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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풍운大明風雲 (7)
한데 그 규모가 실로 작지 않았다. 여기에 악불비는 악충보의 전 자산을 투입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나날이 수십 석씩 계속 옮기다 보니 오래잖아 천 석이 넘어섰다.
“쌀 한 가마니면 한 사람이 일 년은 먹을 양식이 되는데 왜 이렇게 많이 적재하는 것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너무 지나친 양이 들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추룡은 또한 의아할 수밖에 없었는데, 악벽강이 미소와 함께 일러 줬다.
“위기 대처령은 갑, 을, 병, 셋으로 나뉘는데 갑호 대처령이 내려지면 기본이 오천 석입니다. 우리만 먹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병호령은 화적들의 침습 같은 경우에 내려지는 일반 수준의 비상령입니다. 을호령은 대방파 간의 싸움이 있을 때 내려지는 것이고요. 갑호령은 환란 대처령입니다. 나라에 큰 환란이 있을 때 발효되는 것으로, 거의 내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려지면 규모가 커지게 마련이지요. 곳곳에 적재하는 양곡들은 우리들만 먹는 것이 아니라 난을 피해 산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모두가 먹을 양식인 셈입니다.”
“향용이 그런 일도 하는 것인가요?”
“그럼요. 결정적인 시기에 사람들을 대피시키기까지 하는데요. 조부님께서 보를 이끄시던 원 말에는 연속된 흉년으로 기근이 들어 곡식을 보기도 어려웠지만, 그때도 삼천 석을 마련해 적재했다 들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뜻밖의 이야기였다.
“소문 듣던 것과는 진짜 많이 다르군요. 강호 무림 방파라 하면 허구한 날 영역 다툼으로 싸움질만 한다고 하던데.”
실제 대부분의 무림 방파들이 악충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악벽강은 좋게 대답했다.
“사람인 이상 충돌이 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합니다. 지역을 지키는 곳이 협의 향용이니까요. 허구한 날 싸움이나 할 정도로 형편없는 곳이 향용이라면 존재할 수 있을 리 없겠지요.”
악충보까지는 아니라 해도 다들 바른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한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게, 관과 무림 방파가 무관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런 따위는 터무니조차 없었다.
아무리 치외법권이라 해도 나라 안이고 국법이 있는데 멋대로 향용이랍시고 무장 단체를 만들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등 칼부림을 한다면 관부에서 이를 좌시할 리가 없다.
떼도둑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방파를 세우는 것조차 취약 지구에 거주하는 지역민들의 신임을 얻어 관부의 허가 신청을 받은 후에야 가능했다.
아니면 언제 폭도로 돌변할지 모르는 비허가 무장 단체로서 관의 토벌 대상이 되는 것이다.
추룡과 친구들은 끊임없이 양곡상과 북협을 오가며 땀을 흘렸다. 따로 수련할 필요 없이 엄청난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런 속에 한 달.
이것도 운이라 봐야 할지, 명 조정에 예기치 못한 일 하나가 발생했다.
“삼왕야三王爺께서 돌아가셨다! 조기를 올려라!”
둥! 둥! 둥……!
산서성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알려져 있듯 홍무제에게는 적·서자를 합쳐 스물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각처의 번왕으로 봉위된 바 있었다.
그중 가장 걸출한 인물들이 장남 황태자 주표, 섬서 서안왕부를 차지했던 주상, 산서 태원왕부를 차지한 주강, 그리고 북평왕부를 거느린 연왕 주체 등이었는데, 그중 셋째 아들인 진왕 주강이 또 병사하게 된 것이었다.
홍무제로 보면 무척 불운한 일로, 일찍이 장남이었던 주표가 죽어 슬픔을 겪은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묻힌 일 중 하나로서 삼 년 전 서안의 주상 역시 급사한 바 있었다.
그러더니 이해 들어 또 태원을 맡은 셋째 아들 주강이 병사한 것이었다.
아들들 중 가장 걸출하다 알려진 세 명이 차례로 숨진 것이다.
스물다섯 명이나 되는 많은 아들을 둔 만큼 없다 할 수 없을 일이지만 장남을 비롯해 가장 실력 있는 아들들이 기이하게 하나하나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병석에 누워 또 사랑하는 아들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홍무제의 심정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그러고도 지속되는 피의 악몽!
