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비적匪賊 (3)
막아선 인물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주체의 음성은 금시라도 오열을 터뜨릴 듯한 것이었는데, 사실 상복까지 입고 한달음에 달려온 그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마음일 뿐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리하고 싶사오나 이미 분부가 내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심정을 모르지 않지만 소관들의 사정도 헤아려 주소서.”
“어떻게 이런……!”
주체의 눈자위가 삽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 그가 효성이 지극하다면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리라.
그러나 막아선 관료들도 사정이 있는 것이고, 강을 건너면 역시 항명이 되는 것이었다.
“……!”
주체는 회하 건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급기야는 속이 다 타 버리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는 이윽고 입술을 깨물며 회하의 강변에서 황궁 방향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돌아간다. 마차를 돌려라.”
덜컥, 덜컹!
불꽃을 튀기던 말굽도 마차 바퀴도 모두 힘이 없었고, 돌아선 길은 지극히 암울했다.
“추정되던 일들이 역시 사실화되려는가 보군요. 즉위식 후가 우려됩니다.”
두 번째 마차에 주체와 주고치, 원기가 타고 있었다.
“……!”
주체는 비통한 표정으로 계속 고개만 떨어트리고 있었고, 주고치가 이를 악물었다.
“억측할 것은 없습니다. 황상께서 남기신 유명이 있으시니. 부르지 말라 한 것은 사실 오지 말라 한 분부와 같고, 전하께서는 유명에 따르신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렴 친지간인데 다른 뜻이야 있으시겠습니까.”
한없이 좋은 성품이나 심화가 짙어 폭식을 함으로 뛰기도 어려울 정도로 비만이 되었다고 한 그.
똑같이 엉망인 표정이었으나 그래도 좋게 말하고 있었다.
충격이 작지 않은 것인데 아무리 홍무제의 유언이 그랬다 해도 주체에게는 부친, 조부의 장례에 참석코자 만 리 길을 달려온 자신들을 돌아가라 한 윤문의 처사는 매정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불공대천의 원수가 진 것도 아닌데 부친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남도 아닌 아들에게 보게 해 주면 좀 어떤가.
“……!”
다들 처참한 심정으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차를 호위하며 선두에는 주탁과 우양이 가고 있었는데 무장들도 똑같이 눈이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초상집 개라는 말이 있거니와 자신들이 그 짝이 난 것이었다.
한데 일은 여기에서 모두 끝난 것도 아니었다.
늦기 전에 장례에 참석하겠다는 일념으로 쉴 새 없이 치달려 온 그들이었지만 돌아가는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사흘 만에 서주에 도착했는데, 탑산塔山을 지날 즈음이었다.
퍽-!
“으아아악!”
히히히힝!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릴 무렵, 돌연 예기치 못한 변고가 발생했다.
서주의 관도는 탑산 저변에 펼쳐진 청송림靑松林이라 불리는 솔밭 사이로 나 있었는데, 느닷없이 빽빽한 송림 속에서 빗발치듯 화살이 퍼부어진 것이었다.
“방패 앞으로!”
“웬 놈들이냐!”
다행히 주체 등은 마차를 타고 있었고, 호위군들은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큰 피해는 없었지만 그래도 십여 명이 화살을 맞고 말 위에서 굴러떨어졌고, 우양, 주탁 등 호위군들은 즉각 방패를 앞세운 채 마차를 에워싸며 호통을 터뜨렸다.
“껄껄……!”
“누구냐고? 탑산의 신령님들이시지!”
그러자 또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 일어났다.
느닷없이 빼곡한 송림 속 여기저기에서 흉흉한 웃음이 터지며 삼백 명이 넘는 제멋대로의 차림을 한 자들이 활을 겨누는 등 창검을 움켜쥐고 모습을 드러내며 모두를 포위한 것이었다.
봉두난발의 머리카락에 누덕누덕 기운 옷을 걸친 머슴 같은 허름한 차림을 한 자도 있었고, 가죽조끼 하나만 달랑 입은 채 털이 부숭부숭한 가슴을 드러낸 자도 있었다.
공통된 점은 한결같이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과 눈빛이 야수를 방불케 할 정도로 번쩍이고 있다는 점!
특히 수뇌인 듯한 자들의 눈빛이나 모습은 더욱 장난이 아니었다.
셋으로서 어디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자가 나타났는가 싶을 정도로 칠 척이 넘을 듯한 키에 산만 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대한大漢이 보기에도 섬뜩한 다섯 자 길이의 시퍼런 대환도大還刀를 움켜쥐고 눈빛을 이글거리고 있는가 하면, 더워지는 날씨임에도 헐렁한 흑의 장포를 입은 노인인 듯 하얗게 머리가 센 오 척 반의 인물이 장검을 움켜쥐고 어마어마하다 싶은 잠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세 번째 인물은 이렇다 할 무위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나 눈빛 하나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싸늘한 냉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알려져 있듯 우양, 주탁도 여간한 고수가 아니었으나 그들조차 질리는 느낌이 들 정도.
