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거용관居庸關에서 (2)
어느 쪽이나 쉽지는 않았다. 이동로를 이용하면 다소 편하기는 했지만 산 자체가 수직의 반인 경사도에 더 심한 곳까지 있어 꼭대기까지 오르기가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었다. 산을 타고 그냥 오른다면 상당한 고수라 해도 힘겨울 정도이고, 성벽 위의 이동로를 따라 올라가도 일반의 경우는 숨이 턱에 차 쉬어 가야 할 정도였다.
익숙한 듯 주탁은 그래도 가볍게 발길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지세가 이렇기에 그나마 북평이 건재한 것입니다. 지금은 좀 낫지만 왕야께서 부임해 오실 때만 해도 북평군의 병력은 삼천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수시로 공격해 온 이도군은 이만이 넘었는데, 이 지세와 장성이 아니었다면 북평은 이미 그들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고, 나라가 또 어찌 되었을지 모릅니다. 장성이 무너지면 중원의 안위는 끝납니다. 고혈膏血로 쌓아 올린 장성이라지만 나라를 생각해 보면 시황께서 큰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나마 편안한 성벽 이동로로 오르기조차 숨이 턱에 받치는 산꼭대기 능선 위에 치솟은 장성! 이런 지세라면 누구라도 쉽게 함락할 수가 없다. 이 정도의 방벽이 무너진다면 여느 방벽 정도는 간단히 격파될 것인 만큼 장성에 중원의 안위가 걸렸다는 말이 분명히 허언은 아니었다.
“삼천의 병력으로 이만 병력을 깨트렸다니 정말 대첩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굴복시켰다면 잠잠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도 전투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주탁은 핫, 하고 웃었다.
“녀석들 하는 짓이 뭐…… 정말 호전적입니다. 평화보다 싸움을 좋아하는 것 같다 여겨질 정도인데, 정확히 당시의 싸움은 섬멸이 아니었습니다. 총사님께서 묘계를 내시고 왕야의 기지機智로 허를 찔러 이도까지 급습해 갔지만 삼천의 수효로 공성전을 치를 수 없었습니다. 편법을 써서 불침을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 낸 것입니다. 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다급하니 응한 눈치긴 하지만 후로도 계속 습격을 감행해 오고 있습니다. 끝까지 야심을 버리지 않는 눈치입니다.”
휴전 아닌 휴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하는 것입니까?”
주탁은 계속 웃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건 몽고 전체를 정벌해 무릎을 꿇려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이도 하나인데, 그조차 만만치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군세를 키워 가고 있지만 그들은 더 빨리 병력을 늘려 언제나 우리 쪽의 서너 배에 달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고, 지금은 십만을 웃돕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군비 및 병력 보강을 허하지 않고 있으니 지키는 우리들로서는 울고 싶을 정도입니다.”
서너 배에 달하는 병력과 대치하여 목숨을 걸고 맞서는 입장. 말이 쉬울 뿐 그대로 울고 싶을 수밖에 없다.
“오래 복무하신 것 같군요.”
“서른다섯 살이고 북평에서 났습니다. 원이 밀려나면서 출생했지요. 스무 살에 병사가 되어 늘 고향인 북평이 안정되기를 원해 왔지만 지금까지도 이 모양입니다. 여기에 있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심정을 모릅니다.”
이 모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이 본 북평 내성은 안정감이 있었으니까.
“충! 국!”
방벽에 도달한 것은 삼각이 지난 후였다. 수월찮은 무예를 수련한 친구들이 올라가는 데 걸린 시간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대단하군! 이런 고지에 어떻게 이런 방벽을 쌓은 것이지?”
올라가자 눈앞에는 거대한 방벽이 산등성이를 타고 용이 꿈틀거리듯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규모 역시 상상을 초월했다.
사 장에 가까운 높이에 아래쪽의 두께가 삼 장, 방벽 위의 폭까지 일 장 반에 달했다. 궁시弓視가 뚫려 있는 요철형의 성벽에 삼십 장 간격으로 건너편을 겨냥한 포대砲臺와 돈대(墩臺-초소)가 설치되어 있었고, 곳곳에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삼엄히 경계를 서고 있었다.
