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복귀復歸 (5)
“그리하겠습니다.”
악벽강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고, 두 사람은 곧 바깥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데 이때였다.
“잠깐만, 거기 계신 시주님. 낯이 많이 익은 듯한데……!”
떠나려 하던 두 사람에게 역시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어둑어둑 주위에는 어느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는데 불현듯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엇……?”
누군가 하여 고개를 돌린 추룡은 순간 다시 크게 멈칫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음성이 들려온 곳은 저녁 예불 준비가 한창인 대웅전의 안쪽, 훌쩍한 키에 태양혈이 불끈 솟은 회의 승복 차림의 삼십 대 승려 하나가 염주를 굴리며 다가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정업正業이 아닌가!
정명과 함께 추룡 및 악벽강을 찾았던 백팔나한 중의 하나로, 의형제가 되었던 그.
뜻밖의 일에 추룡은 급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정업 사형 아니십니까! 사형께서 여기에 어쩐 일로……?”
아는 내색을 하자 정업은 바로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사제 맞군! 멀리에서 긴가민가하였더니만. 나야 여기 있는 게 당연하지. 승려 아닌가?”
맞긴 하다.
추룡은 의아하여 정업을 바라보았다.
“그렇긴 하지만 소림사에 계셨던 게 아니던가요?”
의아해하는 추룡을 보며 정업은 껄껄, 호방하게 웃었다.
“사제도 일반과 같이 생각하는군. 대개가 그렇게 착각을 하지. 소림나한이니 소림사에만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 적籍은 소림에 두고 있으나 본분이 승려이니 계종을 같이하는 사찰이라면 어디든 있을 수 있네. 소림에만 있는 나한은 수업 중인 사람들이지.”
소림의 나한이라고 소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알 듯하기도 했지만 추룡은 어리벙벙했다.
“하지만 백팔나한이시지 않습니까. 수호승이 아니던가요? 장경각과 계율원을 지키며 침입자와 맞서는?”
정업은 핫, 하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착각이래도. 불문의 사찰이 무슨 전쟁터인가. 상시 지킬 정도로 침입자가 있게. 대개가 그렇게 착각하는데, 소림도 그냥 일반과 같은 사찰일 뿐이야. 장경각에도 불서佛書뿐일세. 가끔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뭔가 엄청난 비급이라도 소장되어 있나 하고 들어서기도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네. 나한들이 나서서 싸우네 어쩌네 하는 건 다 헛소문이지. 뒤져 봐야 불서밖에 없거든. 가져가서 열심히 읽다 보면 불심 하나는 높아지겠지.”
전혀 뜻밖의 이야기.
“듣기로는 역근경 등 달마 비전들이 소장되어 있다고 하던데……!”
“글쎄, 다 헛소문이래도. 역근易筋이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경씩이나. 알고자 하면 당장이라도 아무에게나 다 가르쳐 줄 수 있는 건데, 그냥 몽둥이찜질을 하는 거야. 복근, 배근 등을 두드려 튼튼하게 하는 것이지. 중요한 것은 몇 가지 되지도 않고 다 여기에 있네.”
툭툭, 머리를 두드려 보였다.
피식, 추룡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 지었다.
“온갖 절기들이 다 소장된 곳으로 장경각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바로 절정의 고수가 된다 하던데 아니었던가요?”
정업은 계속 웃었다.
“핫핫……! 그런 터무니없는 일은 세상이 뒤집어져도 있을 수 없지. 다시 일러도 소림은 그냥 여느 사찰과 같아. 늘 개방되어 있고 지키는 사람도 없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시주님들을 맞이하나? 어쨌건 백마사는 중원 불문의 파생지인 곳일세. 대종정님도 여기 계시고. 가깝기도 하고 해서 늘 나와서 둘러보곤 하지.”
중원 불문의 대종정이 있는 곳.
그러고 보니 숭산도 소림사도 모두 정주에 있었다.
“한데 사제가 여기에 웬일인가? 그러고 보니 이분 여시주님도 눈에 익은 모습인 듯한데?”
악벽강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만나긴 했지만 아주 잠깐, 그나마 십 개월이나 되었고, 남장 차림을 했을 때라 지금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비로소 악벽강은 포권을 취해 보였다.
“오랜만에 존안을 뵙습니다. 저 악벽강입니다.”
“악 소저……?”
정업의 얼굴에 얼떨떨한 기색이 떠올랐다. 역시 당시의 악벽강과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러고 보니 같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허허! 몰라보겠구려. 뵌 지 오래긴 하지만 이렇게 달라지실 줄이야.”
지체 없이 합장을 취해 보였다.
“그때는 정말 결례가 많았소이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고맙겠소.”
“별말씀을. 오히려 제가 심기를 건드렸던 게지요.”
인사 나눈 후 정업은 곧 두 사람에게 지객실로 가기를 권했다.
“어쨌거나 여기에서 다시 만날 줄 몰랐군.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자리를 옮기세. 차라도 나누며 이야기하지.”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럴 수 없었다.
“아닙니다, 사형.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바로 나가 봐야 합니다.”
