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복귀復歸 (4)
악벽강과 추룡이 인사를 하고 서찰을 건네주자 장신의 모친은 읽어 본 후 곧 말문을 열었다.
“설마 사돈댁 소저께서 이 멀리까지 서찰을 가져다주실 줄은 몰랐구려. 보다시피 늙은이는 편안히 잘 지내고 있소이다. 대감께서 실없이 어미 걱정을 하는 듯하구려.”
“혹시 감시를 받고 계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신지요?”
볼모처럼 되어 있다는 그녀. 그러나 장신의 모친은 눈 하나 깜박 않고 대답했다.
“나라를 위해 아들이 큰일을 하는데 어미가 되어 그 정도야 감안해야 하지 않겠소. 일하는 사람들이 불편을 겪고 있는 듯하여 미안하지만 능히 견딜 만하구려. 보다 대감께서 의지 곧게 잘 처신해 주었으면 싶소이다.”
위엄 있게 말을 이었다.
“반년 전 금릉에 다녀가며 들러 심려를 하더구려. 조정에서 도사의 직위를 내려 반反연왕부의 일을 하라 하니 어찌해야 좋겠느냐고. 필경 어미 걱정을 하는 것 같더구려. 크게 화를 내었소이다. 천하의 주인이 되어도 부족함이 없는 주군을 만났으면서도 늙은 어미 하나로 의지가 흔들리는 것 같아서.”
“그런 말씀을……!”
추룡은 일순 멈칫하는 심정이 되었다.
평범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주체에게만은 이런 칭찬을 붙여서 안 되는 시국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뭐, 장신의 모친은 별거냐는 듯 담담히 말했다.
“틀린 이야기가 아니올시다. 현 중원에는 많은 용이 있으되 그중 단연 으뜸인 분이 연왕이시니. 작고하신 부군께서 일러 주신 말씀으로 태자께서 승하하신 후 후계 승계를 놓고 고심하시던 황상께서 윤문 전하와 연왕을 불러 시험을 하셨는데, 풍취마미천조선風吹馬尾千條線이라 하셨다 하더구려.”
바람이 부니 말 꼬리가 천 갈래로 흩어진다.
“여기에 대해 윤문 전하께서는 우타양모일편전(雨打羊毛一片?-비가 내리쳐 양털의 냄새를 씻는다)이라 하였고, 연왕께서는 일조용린만점금(日照龍鱗滿點金-해를 비추니 용의 비늘이 만의 황금을 만들어 낸다)이라 대답하였다 하였소이다. 공자라면 누구를 택하셨겠소이까?”
추룡은 곧 뜻을 알 수 있었다. 홍무제가 두 사람의 자질을 떠본 것인데, 던진 운은 난국을 우려하는 구절이었다.
하지만 말과 양이 일치되지 않고 바람과 비 역시 일치되지 않아 윤문이 한 대구는 그냥 단순한 시 운절로 답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 주체의 대구는 정확히 답이 되었다. 용이 황제로 표현됨으로 해를 비추듯 위엄으로 난국을 수습하고 성정으로 부국을 이루는 게 좋겠다는 뜻을 비친 것이었다.
장신의 모친은 계속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때 황상께서는 연왕 전하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후위를 물리려 하셨으나 좌파의 대신들이 반대하였소이다. 어쩔 수 없이 뜻을 꺾으셨지만 황상의 마음은 북평에 있고 백성들 역시 연왕 전하를 더 큰 그릇으로 보고 있는데, 어찌 어미가 나라의 녹봉을 받는 아들에게 황상과 민초의 마음을 저버리라 할 수 있으리오.”
‘하……!’
대단한 모친이었다. 너무 곧아서 위험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굉장한 어머니시군요. 장 시위님의 성공 뒤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 그냥 알 것 같습니다.”
나서며 추룡은 혀를 내둘렀고, 악벽강 역시 미소 지었다.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으로서 대단한 분이시라고요.”
“권문의 출신이시라 그런지 조정 일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더군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이야기하신 것인가요?”
“그런 듯합니다. 작고하신 사돈어른 역시 황상을 섬기셨으니 대를 이어 한 군왕을 따르라는 의미인 것 같아요. 윤문 전하께서 후위를 잇게는 되셨지만 황상의 뜻이 아니라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홍무제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한 역모설과 맞물릴 수 있는 발언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때였다.
“거기 잠깐 서라!”
장원에서 나와 막 말을 타려 하는 찰나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저만치 장원과 이어진 길모퉁이에서 돌연 흑의 장삼을 입은 두 명의 건장한 삼십 대 사내가 나타나며 싸늘한 음성을 던진 것이었다.
멈칫하는 심정이 되어 추룡은 두 사람을 향했다.
냉광이 이는 눈빛에서 걸음걸이에 이르기까지 빈 듯한 곳이 한 점도 보이지 않는 모습. 보는 즉시 드물다 할 고수들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누구신지요?”
그러나 두 사람은 계속 싸늘하게 눈을 번뜩이며 문초하듯 자신들의 할 말만 했다.