뿐만 아니라 주위에 선 자들 역시 하나같이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눈빛부터가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만 아무렇게나 서 있는 듯해도 빈틈이 전혀 없어 보일 만큼 강력한 예기가 느껴지는 자들이었다.
껄껄 웃으며 대한이 우양, 주탁을 눌러보며 으르댔다.
“호위가 심한 것을 보니 필경 마차 속에 보화가 실려 있으렷다? 여러 말 할 필요 없이 가진 것을 다 내놓고 순순히 목을 늘어뜨려라! 신령님들의 지역이니!”
황당하다 싶은 소리였다.
우양, 주탁이 경각심을 곤두세우며 대한을 향했다.
“헛소리를! 설마 너희가 비적匪賊이라는 소리냐?”
사실 터무니가 없었다.
명칭만 달리하고 있을 뿐 비적이란 산적과 유사한 노상강도를 일컫는 것인데, 누가 생각해도 이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인 것이다.
차림새 하나만 없어 보일 뿐, 삼백이 넘는 수효에 하나같이 고수의 면모를 보이는 노상강도? 대담무쌍하게도 일국의 번왕을 털려고 하는 것이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이 주체임을 모른다 치더라도 갑옷까지 입은 군장들이 호위하는 마차를 털고자 한다는 것!
천하를 다 뒤져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비적들은 없다.
더욱이 이 정도의 떼도둑이라면 소문이 나도 보통 크게 나 있지 않을 것인데 이런 패거리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거니와 이곳은 나타날 만한 장소도 못 된다.
멀지 않은 곳에 탑산이 있긴 하지만 야트막한 곳으로 그다지 거친 산도 아니었는데 이런 곳에 엄청난 떼도둑?
하지만 대한은 거듭 껄껄 웃으며 도적임을 시인했다.
“비적인지 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탑산에서 신령 노릇을 하고 계신다! 순순히 창칼을 버리고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다!”
황당한 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어쨌건 위기였다.
오십의 호위군 중 십여 명이 기습에 쓰러진 상태에 삼백에 달하는 무리에 둘러싸였으니.
더욱 문제는 활이었다. 포위한 무리의 앞 열에는 오십여 명의 일당이 팽팽히 시위를 당기고 있었는데 살펴보니 그것이 또 각궁角弓이다. 활 중에서 가장 강한 강궁! 거리까지 가까운 만큼 가장 큰 위험 요소인 것이었다.
방패를 들었지만 전신을 다 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을 쏠 경우 빠져나가기는 영영 어려운 것이었다.
쏘듯이 눈을 번쩍이며 마차에서 원기가 내려섰다.
“탑산보다 네 녀석의 덩치가 더 큰 것 같구나! 이런 눈빛을 하고 도적 행세를 한다는 게 말도 되지 않거니와, 누가 보낸 것이냐! 순순히 불어라!”
그러나 대한은 눈 하나 깜박 않고 원기를 내려다보며 윽박질렀다.
“감히 누가 신령님을 오라 가라 할 수 있다는 소리냐? 속에 타고 있는 게 또 누구냐? 일단 다 나오라 해라!”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치!
그러나 주체는 내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강궁이 겨눠진 상태에 상복 차림인 그가 나온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원기는 수뇌인 듯한 셋을 쏘아보며 냉소 지었다.
“더 이상 나올 사람은 없다! 누가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뭐가 되든 너희는 뜻을 이루지 못할 거다! 관을 보기 전에 순순히 물러가라!”
얼음 알 같은 눈을 번쩍이며 세 번째 사내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본다면 너희가 보겠지. 날개가 달렸다 해도 오십의 궁수에 삼백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테니.”
사실이었다.
분명히 절체절명의 위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내는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는 듯 휙, 궁수들을 보며 싸늘히 명령을 내렸다.
“모두 죽여라!”
한데 이때였다.
“하아아압!”
“흡……?”
파파파파-!
또 한바탕 화살의 소나기가 쏟아질 찰나, 장내에 실로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느닷없이 면사인들이 나타난 숲 속에서 쩡, 하는 호통과 함께 또 하나의 시커먼 인영이 도약해 올라 원기 등을 겨냥한 좌측면의 궁수들 위로 떨어져 내리며 그대로 파파파, 서너 명의 머리, 등짝 등을 원앙각법으로 걷어차는가 싶더니 연거푸 번개같이 주먹을 날려 또 서너 명의 턱을 돌려놓은 것이었다.
얼마나 빠른지 몸놀림이 아예 보이지도 않을 지경!
“웬 놈이냐!”
느닷없는 일에 궁수들 및 일당들의 사이에는 당연히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신들 외에 아무도 없을 것 같았던 숲에서 난데없이 매복을 한 자가 더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공격까지 해 온 것이니.
“반격!”
“흐아아아!”
콰차차차창!
“으아아악!”
하지만 원기나 우양, 주탁 등에게는 이보다 좋은 절호의 기회가 있을 수 없다.