“쌓은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올라오기 힘들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겠어. 정말 난공불락의 방벽이야. 이런 가파른 산등성이에서 삼 장이 넘는 방벽을 어떻게 넘어서겠어? 진시황이 정말 백년대계를 계획한 것이군.”
능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장벽을 보며 친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주탁은 쓴웃음 지었다.
“그래도 칭기즈칸은 돌파했습니다. 결과 중원은 함락되어 최악의 비극을 맞이했었고요. 절대 안심할 수 없습니다.”
친구들의 가슴이 한순간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분명히 원군은 장성을 넘어 중원을 점령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곳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지……?”
주탁은 번쩍이는 눈으로 첩첩이 펼쳐진 거친 산봉우리들을 보며 설명했다.
“칭기즈칸군은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포로들을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는 등 끔찍한 행동으로 공포를 주었고, 백만 대군을 포진시킨 후 밀려올 때도 포로들을 앞세웠습니다. 금군도 사력을 다해 시위를 당겼지만 죽어 나가기 시작한 것은 앞세운 포로들이었고, 결국 장벽 아래에 시체로 다리가 놓였습니다. 시체를 밟고 장벽을 넘어선 것입니다. 서하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결국 전체가 무너진 것입니다.”
쓴웃음과 함께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문화를 가졌습니다. 동족 간의 약탈혼掠奪婚까지 인정하는 문화로, 병사들이 약탈한 물건은 포상으로 내립니다. 천하를 다 뒤져도 이런 곳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군은 더 잔인하고, 가는 곳마다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상상을 넘어섭니다.”
펼쳐진 능선과 골짜기들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보기에는 빈 계곡들 같지만 지금도 도처에 매복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절대 방패를 들지 않고 올라올 수 없습니다. 자살행위나 같은 것입니다.”
약탈한 물건을 포상으로 인정하는 문화. 이런 문화라면 병사들은 하나라도 더 약탈하려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한다는 이야기였다.
“동족 간의 약탈혼까지 인정한다 하니 뭐라 할 수조차 없지만 너무 좀……!”
원시적이라 생각하며 친구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뭐, 이 정도는 약과. 추룡은 더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황산의 산채를 소탕할 때 왕평이 했던 이야기.
그는 원군이 다시 장성을 넘어서면 이번에는 중원을 완전히 피로 씻을 것이라고 공언했는데, 엄포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적지를 점령하면 원군은 실제로 도성屠城을 했다.
남녀노소 없이 양민들을 모조리 끌어내 도륙, 성 전체를 피로 씻어 내는 학살을 감행하는 것이다.
비교하자면 약탈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봐야 했다.
“수시로 습격해 온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인지요?”
주탁은 메마르게 웃으며 대답했다.
“거의 하루걸러 한 번입니다. 상부의 지시와 상관없이도 행동합니다. 저들의 눈에는 중원 자체가 보물 창고로 보이는 셈이라 장성만 넘어서면 마음껏 약탈해 이득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추룡과 친구들은 첩첩이 늘어선 산들을 보며 내륙에서는 당연한 것같이 느껴지는 나라의 안정이 누구로 인해,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 것인지 비로소 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교해 협객이 어쩌고 하며 어쭙잖게 무예를 과시하며 떠도는 자들을 생각해 보면 철부지조차도 아닌 셈이었다.
“둘러보았나?”
“경계가 철저하더군요. 모든 병사들께 감사하고 싶습니다.”
추룡과 친구들이 장성에서 내려온 것은 한 시진 후였다.
다시 장옥을 만났는데 한데 그가 또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다들 애쓰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안전하진 않네. 안전하려면 최소한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병력을 더 보충시켜야 하고, 더 확실히 하려면 접근할 생각을 못 할 정도로 기세를 꺾어 놓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궁실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자들이 꼴을 좀 봐야 해. 그러나 그들은 장성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지. 후방의 무신들도 마찬가지일세. 워낙 남부南部 출신들만 버티고 있어서.”
“대신들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국경을 봐야 할 것인데 오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남부 출신이라는 것은?”
왕부에서도 그랬지만 장옥은 속을 감추지 않고 입바른 말을 잘하는 인물인 것 같았다.