지체하면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하여 친구들이 다시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정업의 마음은 또 그게 아닌 것이다.
“영문을 모르겠군. 악 소저의 모습도 그렇고 이목을 피하려 하는 듯한 눈치가 보이는데,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 봐. 중요한 일인가?”
감추기도 애매했다. 스치듯 한 인연이었지만 그래도 형제로 지내기로 한 터에 차 한잔 나누지 않고 그냥 헤어지기도 그랬고. 머뭇거렸지만 속세를 떠난 그라 추룡은 간략하게 내용을 전해 줬다.
“난처한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실은 북평에 다녀오는 길이온데, 소저의 형부님이 북평왕부의 내전시위로 계십니다. 장신이라 하고 측근에 본가가 있습니다. 노모님이 계셔 서찰을 전해 달라고 하여 들렀는데, 금의위에서 감시를 하더군요.”
“북평왕부의 사람? 금의위라고?”
“그렇습니다. 하마터면 걸려들 뻔했는데 가까스로 따돌리고 이리로 온 것입니다. 일행이 더 있사온데 먼저 밖으로 나가 기다리라고 해 뒀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일이 있었다.
“그놈들 참, 어디서나 문제로군.”
정업이 멈칫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몇 마디의 말로 오히려 두 사람보다 더 빨리 상황을 간파했던 것이다.
“설마 악충보가 북평왕부 쪽과 관계가 있었던 줄은 몰랐네. 그렇다면 문제가 좀 심각하지. 그쪽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감시받고 있으니까. 이런 시점에서 북평에 오가는 것은 크게 위험한 걸세. 혹시라도 연왕부와 뭔가 작당이라도 하는가 하여 눈에 불을 켜고 알아내려 할 것이니. 북평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나?”
추룡은 다시 어리둥절한 기색이 되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사형께서 어떻게 그렇게 사정을 잘……!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것 같군요?”
정업은 다시 한바탕 웃음 지었다.
“헛헛……! 사제가 승려들에 대해 모르는가 본데, 앉아서 천 리, 서서 만 리인 게 우리들일세. 천하 각지로 다니며 탁발을 하는 데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넘는 각계의 시주님들을 만나는 터이니. 어쨌건 사실이라면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닐세. 북평에 다녀오면서 금의위에 걸리고도 빠져나왔다는 게 기적 같은 일인데…… 잠깐 기다려 보게.”
두 사람에게 있어라 하고는 곧 승방 쪽으로 가서 죽장과 방갓을 들고 나왔다.
“가세.”
뜻밖의 행동에 추룡은 의아한 기색이 되었다.
“어디로 가자는 이야기신지?”
정업은 피식 실소 지었다.
“어디긴. 왔으니 소림으로 가야지. 정명 사형도 만나고 장문인도 뵈어야 하지 않겠나. 곧 밤인데 노숙이라도 할 건가? 함께 움직이는 게 의심을 피하기도 좋을 걸세. 아, 그래. 사제는 좀 떨어져서 와.”
악벽강의 소매를 끌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
부담이 되었지만 추룡은 그냥 따르기로 했다. 이야기한 그대로 날도 어두워지고 있었고, 의심을 피하기에도 정업이 있는 게 좋았다.
악충보의 사람으로서 북평왕부에까지 들렀던 터에 금의위에 걸렸으면서도 빠져나왔다는 자체가 사실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하는 것이었다.
반 시진 후.
“여기야, 막 형!”
“아, 거기 있었군.”
낙양의 남문을 빠져나온 세 사람은 이윽고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약속한 대로 친구들은 한발 앞서 내성에서 나와 몸을 숨기고 있었던 터인데, 무슨 일인가 하여 한결같이 표정들이 굳어져 있었다.
호전된 것은 오히려 추룡이었다.
심한한 것은 같았지만 정업을 만남으로써 처음보다는 많이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악벽강의 말고삐를 잡고 있는 정업을 소개했다.
“인사드리게. 소림의 정업 대사님이실세. 백팔나한 중 한 분이시지.”
“백팔나한?”
순간 친구들의 얼굴에 일제히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결코 쉽게 대면할 수 있는 승려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알려져 있듯 소림의 백팔나한은 좀처럼 신분을 드러내지 않아 이렇게 아는 사람이 소개하기 전에는 봐도 백팔나한인 줄 몰랐다. 특별한 행사가 있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대사님을 뵙습니다! 한자방이라 합니다.”
“장청입니다.”
“만나서 반갑소이다.”
서둘러 인사를 한 후 다시 추룡과 악벽강을 향했다.
“어찌 된 일인가? 별일 없는 것 같아 안심이네만, 이번에는 소림의 스님이라니?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 어서 설명해 줘!”
악벽강까지 여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모습으로 표정이 굳어져 있지 않은가.
감출 일이 아니므로 추룡은 일단 서두르게 된 까닭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했다.
