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습무사-94화 (94/150)

# 94

복귀復歸 (6)

그녀 역시 이때까지는 단순히 장신을 그냥 형부, 북평왕부에서 일하고 있는 고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터인데 오가며 피부에 와 닿은 상황들하며, 비로소 가족들 등 악충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덤처럼 추룡까지.

아무리 강한 성격의 그녀라 해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들리는 황촉 불.

도착한 일행은 정업의 배려로 네 칸의 객실을 얻었고,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비로소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달리 말할 만한 것도 없었다.

“미안합니다, 가가. 저로 인해 계속 어려움만 겪게 되시고……! 정말 무엇이라 사과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참 딱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게 그녀로서도 아무런 해법이 없었던 것이다. 눈앞에 칼날이 번뜩이는 기분이었으나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느낌은 길吉보다 흉凶이었지만 과연 험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 화복禍福을 헤아리기 어려워 무엇이든 함부로 예측해 말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

추룡 역시 똑같이 진퇴를 알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악벽강을 위로했다.

“악 매가 사과라니 당치 않습니다. 설마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모든 일이 기우인데, 그게 우리에게 닥쳤다는 것뿐이지요. 더욱이 지금으로써는 아무것도 속단할 수 없습니다. 장 시위님조차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계실 터인데 노파심일 뿐, 실제로 우려하는 일이 일어날지는 미지수이지 않습니까.”

악벽강에 비해 어린 나이.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약관의 모습 그대로 쾌활한 자체의 모습이지만 돌이켜 보면 그는 면면이 나이보다 생각이 깊다.

이로 인해 악벽강 정도의 처녀가 사랑하게 되기도 한 것이겠지만 늘 상대를 배려하는 깊은 속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어려도 그녀에게 든든함을 주고 있었고, 지금도 악벽강은 위안을 얻고 있었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면서 지금으로써는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어른들을 뵈어야 해요. 우리가 걱정해서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분명히 그랬다.

이것은 그들이 아무리 걱정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천하를 좌우하는 권력자들이 암투를 벌이고 있는데 자신들이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이고, 집안일에 대한 결정 권한조차 두 사람에게는 없었다.

속히 윗사람들에게 알려 대비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그러나 악벽강의 걱정은 여기에도 있었다.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혹시라도 아버님께서 화를 내시면 어떻게 해야 할지……!”

딱 부러지게 헤어지라 하면 어찌할 것이냐 묻고 싶었지만 간신히 누르고 돌려서 물은 것이었다.

추룡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악 매에게 허물이 없는데 왜 화를 내시겠습니까?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모두가 좋아질 대안을 찾으실 것입니다. 여간한 분이 아니시니 장인어른께서도 바르게 향할 바를 찾으실 것이고요.”

대단한 믿음.

악벽강은 다소 마음이 놓였다. 막여사에 대한 그의 믿음은 스스로의 의지인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를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다.

“혹시 타개책 같은 것이 있으신지……?”

추룡은 쓴웃음 지었다.

“어른들의 뜻에 따라야겠지만 휘말리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경우는 애매한 점이 많은데, 어느 쪽도 그르다 할 수가 없어요. 사욕이 없다고 본다면 대신들도 틀리지 않고 연왕 전하도 틀리지 않습니다. 태자가 죽으면 태손이 후위를 잇는다는 법통에 따라 대신들은 윤문 전하를 옹위했고, 중심으로 일을 해 나가려 하는 것입니다. 번왕들의 힘을 억제하려 할 수밖에 없지요. 오호십육국 때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역대로부터 치정권治政權 밖의 번왕들의 힘이 크면 늘 나라에 혼란이 야기되었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정말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

“그렇다고 힘을 키운 번왕들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황상의 뜻이었으니까요. 특히 북평왕부의 경우는 더 애매한 점이 있어 보이던데, 위험한 지역이라 어떻게든 힘을 키우려 할 수밖에 없겠더군요. 이렇다 보니 과거의 일까지 맞물려 알력이 생기는 것 같지만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서로 양보하고 이해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랄 수밖에요.”

정확히 중립에서 보는 눈이었다.

“따라서 누가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으니 이런 시국에는 일이 벌어져도 피하는 게 상수 아니겠습니까. 장인어른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잠시 보를 해산하고 무림을 떠나 추이를 살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일단 중립임을 알리는 것이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명히 장인어른과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보실 것이고요.”

상책인 게 옳았다.

“그러면 언니와 형부는……?”

추룡은 다소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피신케 해야지요. 가장 난처한 문제는 장 시위님께서 어찌하실지예요. 추이를 살펴 적당한 시점에서 사임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시려 할지. 언니를 설득해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더 확고하게 이야기했다.

“나머지 일은 우려하실 게 전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있어도 저는 악 매와 함께 있을 테니까요.”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악벽강은 추룡의 품속 깊숙이 몸을 기댔다.

“정말 저는 복이 많군요……!”

