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위험 지대 (2)
“하하……!”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지만 비교하자면 자네들은 진짜 훌륭한 거야. 악충보 역시 훌륭하고. 집을 나와서 도처를 돌아봤지만 악충보만큼 제대로 된 향용은 보지 못했네. 노인들이 멧돼지를 잡아 달라 하지 않나, 어린애가 나무에 걸린 연을 내려 달라 하지 않나, 이런 향용이 천하에 몇이나 되겠나?”
곽영이 미소 지었다.
“없을 걸세. 그게 좋아서 우리도 입문한 것이네만, 악충보만큼은 진짜야. 대부분이 이 정도는 못 되지. 보다 임 형 쪽도 걱정이군. 소문은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모쪼록 잘되었으면 좋겠어.”
임백호는 입맛을 다시며 힐끗 저만치 전소와 함께 가장자리에 선 추룡을 바라봤다.
“막 형과 함께라면 반드시 될 것 같은데……! 솔직히 집을 나온 까닭도 그런 뭔가가 있어서였네. 나름대로 길을 개척해 등을 돌린 관부 쪽과 우리 쪽을 잇는 다리가 되어 보자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 하지만 난 출신부터가 치고 올라가기 어려운 여건이고, 막 형이라면 분명히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기거든. 그래서 함께 대리사로 가려 했는데, 갑자기 남평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니 걱정이야.”
송민의 눈길 역시 두 사람에게로 옮겨졌다.
“정말 최고야. 같은 나이에 이 정도로 차이가 나면 질투가 나야 할 건데 그럴 엄두조차 안 나. 무엇보다 노력파라는 점에서 그런 건데, 질투하고 싶어도 그 정도로 노력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
“크크……! 저런 실력으로도 악충보에 와서 제일 먼저 구한 게 도끼라며? 십 년 동안 나무를 해서 준마를 샀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진짜 제대로 했다 싶더군. 오 년 정도지만 나도 꽤 열심히 했다 생각했는데 비교하자면 장난 아닌가 싶네. 하루에 두 시진 수련한 게 전부였으니.”
한자방이 웃는 속에 다들 입맛을 쩍쩍 다셨다.
한데 이때였다.
씨이익!
“으아아아악-!”
“헛……?”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던 중에 실로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잠잠하던 장성의 정적을 깨고 돌연 어디선가 찢어지는 비명성이 터진 것이다.
“뭐야?”
“분명히 불화살이지, 저거?”
순간 친구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비명 소리가 들린 곳은 삼백 장가량 떨어진 우측 방벽 쪽이었는데, 눈을 돌려 보니 백 장 아래 가파른 비탈 쪽에서 빗발치듯 시뻘건 불줄기가 쏘아져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불화살 같은 것.
“뭔가!”
추룡과 전소도 달려왔고, 친구들은 즉각 경계 기색을 띠었다.
“원군 녀석들의 습격 같은데……! 불화살 공격 같아!”
전소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불화살이 아냐! 화살의 사정거리가 저렇게 길 수도 없고, 태울 것도 없는 방벽에 불화살을 쏠 리도 없어! 소문으로 듣던 신화비아神火飛牙 같아!”
“신화비아?”
“원군이 개발한 화약 무기! 화살에 화약통을 달아 쏘아 올리는 것인데, 사정거리가 백 장에 이르고 막기 불가능할 정도로 속도가 빠르다는 무기야! 저렇게 아래에서 쏘아져 올라오고 있잖아!”
확실히 멀리서 보기에도 쏘아지는 불줄기의 속도는 상상치도 못할 정도로 빠르고 사정거리 역시 일반의 화살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가 봐야 하는 거야?”
삼백 장! 멀다 할 수도 없지만 결코 가깝지도 않다.
눈을 번뜩이며 추룡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임무는 위치를 지키는 것일세. 명령이 있기 전에는 자리를 비워서 안 돼.”
뿌우웅∼ 뿌우웅∼!