-천벌이다! 네가 그렇게 무수한 피를 흘리고 복되길 바란다면 보다 우스울 일이 없겠거니와, 이조차 시작일 뿐이다! 네 후손들은 모두 피를 흘리며 처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닥쳐라, 이놈들! 너희는 나를 배신자라 하나 나는 이 나라를 위해 헌신을 다했다! 일신의 영화를 꾀하지 않았으며 백성들과의 약속을 지켜 악덕한 지주들을 벌하고 토지개혁을 하는 등 세금을 감했고, 법령을 강화해 바르게 나라의 반석을 세운 것이다! 너희가 권력을 잡았으면 이만큼 했겠느냐! 권문의 출신이랍시고 되도 않은 백련 교리를 내세워 명을 거역하고 권좌를 뒤집으려 하던 놈들을 친 나에게 어째서 천벌이 내린다는 것이냐!
결국 마지막 진통이 왔다.
오랫동안 지병과 신경쇠약으로 악몽을 꾸면서도 버텼던 그도 또 아끼던 아들을 잃은 아픔이 겹쳐서인지 급기야 일어설 의지를 잃고 붓을 들었다.
남경에 올라오지 마라. 너를 노리는 자가 많으니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 항상 언행을 조심하고 주변을 경계하라.
그는 한 통의 서찰을 써 은밀히 북평으로 보냈고, 이후 중신들과 태손 윤문을 불렀다.
“짐, 천명을 받아 제위에 있은 지 삼십일 년, 주야로 정무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유익한 것들을 권하였지만 미천한 몸으로 일어난 까닭에 배움이 부족하고 덕망 역시 역대의 군왕들에 미치지 못해 흉혐凶嫌을 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내 가진 모두인 것을 어찌하랴. 기력이 쇠하여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모르나 상사가 생기면 법통에 따라 윤문이 후위를 잇되 백성들이 힘들지 않도록 제례를 간소화하고 번왕들을 부르지 마라. 친족 간의 우애를 지키고 군신지의를 바탕으로 영화로운 국운을 이끌어 나가기를 갈망하노라!”
그리고 또 일 개월 후 홍무 삼십일 년 윤오월!
뿌우우웅∼! 뿌우웅∼!
“폐하께서 붕어하셨다! 만조백관과 백성들은 엎드려 조의를 표하라!”
둥! 둥! 둥……!
주강의 죽음에 이어 명 조정에 겹초상이 일어났다.
혹세에 태어나 고아가 되어 탁발승으로 떠도는 등 평생을 풍운 속에서 살아왔던 태조 주원장이 급기야 일흔한 살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폭풍!
그와 함께 중원 전역은 즉시 어마어마한 소요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삼십 년을 넘게 천하를 지탱해 온 절대 권력이 무너져 여백이 생김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첫째는, 백성들의 혼란이었다.
“질기게 버틴다 했더니 결국 지옥으로 간 거군! 팔십만이 넘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그렇게 철권을 휘두르더니만!”
“말 함부로 하지 말게! 황상은 영웅이셨어! 폭정이 극에 달했던 원을 밀어내고 중원을 되찾았으며, 황제가 되어서도 최선을 다했어! 흘린 피는 부득이하기도 했던 거야! 백련교를 앞세워 걸핏하면 황명을 무시하고 권력을 차지하려 했던 공신들이 나빴던 거지. 강력하게 휘어잡지 않았다면 나라가 지탱되었을 성이나 싶던가?”
“떠나서라도 송곳 하나 꽂을 땅 없이 이곳저곳 떠돌며 소작을 했던 극빈한 부모에, 고아에, 탁발승까지 되어 전전했던 인물이 황제가 되었으니 진정한 풍운아라 할 만하지. 그렇게 자라면서 허물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네. 흠을 잡으려면 전부가 흠이야. 거지, 무식, 고아, 파계승 등등. 그러나 결론은 황제로서 죽었다는 거야. 더 말이 필요한가?”
그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는 여전히 반반으로 갈라지고 있었으나 결국 전무후무한 풍운아風雲兒! 그것으로 압축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불안감들이 훨씬 앞서고 있었다.
“보다는 뒷일이 더 걱정인데, 윤문 전하께서 제대로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이제 열여섯 살이신데……! 아무리 생각해도 천하를 다스리기에는 너무 어려.”
“정말 걱정이 되네. 조정의 권모술수는 상상을 넘어선다고 들었는데……! 더욱이 왕부들과의 갈등도 보통이 아닐세. 모두를 누르고 기략을 펼치실 정도의 위엄과 포용력이 있어야 할 것인데……!”
여차하면 또 피바람이 일어날 판국이라 모두가 가슴을 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도처 왕부들의 혼란이었다.
“어이해야 좋은가!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 마지막 가시는 길을 뵙고 윤문 전하를 알현해야 할 것인데, 부르지 말라고 유언하셨다 하니!”