“우리가 물을 말이다. 호패를 제시해라. 누구기에 장원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냐?”
감시! 짚이는 게 있어 악벽강이 포권과 함께 대답했다.
“용무가 있어 낙양에 온 길에 사돈어른 댁이라 문안차 잠시 들른 것입니다만 신분이 어찌 되는 분들이신지?”
호패를 꺼내 넘겨주자 살펴본 후 사내들은 곧 다시 얼음장 같은 시선을 두 사람에게로 보냈다.
“한 사람은 휘주, 한 사람은 남평이로군. 사돈이라고 하면? 악보의 딸이냐?”
완전히 상전 같은 태도다.
악벽강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누르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언니가 장 시위님의 부인입니다. 보다 뭔가를 물으시더라도 신분을 밝히셔야 옳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사내들은 들은 척도 않고 두 사람의 호패를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추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남평과 악보가 가깝지 않으니 연고가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데 무엇 때문에 온 것이냐?”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호패를 압수한 것이나 같은 것인데 다음은? 일어날 일을 뻔히 예상할 수 있을 정도라 포권과 함께 추룡은 말을 돌렸다.
“부친의 권고에 따라 견문을 쌓으려고 나온 터입니다. 오던 길에 소저를 만나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북평 쪽으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위모를 뵈니 일반의 관인 같지는 않으시고, 혹시 도위부의 분들이 아니신지요?”
금의위! 걸려들면 승상도 목이 떨어진다.
두 사내는 날카롭게 눈을 번쩍이며 추룡을 향했다.
“눈치가 제법이로군. 어찌 알았느냐?”
추룡은 다시 막여사의 패를 썼다.
“부친께 들어 짐작하였습니다. 천하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스쳐봐도 알 것이라 일러 주시더군요. 만나면 주의해서 분부에 따르라고요.”
추어올려 주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두 사람은 다소 누그러진 모습을 보였다.
“부친이 누구시냐?”
추룡은 재차 포권을 취했다.
“막에 여 자, 사 자를 쓰시는데 어쩌면 들어 보셨을지도 모르겠군요. 마찬가지로 금의위에 재직하신 적이 계십니다.”
“막여사 장군님?”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도 멈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퇴임한 지 오래지만 막여사를 모르는 사람은 금의위가 아닌 셈이다.
추룡은 거듭 포권을 취했다.
“그렇습니다. 대한장군으로 재직하신 바 있습니다.”
“잠깐만 이리로.”
그러자 두 사내는 곧 품속에 넣었던 호패를 꺼내 추룡이 막씨임을 확인한 후 악벽강과 떨어져 추룡을 나타났던 모퉁이로 데리고 갔다.
“설마 막 장군님의 아들을 만날 줄은 몰랐군. 남평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만. 한데 어째서 악보의 딸과 다니는 것이냐? 악보나 저 장원은 모두 주시받고 있는 곳인데.”
철렁, 추룡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주저앉았다.
“무슨……? 악충보는 충의로 이름 높은 향용이고, 장원은 사품관의 집이라 들었는데, 어째서 주시받고 있다는 것인지요?”
습관인 듯 사내들은 싸늘하게 말을 받았다.
“모르는가 보군. 장원의 주인은 장신이라 하는데 연왕부의 사람이다. 알다시피 연왕은 위험인물이고, 그로 인해 전체가 주시받고 있다. 가까이할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런……!”
순간 추룡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조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로소 다가오는 심각성 하나! 북평까지 다녀왔지만 실제 그는 지금까지 장신과 북평왕부, 악충보를 각각 떼어 놓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인데, 그제야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훅, 뇌리에 파고들었던 것이다. 연관이 없는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게 선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
“악충보가 주시받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사내들은 싸늘히 계속 눈을 번쩍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금릉의 등 뒤에 있는 무장 단체이니! 주시받은 지 오래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치켜뜨이는 눈! 표정이 굳어졌지만 지체 없이 포권을 취해 보였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인데 이해가 가는군요. 하지만 저 소저나 불초는 연왕부와 관계가 없습니다. 소저는 보의 일로 낙양으로 왔다가 들른 것 같고, 도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알았으니 멀리해야 할 것이지만 부친의 체면을 보셔서라도 이번은 그냥 보내 주셨으면 싶군요.”
사내들은 힐끗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의 호패를 돌려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막 장군님의 아들이니……! 주의해라. 부친을 생각해서라도 어울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감사드립니다.”
추룡은 재차 포권을 취해 보인 후 장원의 문 앞으로 돌아와 조용히 일렀다.
“악 매, 돌아보지 말고 혼잡한 곳으로 가세요. 유시 초에 오던 길에 있던 사찰의 대웅전에서 다시 만나지요.”
금의위가 감시하는 상태에, 오가며 만난 사이라 한 만큼 악벽강 역시 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다.
“그럼……!”
특별한 사이가 아닌 듯 포권을 취해 보인 후 바로 말을 타고 대로로 나가 모습을 감췄다. 사라지는 것을 본 후 추룡 역시 별일 없다는 듯 적낭자의 고삐를 끌고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고.