더불어 장성 도처에 비상 뿔고둥 소리가 울려 퍼지며 돈대 여기저기에서 일직 무관들의 외침이 터지기 시작했다.
“허둥대지 마라! 상투적인 습격이니! 지원군이 올 때까지 철저히 자리를 지키며 사수한다! 포대砲隊, 즉각 지원!”
콰콰콰콰쾅-!
펑! 펑……!
찰나 천둥 치듯 하는 포성이 울리며 장성 위에 또다시 어마어마한 정경이 벌어졌다.
처음 겪는 일에 친구들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지만 익숙한 듯 병사들은 눈을 번쩍이며 경계 태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더불어 백여 문의 주자총통宙字銃筒들이 굉음과 함께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한 것이었다.
“맙소사!”
사 무림에서는 볼 수도 없는 화포의 위용! 어마어마한 굉음에 배 속이 울림과 함께 친구들은 다시 안색이 홱 일변했다.
화포까지 불을 뿜는 것을 보니 상황이 장난이 아니다 싶은 것이다.
한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쐐액-!
“으아아악!”
“왔다! 사수하라! 죽는 한이 있어도 성벽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와아아아……!”
오래지 않아 도처에 더 상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귀를 찌르는 파공음과 함께 친구들이 있는 쪽에도 시뻘겋게 화살이 퍼부어져 올라오더니 느닷없이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휙휙휙, 밧줄이 묶인 쇠갈고리들이 날아와 벽에 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뭇가지 등으로 위장한 수천의 원군이 어느 틈에 가파른 기슭을 타고 접근해 와 화약 화살을 쏘아 대는 등 갈고리를 던져 올린 것이었다.
“방패 앞으로! 자리를 지키면서 밧줄부터 끊어!”
“와아아……!”
연거푸 터지는 외침과 함성.
추룡의 안색까지 홱 돌변했다.
“위치로!”
급급히 방패로 머리 쪽을 가리고 전소와 함께 달려왔던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며 곳곳에 걸린 밧줄들을 퍽퍽, 칼로 쳐서 끊어 내기 시작했다.
“으와아아앗!”
당연히 원군이 쇠갈고리를 건 것은 장성 위로 올라서기 위해서였다. 걸린 밧줄에는 어김없이 원군들이 매달려 있었고, 끊을 때마다 비명과 함께 아래로 다시 굴러떨어졌다.
“대체 뭐 이런 놈들이?”
친구들 역시 거의 정신이 없었다. 미루어 측면에서 화살을 쏘아 올린 이유는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고, 틈을 타 접근한 것 같았는데, 빗발처럼 쏘아져 올라오는 화살하며, 처음 겪는 일이라 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방패로 몸을 가리고 정신없이 주위에 걸린 밧줄을 찾아 끊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아아압!”
콰차차창!
“아아아악……!”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쇠갈고리들은 사방에 걸렸고, 방벽 위의 병사들만으로 감당하기는 역부족인 것 같았다.
오래잖아 곳곳에서 시커먼 인영들이 방벽 위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고, 곧 여기저기에서 시퍼런 칼날이 번쩍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 무림의 무사들이 착용하는 것 같은 호구에 동물의 털로 된 덧옷 등을 입고 환도처럼 생긴 칼을 휘두르는 습격자들!
분명히 그것은 이야기로만 듣던 원군의 전통 복장이었다.
“대규모다! 사력을 다해 막아라!”
“와아아……!”
차차차창! 캉!
“으아아악!”
“크아아악……!”
오래잖아 추룡과 친구들도 혼전에 휩쓸렸다. 정신없이 쇠갈고리가 날아와 걸렸듯 기습해 온 원군의 수효는 의외로 많았고, 결국 뛰어 올라온 자들과 충돌하게 된 것이었다.
삼십 장 간격으로 화포가 설치된 돈대, 즉 초소가 있었고 주위에 스무 명, 일곱 장 간격으로 번을 서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감당할 수 없는 병력이 급습해 온 것이었다.
대단히 급한 상황으로, 어떻게든 아래쪽 진영에서 지원군이 올라오기까지 버텨 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놈들!”
