모르지. 그냥 다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주인을 그냥 보냈을 리 없다는 것은 확실한 거지. 매우 위험한 자야. 주체를 도모했다 해도 그는 손을 들지 않았을 걸세. 주첨기가 남아 있거든. 그를 군왕으로 세우고 불의를 탄핵하여 일을 벌였을 거야. 연왕도 후사를 당부하고 왔을 거고. 그렇게들 생각이 짧은가?”

대단한 추측이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으려고!”

막여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권모술수를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난 악당일세. 악당의 생각은 악당이 더 잘 알지.”

석천중은 거듭 입맛을 다셨다.

“그래, 악당의 견해로 이제 앞일은 어찌 되겠나?”

“늘 보아 왔던 대로. 주사위가 던져졌으니 승부가 날 때까지 상상을 초월할 도깨비놀음이 시작되겠지. 뭐가 되든 너무 무리만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싶네.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그러지도 못하면서 혼란만 일으키는 것에 신물이 나서 말일세. 덕분에 군을 집결시킨 일 차의 목적은 무위로 돌아갔어.”

도연은 막여사를 독수리라고 했었다.

눈이 정말 먹이를 살피는 독수리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군을 운집시킨 일 차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만약 주체가 화를 당하고 도연이 일어나는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면 정말 무서운 지모를 지닌 셈이었다.

북평.

“어처구니없는 노릇이……!”

역시 막여사의 짐작은 맞은 것 같았다.

사흘 간격으로 원기, 우양, 주탁 등이 왕부로 귀환했고, 주체는 앞서 도착해 있었는데 그의 눈에 한恨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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