“……!”
돌처럼 굳어진 표정. 걸으며 막여사가 떠올랐고, 함께 일하게 될 것이라 했던 도연이, 주체의 모습 등이 연거푸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갑자기 속이 말이 아닌 상태가 되고 있었다.
“어?”
“막 형, 표정이 왜 그래?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옷도 바꿔 입은 것 같은데?”
추룡이 친구들이 있는 객잔으로 돌아온 것은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 혹시 싶어 주위의 눈을 피하고자 한참 동안 거리 곳곳을 쏘다녔고, 옷까지 흑삼으로 사서 바꿔 입은 터였다.
정말 웃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런 추룡을 본 친구들은 크게 의아한 심정이 되었다. 악벽강도 보이지 않았고 옷까지 바꿔 입고 나타났을 정도라면 분명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표정 역시 경직되어 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소저께서는?”
웃을 수 없는 심정으로 추룡은 무겁게 대답했다.
“어, 잠깐 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갔네. 유시에 백마사에서 만나기로 했어. 특별한 일은 아닐세.”
아닐 수 없었다. 악충보가 주시받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은 선한 사람들의 특성일 뿐, 실제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역모설이 떠도는 왕부에 북평으로 가는 행인들까지 잡아 문초하려 드는 판국에 어찌 관련된 사람들의 집안을 주시하지 않겠는가. 특히 악충보의 경우는 말 그대로 금릉의 배후에 위치한 무장 단체인 셈인데.
좀 더 일찍 심각성을 깨달았어야 했던 것이다.
어쨌건 알게 된바 상황은 지극히 엄중했다.
북평에서 도연은 두 가지 소신을 확실히 했는데, 역모의 뜻은 없지만 대신들의 행동이 도를 지나치면 분명히 자신들도 그냥 있지 않을 것이라 했다. 죽음으로 주체에게 흰 모자를 씌울 것이라고.
조정과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압박은 이미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윤문의 선정으로 별일 없기를 바라야겠지만 다시 생각하니 그조차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장신의 모친이 한 이야기로, 홍무제가 태위를 두고 한자리에 불러 시험을 했고, 거기에서 주체를 후계로 세우려 했다면 윤문의 감정도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었다.
적대적인 대신들까지 주위에 운집해 있을 것이니 역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큰 셈이었다.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다. 일이 벌어지면 북평왕부보다 더 먼저 악충보가 절단 날 수도 있을 정도다. 당연히 자신 역시 피해 갈 수 없고, 그리되면 막여사와 모친인 장완옥까지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별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자신은 둘째 치고 부모의 안위가 걸린 일인데.
비로소 도연이 자신을 보려 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끌어들일 생각은 없으나 상황만큼은 알아 두라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기 쉬우니 염두에 두라는 것.
막여사와 마찬가지로 속이 타는 듯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부전자전. 굳은 표정이나마 침착히 말을 이었다.
“어쨌건 곧 떠나야 할 것 같네. 마음 같아서는 몇 곳 둘러보고 가고 싶지만 여긴 체류할 곳이 못 되는 것 같으니. 소저와 함께 갈 테니 남문 밖에서 만나세. 가능하면 자네들도 흩어져 움직이고 악충보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싶네.”
친구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 정도로까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으면……!
“정말 무슨 일인데 그래? 악충보가 어떻다고? 누군가와 시비라도 붙었나?”
가장 빠르게 떠올릴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추룡은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는 않아.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 있는데, 그냥 그렇게 좀 해 주게. 뭐건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라서 나도 답답하네.”
또한 그런 것이었다.
나쁘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윤문이 주체를 싫어하지 않아 중앙으로 부른다면 상황은 백팔십도로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극과 극의 중간에 있다는 것.
“알겠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리하겠네. 흩어져서 남문 밖으로 가 있겠네. 큰길로 빠져 첫 번째 보이는 숲 어름에 몸을 숨기고 있겠네.”
의아했지만 친구들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유시.
백마사로 간 추룡에게 또 뜻밖이라 할 일이 발생했다.
“가가!”
도착하자 악벽강은 약속한 대로 백마사의 대웅전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다가 모습을 나타냈다.
악벽강 역시 복장과 모습을 완전히 바꾸고 있었다. 둥글게 머리를 올리고 쪽빛 치마저고리를 입은 규수의 모습으로.
무사한 것을 본 추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 피하신 것 같군요. 뒤쫓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악벽강의 표정 역시 굳어져 있었다.
“다행히 없는 것 같았습니다. 설마 금의위가 나와 있으리라고는……!”
사태가 여기에 이른 이상 그녀 역시 장신과 연이 닿아 있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아무리 강한 성격이라 해도 결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이었다.
추룡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주위를 살핀 후 일단 사찰 밖으로 나가기를 권했다.
“친구들에게 남문 밖에서 기다리라 해 뒀습니다. 조심해서 가 보기로 하지요. 나서기까지 악 매는 처음처럼 승선원 통판님의 따님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