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습무사-97화 (97/150)

# 97

대명풍운大明風雲 (4)

이문구는 ‘그래도 역진형을 이루라는 것은 무리다’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꺼내지는 못했다.

장정희가 슬그머니 뒷자락을 잡아당겨 삼가라는 암시를 한 후 먼저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면목 없소이다. 사사司使의 진노, 당연하고, 지휘사의 말씀 역시 옳다고 봅니다. 적이 변칙 공격을 해 오는데 원칙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어떤 경우라도 지휘를 따라잡을 강군을 육성해야 하는 것인데 소장의 불찰입니다. 고삐를 조일 것이니 해량해 주셨으면 합니다.”

좋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막여사는 현재 신분을 감추고 있었고 유일하게 밝혀 이들 중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그 하나였다.

이문구가 맞지팡이를 짚고 나섰던 것은 막여사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힐책하지 않고 막여사도 마주 포권을 취해 보였다.

“참령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무엇이라 하겠소이까. 시험해 본바 움직임이 나쁘지 않소이다. 하나,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전투이니 좀 더 조련에 박차를 가해 주셨으면 싶군요. 약점은 장수들의 의식에 있는 것 같소이다. 선봉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기본 질서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중랑장이 앞장설 경우도 있지 않겠소이까. 진형에 큰 변화가 생길 때는 과감히 좌우익을 맡은 중랑장이 치고 나갈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보오이다. 평소에 그것을 인지시키면 저렇게 진열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올시다.”

“과연.”

장정희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막여사의 견해는 틀린 게 아니었다. 전투라는 것은 사실 승리가 우선하는 것이다. 아군의 의표를 찔러 적이 변칙 공격을 해 오는데 왜 변칙을 해 오느냐 나무랄 수 없고,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사해야 하는 것이 전투이기도 한 것이다.

평소 중랑장들에게 선봉이 되어 치고 나갈 정도의 과감성을 지니게 하고, 치고 나갈 때 당황하지 않고 따르도록 절도 있게 병사들을 조련해 두면 유사시에 전열이 덜 무너지는 것이다.

삭주군의 진열이 흩어진 까닭은 이 자세가 갖춰지지 않아 우왕좌왕했기 때문.

이문구의 눈에도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맞지팡이를 짚고 나섰지만 듣고 보니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사.”

이때 진영 안쪽에서 검은 장삼을 입은 십여 명의 칼날 같은 안광을 지닌 인물들이 두꺼운 장부들을 가지고 와 최혁에게 내밀었다.

중간 중간 접혀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펼쳐 본 최혁의 눈에 다시 퍼렇게 서슬이 일었다.

“뭔가, 이건? 병창과 보급에도 이상이 있다는 말인가?”

장정희, 이문구 등의 안색이 이번에는 핼쑥하게 핏기를 잃었다.

참령실.

최혁의 눈이 얼음 같은 냉광을 뿜었다.

“말씀해 보시오! 병부의 재정에 따라 귀 군에 책정된 보급비는 월 이만 냥이오. 항목별로 다르지만 살촉만 해도 크게 차이가 나고 있는데, 훈련 등으로 소모되는 것을 감안해도 오십만 개가 늘 비축되어 있어야 하오! 하나, 수만 개가 비고, 화약도 군량도 장부에 기재된 것과는 다 차이가 나는데 어찌 해명할 생각이오?”

최혁, 막여사, 장정희, 세 사람만 있는 자리. 장정희의 안색은 그대로 납빛이었다.

마주 앉은 탁자 위에는 장부들이 펼쳐져 있었고, 맞춰 본 장정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어찌 된 영문인지는 소장도 모르겠소이다. 장부상으로는 그대로여야 하지만 늘 소모되는 게 살촉이고 화약이라……! 군량도 차이가 날 때가 없지는 않소이다. 오랫동안 쌓아 두면 상하는 게 있어 처리하고 새로 넣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행정 담당을 문초해 봐야겠지만 장부 정리에서 차질이 생긴 것이 아닐까 싶군요.”

탁! 최혁의 손이 거칠게 탁자에 떨어졌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오! 군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군량이 차 있는지, 병기창이 어찌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

어떤 경우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만큼 장정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최혁은 눈을 번뜩이며 막여사를 향했다.

“장군께 면목 없습니다. 계속 부끄러운 꼴을 보이는데, 안찰사께 보고 올려 즉시 바로잡도록 하겠소이다.”

그리되면 장정희는 끝이 나는 것이다.