홍무제의 사망 직후 실제 가장 당혹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도처의 번왕들이라 봐야 옳았는데, 그들을 부르지 말라 한 유언* (*진상이 명확치 않다. 죽기 전 홍무제가 주체에게 서찰을 보낸 것은 확실하나 번왕들을 부르지 말라 한 것은 내부 조작이라는 설說이 훨씬 앞선다. 당치 않은 유언이라 봐야 하는 것으로, 그래야 할 까닭이 미미했기 때문이다.)때문이었다.
번왕들에게 있어 이것은 실로 중대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다 떠나서 홍무제는 자신들의 아버지인데 상喪이 났음에도 아들들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윤문을 만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서둘러 그를 만나 새로 출범할 조정이 나아갈 바를 듣는 등 앞일을 도모해야 할 것인데 그 길이 끊긴다는 것!
결국 윤문은 조정 대신에게만 둘러싸이게 되는 것으로, 당연히 번왕들은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도연의 눈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번뜩였다.
“까닭이 있다면 위험을 피하라는 뜻이실 것입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소환으로 궁실에 갔다가 화를 당한 인물이 한둘이 아니오니. 혹여 생길 불상사를 막고자 하신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 전체는 아닐 것입니다. 힘을 지니지 않아 정쟁과 무관한 왕야들께서도 계시오니.”
주체의 표정 역시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유언을 남기실 당시 주위에 중앙의 사람들밖에 없었던 만큼 나쁘게 생각하면 다음과 같을 수 있습니다. 첫째, 번왕들의 위신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부친상이 났음에도 움직이지 않음을 들어 불효한 성품으로 빈축을 사게 하자는 것입니다. 빌미 삼아 훗날 문책을 할 수 있고, 더 나쁜 예로 태손 전하와 왕야들의 접촉을 막자는 의도가 보입니다. 그것으로 왕야들과의 면담이 차단됨으로 대신들을 중심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대신들 중심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누구의 생각이냐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태손 전하의 뜻이시라면 왕부들과 등지겠다는 뜻과 같사오니 큰 화가 예측되는 일입니다.”
주체는 단호하게 의사를 피력했다.
“즉시 입궁할 채비를 하라! 황상의 뜻이건 태손 전하의 뜻이건 아랫것들의 조작이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가야 할 것이다! 부친상을 당했음에도 자식 된 몸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은 천륜에 위배되는 일이거니와, 어떤 경우라도 태손 전하와 대화를 해야만 한다! 새 시대가 시작되는 시국에 번왕이라는 사람이 후위를 이으실 분을 알현치 않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닐뿐더러, 대신들에게 모든 국정을 맡겨 둘 수도 없는 것이다!”
틀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도연은 반대했다.
“위험합니다. 자칫하면 항명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주군께서는 더욱 그러하십니다.”
하지만 주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상관없다! 다시 이야기해도 부친상이 났는데 자식인 내가 가지 않을 수는 없다! 부르지 말라고 하셨지 오지 못하게 하라 하신 것도 아니다! 목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 된 도리는 해야 할 것이다!”
그로서는 당연한 결정일 수도 있었다.
셋째로, 가장 긴박하게 상황이 돌아가는 곳은 병부였다.
“전군에 비상령을 내린다! 이 시간 후,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각 군부들은 일절 이동이 중지된다! 제 위치에서 대기하라! 종교 및 민간의 모든 집회 역시 금한다! 어길 시에는 군령으로 처벌한 것이다!”
삼십 년이 넘게 이어졌던 절대 권력이 바뀌게 됨으로 도처에 봉쇄령이 내려지는 한편 여백에 생길 문제에 대비해 계엄령에 해당하는 명령이 발효된 것이었다.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었다.
막여사의 눈도 번쩍이기 시작했다.
이순문이 남평의 집으로 찾아온 후 내내 좌불안석했던 그.
어쩌면 그야말로 이제부터 일어나게 될 사태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순문이 찾아와 한 이야기는 향후 조정이 나아갈 방향이나 같았고, 그런 만큼 어떤 회오리가 일어날지 정확히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연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지 넉 달, 홍무제의 부고 소식이 들림과 함께 봉쇄령이 하달되기보다 더 빨리 명령했다.
“섬서 삼군, 지체 없이 연안으로 집결하라!”
그는 어느새 연안도위 대한장군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
콰두두두두두……!
그리고 파란!
마침내 풍운이 시작되었다.
장례에 참석지 말라 한 명을 어기고 연왕 주체가 먼저 금릉으로 치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님, 힘드시겠지만 산채로 모시겠습니다. 가가께서는 전 대협들과 보로 가 주세요! 신속히 움직여야 합니다.”
악벽강도 다시 전과 다름없이 남자의 모습을 했고, 추룡과 친구들도 호구를 조여 입었다.
모두가 백척간두에 선 것이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