틀림없이 악불비가 권언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진충보국으로 천하에 이름 높은 게 탕음악가였지만 권력 다툼에 휘말려 독살당한 사람이 또한 악비이기도 했으니.

대명풍운大明風雲 (1)

새벽.

“사제, 무얼 하고 있는가? 어서 나오게! 어지간하면 친구 분들도.”

추룡에게 다른 일이 발생한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인시寅時.

날도 밝기 전인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정업이 그를 깨운 것이다.

“무슨 일이신지요?”

악충보도 기상 시간이 묘시라 결코 늦지 않은데, 의외로 일찍 찾아온 정업의 음성에 추룡은 눈을 비비며 숙소 바깥으로 나섰다.

“엇! 대사형!”

그러자 지객실 밖에는 의외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찾아온 것은 정업뿐만이 아니라 정명, 정어, 정견, 정정 등 네 명의 나한들이 모두 찾아와 미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차림새가 꽤 괴상하다.

누덕누덕 기운 회색 승복을 걸친 채 어느 집 일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다들 커다란 나무 물동이가 두 개씩 걸린 들것을 지니고 있었다.

“헛헛……! 역시 정업의 말대로로군. 왔다고 들었다. 밤이 늦어 만나기를 미뤘다만.”

소림 전설의 나한들.

“평강하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정명 등은 화등같이 눈에 정광을 이글거리며 미소 지었다.

“우리야 탁발이나 하며 지내는 승려인데 무슨 일이 있겠느냐. 사제 역시 잘 지낸 것 같군.”

“건강한 모습을 보니 반갑네.”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전소 등 나머지 친구들도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고, 이런 모두를 보며 정업이 빙그레 웃었다.

“자는 사람들을 실없이 깨운 건가? 하지만 소림에 왔으면 소림의 법에 따라야지. 짊어지게. 물론 싫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 자유일세.”

다시 보니 추룡과 친구들의 몫인 듯 저만치 지객실의 입구에 또한 여러 개의 들대와 커다란 물동이들이 놓여 있었다.

한데 이 물동이의 생김새가 좀 괴상하다.

아이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클 뿐 아니라 아래가 팽이처럼 뾰족하게 생겨 바닥에 바로 세우지 못하는 물동이였다.

물을 채우면 내려놓지 못하는 이상한 물동이.

권유에 따라 친구들은 어깨에 걸치며 의아해서 물었다.

“무엇인지요?”

정업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우리에게는 그날 쓸 물을 그날 길어 오는 관습이 있어. 물을 길어 오는 게 하루의 시작이지. 왔으니 함께 가지?”

그날 쓸 물을 그날 길어 온다.

추룡은 눈을 끔벅거렸다.

“경내에 우물이 없는 것입니까?”

“핫핫…… 설마 우물이 없겠나? 다 필요하니 하는 일이지. 어쨌거나 반가운 손님이 오면 우린 그냥 지나치게 하지 않아. 따라오게.”

정업은 웃으며 어리둥절해하는 친구들을 채근해 서둘러 정명 등과 함께 소림의 밖으로 나갔고, 나가자 바깥 일주문 밖에는 더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무려 사오백 명에 달하는 물동이를 짊어진 승려들이 비슷한 복장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는 제각각. 마흔 살 후반에서 열 살 정도의 어린 동자승까지 있었는데 사람에 따라 물동이의 크기도 모두 달랐다.

상중하로, 어린 만큼 동자승들은 체격에 맞는 작은 크기, 일반은 중간 크기, 정명 등 앞장선 승려들이 짊어진 것은 동자승이 들어앉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사람이 많아 일일이 인사할 수 없으니 약식으로 하기로 한다. 이야기한 정진 사제다. 잘 기억했다가 만나게 되면 웃음으로 대하라.”

“아미타불!”

정명은 일단 추룡을 모두에게 소개했고, 들것을 둘러메었으므로 승려들이 일제히 한 손을 세워 반수 합장을 하는 속에 추룡은 무조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반수 합장은 있어도 한 손 포권이란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가자!”

더불어 장내에는 곧 진경珍景이 벌어졌다. 드디어 물을 길어 가는 것인지 앞장서 정명이 밝지도 않은 어두운 바깥담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함과 함께 사오백의 승려들이 일제히 물동이를 짊어지고 일렬로 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지?”

“우물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의아한 심정으로 친구들은 꼬리에 따라붙었다.

그러나 까닭을 알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승들의 수련의 일종 같아. 우리도 아침에 일어나면 뛰잖아.”

하나가 풀리자 친구들은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더 이상하잖아. 칠대문파는 외인에게 수련 광경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왜 우리를 동참시킨 거야?”

추룡을 보며 전소가 웃음 지었다.

“뭐겠어? 이해하지 못할 일이 그동안 한두 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사부님에게 또 다른 비밀이 있는 거지. 사제라고 소개하는 것 같던데?”