최소한 태만으로 치부되고, 부정으로 밝혀질 경우에는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막여사는 고개를 저었다.

“구태여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필부 역시 군을 이끌어 봐서 알지만 장부와 실제는 늘 차이가 나곤 하더구려. 화약과 살촉은 소모품이고, 군량도 곰팡이가 피어 버려야 할 경우가 적지 않더구려. 제때 보충이 되면 좋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런 상황인 것 같소이다. 행정관들의 실수가 아닐까 싶구려.”

일 차에 장정희를 감싸고 나섰다.

“군의 조련 상태를 보니 더욱 그것을 느낄 수 있겠던데 삭주군은 강군이었소이다. 기동력이 여간이 아니더구려. 포대 역시 표적을 계속 바꾸므로 방향을 맞추느라 늦어졌지만 정확도가 여간 아니었고. 평소 장 장군께서 훈련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셨다는 증거올시다. 잠깐 두 사람만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주시겠소이까?”

최혁은 서슬이 퍼런 눈으로 계속 장정희를 쏘아봤으나 막여사의 청에 따랐다.

“문책을 피할 생각은 아예 않는 게 좋을 거요!”

쾅! 세차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막여사는 다시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어쩌다 이런 실수를 하셨소이까? 아무래도 장부 착오가 아닌 것 같구려. 군량 창고의 양곡은 수시로 아래위를 바꿔 주고 묵은 것부터 사용하는데, 곰팡이가 난다는 게 당치않을뿐더러 살촉이나 화약 역시 그렇소이다. 훈련은 늘 하지만 군비 역시 다달이 들어오오. 한발 앞서 보충하게 마련인데 부족하다는 것은 변명밖에 안 되는 것이지.”

“……!”

장정희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래도 심하게 차이가 나지 않아 다행이오. 적당히 둘러대어 무마해 드릴 테니 서둘러 보충하시오.”

장정희의 얼굴에 멈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어째서 살펴 주시는 것인지……?”

막여사는 차분한 시선으로 말을 받았다.

“부하들을 거느리다 보면 있는 일 아니겠소이까. 장졸이 수만인데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한번 기분을 내도 뭉칫돈이 빠지게 되고, 은퇴 시를 생각해 조금 정도의 축적도 생각하는 게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소이다. 과도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쁘지 않을 정도니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

장정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현역에 계실 때부터 여간하지 않은 한 살펴 주시는 성품이라 듣긴 했지만……!”

막여사는 계속 차분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며 말을 받았다.

“구태여 악하게 사람을 대할 필요 있겠소이까. 특히 험지에서 고생하고 계신 분들에게. 하나,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크지 않소이다. 단순한 감찰이 아니라 군의 체제를 새로 정립하기 위해 시작한 감찰이라서 자책점이 올라갈 것이니.”

장정희의 얼굴에 적잖게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 말씀은……?”

막여사는 계속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아시겠지만, 머잖아 조정에 변화가 생길 것이올시다. 미리 대비를 하는 것이지요. 점수를 매겨 옷을 벗길 사람은 벗기고 남길 사람은 남기고 하여 내실을 다지자는 뜻이올시다.”

체제 개편!

“그런……!”

장정희는 바싹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라면 예고되는 조정의 변고, 즉 홍무제의 사후에 대비해 한발 앞서 연안도위부가 반대 세력의 삭번에 나섰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런 때에는 무조건 몸을 사리는 게 좋다. 괜히 허장성세를 부리다가는 당장 목이 잘려 나가게 마련이었으니. 자신의 경우는 살생부에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돌처럼 표정이 굳어지는 장정희를 보며 막여사는 계속 차분히 말을 이었다.

“중앙에서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장군께서도 모르지 않을 것이올시다. 어떻게든 변방에서 고생하는 분들만큼은 남게 하고 싶은데 그러기가 쉽지 않구려. 석 안찰사도 안타까워하는 것 같지만 본인에게 불똥이 튈 조짐이라 어쩔 수 없어하는 분위기요. 큰 결속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도 못한 느낌이니.”

결속.

장정희는 퍼뜩, 탈출구 같은 게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결속이라면…… 혹시 방벽……?”

알아듣는 눈치라 막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 간의 문화 아니겠소이까. 앞이 진창이고 밤이 어두우면 하나로 뭉쳐 밝은 후 길을 찾을 수밖에. 하지만 직분도 그렇고, 그런 쪽으로는 석 안찰사가 신경을 안 썼던 모양이더구려. 그렇다 보니 이쪽 사람들도 눈치만 살피는 느낌이고. 지금이 가장 깊은 밤인 것 같은데 나서 보니 좀 딱하다 싶구려.”