멈칫, 눈길을 그쪽으로 돌리는 사이 ‘쫙!’ 방패를 앞세운 채 번개같이 원형으로 밀고 나가 숨 돌릴 겨를조차 없이 창검을 휘둘러 궁수들 및 면사인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모두가 군장급인 만큼 삽시간에 사방에 피가 낭자하게 뿌려질 정도!
그러나 보여 준 기세가 그러했듯 면사인들 역시 결코 수월한 자들이 아니었다.
“침착히 대응하라! 압박!”
당황함은 잠깐, 총지휘자인 듯 냉안인의 입에서 재차 명령이 떨어짐과 함께 그들의 반격 역시 시작되었다.
“하아아아-!”
쾅! 쾅!
“왓!”
“으아아악!”
군장들의 공격에 맞서 또한 일제히 창검을 휘두르며 접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데 특이한 것은 싸움의 형식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사방으로 흩어진 혼전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군장들도 면사인들도 똑같이 흩어지지 않고, 면사인들은 포위한 그대로 밀고 들어오려 하고, 군장들 역시 포위를 뛰어넘거나 하여 자유롭게 싸우는 형식이 아닌, 방패를 앞세운 채 밀고 들어오려는 면사인들을 필사적으로 막아 내려 하는 그런 접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군장들은 당연히 이런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체를 호위하는 것이 목적인 만큼 그가 마차에 있으니 바깥쪽으로 치고 나갈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장들은 그렇다 치지만 면사인들의 행동 역시 수상쩍다 볼 수밖에 없었다.
삼백의 수효에 군장들을 제압하려면 하나씩 둘러싸고 협공하는 게 빠를 것임에도 그러지 않고 전체를 포위한 채 계속 압박해 들어오는 공격 양상을 보이고 있으니 이는 필경 계획하고 온 것이었다. 혼전을 벌이는 사이 마차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한다는 것.
압박하고 있는 형상 등이 역시 비적들의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큰 것이었다.
“하아아!”
쾅! 쾅!
“흡!”
무예나 공격하는 방식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공격할 때는 일제히 군장들을 향해 소나기 칼놀림을 퍼부었고, 번개같이 장검을 휘저어 하체 공격까지 감행해 오곤 한다.
방패에 갑주를 입은 상대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되는 공격이었다. 군 무예의 특성을 아는 자들이라는 뜻이었는데, 관병들과 싸우면서 체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역시 미심쩍은 점이 보이는 것이었다.
수뇌인 자들은 아예 나서지도 않았다. 냉정하게 마차를 노려보며 칼날같이 눈만 번쩍이고 있을 뿐!
원기 역시 마차의 문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떠났다가는 어떤 불상사가 발생할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시작부터 이미 최악이었다. 마주쳐 나간 군장들은 방패를 앞세운 채 힘을 다해 원진을 좁혀 오는 그들을 막아 내려 하고 있었지만 수효가 너무 많은 것이다.
개개인의 무력이라면 위일 수도 있겠지만 자유롭게 싸우지 못한다는 불리함이 있었고, 열 배에 달하는 수효가 되다 보니 계속 안으로 밀려들었다.
“하아-!”
촤ㄱ촤ㄱ촤ㄱ!
“으아아악!”
“크아!”
가장 맹위를 보이는 것은 흑의인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는 마차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원진의 바깥쪽에서 면사인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나설 당시의 움직임도 그랬지만 몸놀림이 실로 예사롭지가 않다.
훌쩍한 육 척의 키에 그 역시 두건을 썼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넉 자 반의 장검을 섬뜩하다시피 휘두르고 있었는데, ‘일거수일투족!’ 칼이 번쩍일 때마다 놀랍다 싶을 정도로 면사인들이 하나씩 거꾸러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검이 무성검無聲劍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검수들이 접전을 벌일 때는 칼이 얽혀 귀를 찌르는 검속성이 터져야 하는데, 그의 싸움에는 놀랍게도 그런 것이 없다는 것!
면사인들이 치고 들어오면 번개같이 허리를 틀거나 발끝을 놀려 몸을 피함과 동시에 장검을 번뜩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덮쳐 온 자는 여지없이 피를 뿌리며 거꾸러졌다.
상대가 한둘도 아니었다. 인원이 많으므로 면사인들은 마차를 압박해 가는 외에 바깥쪽에서 무리 지어 흑의인을 공격했는데, 유리하려면 역시 둘러싸고 포위 공격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포위되지 않았다. 둘러싸면 바로 발끝으로 땅을 차고 훌쩍 면사인들을 뛰어넘어 오히려 뒤쪽에서 살검을 날리곤 했던 것이다.
몸놀림이 그야말로 깃털 같고 빛살과도 같았다. 바람같이 자유로우면서 절도 있는 칼놀림이 사뭇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할 정도다.
이런 대단한 검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누구일까.
하지만 그에게도 급박한 순간이 닥쳐왔다.
아니, 보기에는 지극히 냉정함을 지닌 채 면사인들을 상대하고 있는 그였지만 실제로는 그도 매우 다급해하고 있었던 터인데, 그에게도 중요한 것은 마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