“생각났다! 맞아! 그러고 보니 전에 무예를 가르쳐 줄 때 특이한 수법을 시전해서 뭐냐고 물었더니 소림곤법이라고 한 적이 있었어! 막 장군님께서 소림 제자가 아니라면 정업 대사님에게서 배운 것이라 봐야 하는 거군! 어찌 된 일인지 솔직히 말해 봐!”

추룡은 또 난감해졌다. 몽마 사건만큼은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려움이 보이는 표정으로 돌려서 대답했다.

“늘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추측은 맞아. 이야기하자면 처음 만났을 때 정업 사형과 한바탕 논무를 했었네. 당시 나한곤법을 눈요기했고, 이후 의기가 맞아 형제로 지내기로 했던 것인데 그로 인해 사제라 부르시는 걸세. 어쨌건 도움이 되는 것들은 칠우창법에 모두 들어 있네.”

“카카……! 진짜 양파 같은 남자군! 더는 비밀이 없다 하면서도 한 겹 벗겨 내면 또 한 겹이니! 그러면서도 아주 묘해. 숨기는 건 많지만 벗겨 보면 전부 우리에게 보탬이 되어 있어.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문데 말이야.”

사실 참 희한한 것이다.

그대로 추룡에게는 그동안 꽤 비밀이 많았다. 막여사의 일을 제외하고도 몽마 사건을 비롯해서 악벽강과의 관계 등, 의외로 친구들이 모르는 일들을 많이 겪은 것이었다.

자칫하면 적잖게 오해를 살 법한 일들. 하지만 묘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에 뭔가를 숨기는 것은 자신의 득을 위해서인데 추룡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었고, 뭐가 되건 얻은 것들은 모두 나눠지고 있었던 것.

이렇다 보니 오해할 일 같은 게 거의 없다.

“천하에 기인 이사가 많다지만 가만 보면 막 형이야말로 진짜 기인이야. 신기하다는 생각만 드네. 가슴속에 뭐가 들어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해.”

추룡은 난처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뛰며 대답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든 것은 아무것도 없네. 지난 일 년 동안 우린 함께 지냈지만 별도로 생긴 일도 좀 있는데, 이런 것들은 주로 자네들이 없는 휴일이나 외부에서 생긴 일일세. 하지만 이야기하기 난처했어. 실없는 자랑이 될 수도 있을뿐더러 일마다 조금씩 사정들이 있었기 때문일세. 그랬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돌출해 나오는 건데, 이럴 때마다 정말 미안해지곤 해. 사심이 없는데도 꼭 고의로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러니까 좀 헤아려 줘. 세운 뜻조차 접고 돌아가야 할 내가 무슨 사심이 있겠나?”

그대로였다.

친구들도 아는 일이지만 실제 추룡이 남평을 떠나며 지녔던 것은 대리사의 무관이 되겠다는 소박한 꿈 하나였다. 하지만 시기를 놓침으로 무산되었고, 직후 자신들과 함께 악충보로 온 터였다.

받침이 되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에게 무슨 사심이 있겠는가.

알고 있으므로 친구들은 무조건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신경 쓰지 말게! 신기해서 하는 말일 뿐이지. 우린 그냥 막 형을 만나게 해 준 하늘에 감사해. 막 형과 함께한 일 년은 분명히 우리들 인생에 가장 멋진 날들로 남을 거야. 앞으로도 이런 날은 있을 수 없을 걸세.”

편치 않은 심정이었지만 추룡도 미소 지어 보였다.

“그렇게 말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네. 나도 자네들과 함께 있는 지금이 가장 즐겁고 행복하네. 늘 이야기하지만 고맙기도 하고. 처음 만나 베풀어 준 정도 그렇지만 혼사까지 미루고 달려와 줄 정도이니 이런 친구들을 어디서 또 만나겠나. 나 또한 자네들을 만나게 해 준 하늘에 감사하고 있네.”

친형제 이상인 친구들인 게 분명했다.

돌이켜 보면 추룡도 친구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었지만 보다 의리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친구들이었다.

크고 작고를 떠나 만날 때부터 먼저 주고 있으니 분명히 받아서 갚는다가 아닌 것이었다.

진심을 나누며 다들 싱글벙글 웃음 지었다.

“대단치도 않은 것을 가지고. 덕분에 이번에도 큰 것을 얻고 있지 않은가. 백두인 주제에 왕부를 보질 않았나, 장성에도 올라갔지, 소림사에까지 왔으니 이건 결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닐세. 가장 좋은 것은 이번 일로 남평이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님을 알았다는 것인데, 분명히 우린 시간 나는 대로 자네를 보러 갈 걸세.”

한자방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나는 좀 아쉽군. 괜한 말이 아니라 자네들을 알고부터 똘똘 뭉쳐 다니는 이 대열에 얼마나 끼어들고 싶었는지 몰라. 이제야 간신히 조금 다가섰는가 싶었는데 막 형이 빠지게 되다니.”

임백호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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