장정희는 역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소이다. 막 장군쯤 되시니 흉금을 털어놓겠지만 석 안찰사님, 정말 무던한 분이올시다. 부임하신 지 오 년이 지났는데 한 번도 사람들을 부르거나 하시지 않고 바위처럼 자리만 지키고 계시니. 그렇다고 주위를 옥죄거나 하는 성격도 아니시고. 직분이 안찰사일 뿐이지 그냥 전형적인 호인인 분이올시다.”

석천중의 기본 성격.

“하지만 그게 오히려 주위를 어렵게 하는 점이 있고, 그로 인해 이쪽 사람들도 좌불안석하는 점이 큽니다. 말씀하신 대로 밤은 어둡고 주위는 늪인데,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야 할지 소장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겠더구려. 이럴 때는 하나로 뭉쳐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기댈 만한 언덕이 없으니. 소장 역시 적잖게 고심하던 터였소이다.”

“석 안찰사가 원래 주어진 일만 하는 점이 있소이다. 대리사에 남았다면 사경도 되었을 인물인데 하필 도위부로 오게 되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힘든 때를 맞이한 것이올시다. 결과 본인까지 퇴임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고.”

장정희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차분히 물었다.

“하지만 썩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이대로 물러서면 머잖아 많은 사람들은 물론 자칫하면 석 안찰사 역시 다칠 일이 생길 듯한 조짐이 보이더구려.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는데, 뜻이 그러시다면 함께 방법을 강구해 보겠소이까?”

“-!”

장정희는 바싹 긴장했다.

아무도 없음에도 주위를 살피며 소리를 죽였다.

“안부차 들른 길에 석 안찰사께서 살펴 달라 하셔서 움직이시는 것이라 들었는데……! 복권하실 의향이십니까?”

정확히 그렇지는 않았지만 막여사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가 가만히 있게 내버려 두지 않는구려. 아무튼 버티려면 방도는 하나뿐인 것 같소이다. 길 안내를 하면 함께 가시겠소이까?”

장정희의 눈이 바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장군께서 앞장서 주신다면야! 다시 말씀드려도 소장 역시 고심하고 있었소이다. 소장이 어찌하면 되겠소이까?”

전혀 이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일반의 관료들과 달리 이 시대의 무장들은 나라에 혼란이 일어나거나 할 때 대처하는 아주 독특한 방법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강력한 인물을 수장으로 삼아 군벌을 이루고 복지부동하는 수법이 그것이었다.

이를 방벽을 쌓는다고 했는데, 이런 경우 병부참판의 목은 떨어져도 이들은 살아남았다.

병력이라는 실질적인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상시에도 강력한 결속을 지닌 지방 군벌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지만 유사시 아쉬운 것은 중앙이 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황제까지 칙사를 보내어 달래곤 했던 것.

하지만 그 정도가 되려면 수장이 대단히 중요했다.

우선적으로 도처의 장수들을 한 덩어리로 해 이끌어 나갈 장악력이 있어야 했고, 정확히 앞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바르고 빠르게 진퇴를 결정할 수 있는 두뇌와 결단력, 천하가 인정할 정도의 명망까지 있어야 했다.

아니면 결속 자체가 힘들고, 한다 해도 정확히 갈 바를 찾지 못해 헤매다가 역적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막여사는 필요한 점들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이 시대를 사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정도의 무인으로서 명망과 인맥이 있으며 연안도위부를 업고 있는 만큼 지닌 힘 역시 이미 작지가 않다.

나선다 하면 무조건 함께 가는 것이 좋은 것이다.

장정희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는데, 까닭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를 회유하려고 수를 쓰는 것이 아니라 회오리가 일어나면 나도 어찌 될지 모른다고 했듯 실제 석천중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무조건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 할 형편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대 세력의 힘을 깎아 내고 입지를 굳혀야 하는 것으로, 정확히 장정희의 경우는 이십사 번왕 중 홍무제의 열세 번째 아들인 대왕代王 주계朱桂가 다스리는 대동왕부大同王府 산하의 장수 중 하나였던 것이다.

대신들이 왕부들의 힘을 삭감하려 하는 터에 자책점까지 있으니 꼼짝없이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석천중, 막여사와 보조를 맞춘다면 일단 중앙에 속하므로 그럴 염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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