“흐아아아!”
콰차창! 퍽!
“크아아아……!”
피가 튀고 살이 튀고! 추룡과 친구들은 정신없이 뛰어 올라온 자들을 베어 젖히는 한편 계속 밧줄을 끊으며 벽을 타고 올라오는 원군을 제지했다. 완전히 돌아 버릴 듯한 심정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장성은 견고했지만 견고한 만큼 위험하기도 한 이중성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한번 잃고 나면 아군 역시 탈환하기 어렵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똑같이 올라오기 힘든 가파른 고지 위에 있고 포대까지 있어 적에게 넘어갈 경우라면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장악하는 쪽은 언제든지 아래쪽으로 범람해 내려갈 수 있었다.
더 위험한 것은 그들의 진영이라는 이도성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건너에는 첩첩 산맥이 펼쳐져 있는 반면 장성을 넘어서면 이쪽은 곧 평탄한 벌판이 시작되고 내성內城이 바로 코앞인 셈이었다.
성벽을 잃으면 바로 위험이 닥친다는 뜻! 왕부에 갔을 때 도연은 장성이 무너지면 후방에서 채비를 할 때까지 왕부를 거점으로 싸우다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상황이 이 정도면 결코 허언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북평에서 산동성 구간을 거친 금릉까지는 대부분 평지라 물러서는 대로 점령당하는 것이었으니까.
당장만 해도 어떻게든 서둘러 올라온 자들을 베어 젖히고 기어오르는 자들을 제지해야 했는데, 아무리 무예가 강해도 이것은 몇몇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수천이 사방에서 월장을 해 오고 있는데 무슨 수로 소수가 막아 낼 것인가. 한시바삐 지원군이 올라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쨌건 그냥 있을 수 없는 만큼 추룡은 결단을 내렸다.
“힘들더라도 수비 간격을 넓혀 주게! 임 형! 우측 지원을 맡아!”
“하아아압!”
콰차차창!
“크아악!”
아직은 많지 않았지만 올라온 자들이 병사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수비가 무너지게 마련이므로, 친구들에게 좀 더 넓게 수비를 하게 하고 좌측으로 치달리며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선 것이었다.
“하!”
차차차창! 촤ㄱ촤ㄱ촤ㄱ!
“으아아아악……!”
임백호 역시 우측으로 달렸다. 닥치는 대로 베고 쓰러뜨리고, 또한 정신없이 날뛸 수밖에 없었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타-!”
퍽퍽! 퍽!
“으아아악!”
빛살같이 치달리며 번뜩이는 추룡의 장검은 시릴 듯이 차가웠다. 산적들을 베어 젖힐 때 그러했듯 일거수일투족, 번쩍일 때마다 철저히 적의 목을 갈라놓았고.
전쟁에서 자비는 없는 것이었다. 치지 못하면 내가 죽고, 동료가 죽고, 나아가 나라가 죽는 것이었다.
“흐아아아!”
차차창! 창!
“크아아……!”
임백호 역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원래도 자비가 없었던 게 그의 검이었지만 추룡을 만나 새로이 눈을 뜬 그의 검 역시 더욱 무서워져 있었다.
철저히 상대의 허를 파고드는 살검殺劍으로 변해 뛰어오른 자들을 거꾸러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알게 된바 원군이 범람하고 있는 곳은 처음 불화살이 쏘아졌던 지점인 우측으로 삼백 장,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이백 장 사이.
정신없이 치달리며 올라온 원군을 거꾸러뜨렸고, 그러고 나면 다시 번개같이 되돌아오며 그사이 또 올라온 자들을 치고! 그야말로 정신없이 동분서주하며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다.
“와아아-!”
창창!
“으아아아악……!”
한두 사람으로서 해낼 수 있는 수비가 아니었지만 내공신법을 지닌 고수가 치달리기 시작하자 그래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지원에 힘입어 북평군들도 사력을 다해 수비에 임했고, 적의 규모와 위치가 확인되자 더 멀리에서 경비를 하던 병사들도 달려와 힘을 합쳤다.