“실은 장 시위님의 댁에 들렀다 나오면서 금의위와 부딪쳤었네. 그들이 장 시위님의 장원을 감시하고 있더군. 아버지의 함자를 대고 간신히 벗어났던 것인데 방심할 수 없어 소저와 헤어진 후 백마사에서 뵙기로 했던 것일세. 거기서 대사님을 만났던 것인데, 대사님은 더 전에 악충보에서 뵌 적이 있었네. 피하는 중이라 말씀드렸더니 소림으로 가자고 하시더군. 대강 그렇게 된 사연일세.”
“금의위가 장 시위님의 장원을 지키고 있었다고……?”
친구들도 적잖게 멈칫하는 기색이 되었다. 막여사가 도위부의 출신이라 쉽게 이야기가 흘렀을 뿐이지 이 시대의 금의위란 실제 기관이 아닌 것이었다.
괜한 말이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친다 할 정도로 중원 전체의 권력을 장악, 군관민을 통제하는 공포 자체인 기관이었던 것.
걸려들면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압송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홍무제의 반대 세력이었던 권력자들을 모두 잡아 처치하고 승상이었던 호유용까지 압송해 가죽을 벗겨 내고[剝皮] 목을 자른 기관으로, 그들이 곧 법 자체였던 것이다.
힘을 준 것은 홍무제였지만 본인조차 죽기까지 그 힘을 회수하지 못했을 정도로서 어느 정도의 위세인지 설명하자면 엄덕민嚴德珉의 사건을 다른 예로 들 수 있었다.
엄덕민은 어사대御使臺의 수장으로서 첨도어사까지 직위가 올라 있던 인물이었다.
황제의 측근에서 관료들의 비리를 살피는 게 어사이니 첨도어사라면 어떤 신분인지 알 법한 것이다.
한데 그가 어느 날 중병을 앓게 되었다.
이에 몸조리를 위해 잠시 고향으로 내려갈 뜻을 비쳤는데, 그만 금의위의 눈에 밉보여 꾀를 부린다는 죄명으로 도위부로 압송되었다.
죄가 될 수 없는 죄였다.
하지만 잡아들인 금의위는 무조건 그의 얼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죄인의 표시인 묵면문신墨面文身을 새기고 삭탈관직해 광서 지방으로 유배까지 보냈다.
자그마치 첨도어사인 인물에게 그랬다는 것이다.
이후 유배당한 엄덕민은 죄인의 낙인이 찍힌 채 죽기까지 관리의 모자를 벗지 않고 지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모습이 하도 기이하여 어느 날 한 유생이 그에게 물었다.
-어른께서는 어사대의 수장까지 되신 분으로 죄 없이 삭탈관직, 유배까지 당했는데 왜 아직 그 낡은 관모를 쓰고 계신지요? 원통하지도 않습니까?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그러자 엄덕민은 즉시 빈 허공을 향해 넙죽 절을 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무 고마워서 그렇소. 나라의 승상까지도 걸려들어 일족 전원이 능지처참당했는데, 나는 가족들이 무사할 뿐 아니라 아직 살아 있기까지 하지 않소? 얼마나 고마운지, 평생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관을 쓰고 있는 것이오.
죄가 있던 말건 첨도어사까지 잡아들여 혹형을 가한 자들에 대한 조소였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 곳이 금의위로서, 걸려들어 목숨이라도 부지하면 다행이라는 뜻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무예가 높은 사 무림의 인물들이라 해도 금의위를 꺼려 할 수밖에 없었는데, 자신은 둘째, 문제가 생기면 화가 가족에게 미치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거군. 설마 금의위와 부딪쳤다니……! 아버님의 덕이 크셨던 거군!”
정업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악충보의 명성이 높은 만큼 악불비와 친분이 있을 수 있었고, 악벽강과 정혼까지 한 사이니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의문이 생긴 것은 정업이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군. 아버님께서 군부에 계셨다 듣긴 했지만 어떤 직책이셨기에 그들이 양보를 했던 것인가?”
그 역시 추룡의 정확한 내력을 모르는 상태. 난처했지만 추룡은 밝힐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마찬가지로 금의위에서 재직하셨습니다. 여 자, 사 자를 쓰십니다.”
“막여사 장군? 설마 저 유명한 군위제일검 막여사 장군이 부친이라는 이야기인가?”
앉아서 천 리, 서서 만 리라 한 그가 막여사를 모를 리 없는 것, 크게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고, 난처한 심정으로 추룡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밝히기 부담스러워 숨기고 있습니다만.”
정업의 얼굴에 크게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삼척동자가 생각해도 분명히 이것은 기이한 일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 고사하고라도 천하제일로 알려진 인물의 아들이 악충보의 말단으로 있다는 자체부터가 희한한 것이다.
더욱이 그가 세상사에 밝다고 하면 지금 같은 경우는……!
그러나 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것이군. 어쩐지 무위가 심상치 않다 여겼더니만……. 확실히 밝히기 부담스럽겠네.”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동료들도 있고, 함부로 말을 꺼낼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악벽강 역시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시종일관 표정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소림사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숭산은 낙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알려진 대로 소림사는 소실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한 시진 거리. 오면서 일행 사이에는 내내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는데, 특히 악벽강의 경우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심란한 심정이 되어 있었다.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없었다.
추룡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셈이지만 금의위와 부딪침으로 실제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악벽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