“모조리 섬멸시켜라!”
“와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지원군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숙련된 그들은 올라오기 무섭게 방벽 위를 치달리며 새카맣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또한 소나기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투투투투투……!
“아아아악!”
그러나 원군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로 인해 뛰어오르는 자들은 거의 사라졌으나 거리를 두고 물러나 빗발치듯 화살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살촉의 뒷부분에 화약의 약통이 달린 신화비아! 그것이 어마어마하게 퍼부어져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방패 올려!”
콰콰콰콰쾅-!
“으아아악……!”
대응해 천둥소리를 내며 연방 불을 뿜는 주자총통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는 교전이었다.
그러기를 무려 두 시진. 날이 밝을 즈음에야 교전은 끝이 났다.
북평군은 고비를 넘겼고 또 한 번 장성은 지켜진 것 같았다.
대부분 그러하듯 불시 습격은 시작이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 초기에 적절히 대응을 하면 지켜지고 초기 대응에 실패하면 무너지는 것이었다.
“어이없군……!”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
추룡도, 임백호도, 친구들도 전신에 피 칠을 하고 있었다. 진영에서 지원군이 달려오기까지 걸린 시간이 대략 삼각 정도, 얼마나 치열하게 치달리며 검을 휘둘러 댔던지 또 땀이 발목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다.
몇이나 되는 원군을 베어 냈는지 자신들조차 알 수 없었다.
“장성 수비가 이런 거였나……? 수시로 공격당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
잠깐 사이 악몽을 꾼 것 같았다. 기실 시작되기 직전만 해도 장성에서 번을 서고 있다는 것 하나로 보람을 느끼며 한가하게 잡담을 나누던 친구들이었다.
비로소 장성 경비가 잡담을 하며 할 정도로 방심할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서 있다는 것.
실제로 아군들 역시 무수히 죽은 것 같았다.
뛰어오른 자들에게도 당했지만 보다 큰 피해는 쏟아진 신화비아로 인한 것이었다. 화약을 장전한 이 화살의 속도는 그야말로 빛살 같아 눈으로 보고 방어하기는 늦다.
퍼부어진다 싶으면 무조건 방패부터 앞세워야 할 정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얇다지만 철판을 댄 것이 방패인데 그것조차 뚫는 위력을 지녔다.
입증이라도 하듯 교전이 끝났을 무렵 친구들과 병사들의 방패는 박힌 화살들로 거의 고슴도치 꼴이 되어 있었다. 방패 없이 오르는 게 자살행위라 한 말이 허언이 아닌 셈이었다.
“대체 몇이나 몰려온 거야? 천? 이천?”
“상태를 보니 더 됩니다. 척후대도 발견 못 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동해 왔는지 모르겠군요. 삼천은 되는 것 같습니다.”
들것에 실려 내려가는 부상자와 시신을 보며 망연자실하고 있는 친구들의 눈에 저만치에서 우양이 굳은 표정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친구들이 번을 서던 곳은 낮에 비무를 했던 우양의 연대가 있는 지역이었다. 실려 내려가는 부하들을 보며 우양은 침통하게 사의를 표시했다.
“한 것이 뭐가 있다고……!”
대답하는 친구들 역시 힘이 없었다.
자신들은 하루지만 이들은 늘 겪는 일이다. 미안한 마음까지 들고 있었다.
낮에 실력을 겨루고, 웃으며 함께 식사를 했던 그들. 어떤 이가 전사한 것일까.
결코 마음이 편할 리 없는 것이었다.
복귀復歸 (1)
“공격이 있었다고요?”
추룡이 장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점심시간쯤이었다.
돌아온 추룡을 본 악벽강은 적잖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늘 짓고 있던 웃음이 보이지 않았고 표정은 침통, 기운까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추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하더군요. 듣긴 했지만 북평은 생각보다 더 위험한 지역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왕부가 있다는 것조차 이해가 안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