“모르고 있나 보군. 현 조정의 실세인 인물들은 거의가 남부 출신의 관료일세. 중앙 군부의 사람들도 같아. 황상의 실책이 빚어낸 오류인데, 개국 당시 황상께서는 심하게 종교를 탄압하신 바 있었네. 백련교를 친 것을 시작으로 소요를 막고자 모든 종교에 집회 금지령을 내린 바 있었지. 이로 인해 불교와 도교가 크게 위축되었는데, 전통적으로 북쪽과 서쪽 지역에 도·불교의 신도들이 많네. 반면 남부 지역에는 학문과 예의를 중시하는 유교가 널리 퍼져 있고.”
중원의 종교 상황.
“공백기에 남부의 유교를 신봉하는 학자들이 크게 일어섰네. 도·불교와 달리 유교란 학문이니 막을 수도 없지. 실세인 대신들이 대부분 당시 일어선 인물들일세. 자리를 잡은 후로 그들은 남쪽의 인재들을 중용하고 북쪽 출신들을 홀대하는 등, 차별이 여간 심하지 않아. 도·불교라 하면 취급도 않을 정도고 북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려 하지 않지. 이로 인해 도·불교를 믿는 인재들이 속속히 왕부로 들어오고 있지만 그조차도 중도에서 차단당하고 있는 실정일세.”
종교와 지역까지 말썽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추룡은 문득 도연과 원기가 떠올랐다.
묘하게 여겼던 점으로 듣고 보니 왕부의 총사, 참모직을 맡고 있는 두 사람 역시 도인과 승려였던 것이다.
“아는 것과 다소 다른 것 같사온데, 예부에 승록사와 도록사까지 두어 살피고 있지 않습니까? 도 총사님도 승록사의 분이셨다 들었는데……!”
픽, 장옥은 실소 지었다.
“물론 살피지. 문제는 그게 감시여서 탈이지만. 일반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네. 승록사가 제대로 된 곳이라면 총사님께서도 나오지 않으셨을 걸세.”
보살피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감시하기 위해 있는 부서!
추룡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진영 안도 좀 둘러보게나. 오후에 사열이 있으니 구경도 하고. 석반夕飯은 같이하도록 하세.”
주탁을 따라 나가며 추룡은 조정이 바로 복마전이구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반면 북평군에 대해서는 느낌이 좋았다.
“주 형!”
“아, 우 형.”
나오자 주탁은 추룡과 친구들을 진영 곳곳으로 안내했는데, 오래잖아 또 예기치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진영 내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서, 움직이던 중 주탁과 친분이 있는 듯한 또 다른 장수와 부딪친 것이었다.
육 척의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또한 화등같이 번쩍이는 눈에 어깨에 표범 형상의 견장이 있는 갑옷을 입은 서른대여섯 살가량의 인물.
주탁을 본 그는 반색을 하며 미소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총령님을 모시게 되더니 얼굴 보기가 힘들군. 어찌 지내고 있나?”
“그럭저럭. 별로 편하지는 않네. 윗사람들만 보게 되고 모시게 되니. 아무렴 부하들과 지내는 게 훨씬 편하고 좋지.”
“하하……! 그런가?”
나타난 장수는 번쩍이는 눈을 친구들에게 돌렸다.
“이 친구들은? 왕부 쪽 부하들인가?”
“삼가게. 복장만 그러실 뿐일세. 총령님의 손님이신데 장성을 보러 오셨다고 하네. 안내해 드리고 이번엔 진영 안을 보여 드리는 중일세.”
주탁은 추룡과 친구들에게 그를 소개했다.
“우양于諒이라고 합니다. 소관과 동기인데 중군의 중랑장입니다. 무예가 매우 출중하지요.”
신분도 그렇고, 모습만 봐도 출중함이 느껴질 정도라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막이라 합니다.”
“임입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불상사를 피해 친구들은 성이나 이름 끝 자를 대어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우양은 흥미롭다는 듯 친구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저도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젊으신데도 다들 보통 기도가 아니시군요. 큰 힘이 느껴집니다. 필경 일반의 분들은 아니신 것 같고, 타 군부의 분들이신가요?”
난처했지만 호의로 묻는 모습이라 대강이라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정이 있어 자세한 말씀은 올리기 어렵습니다만 향용 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뜻밖이었던지 주탁까지 멈칫하는 모습이 되었다.
“향용이라면, 사 무림 쪽의 방파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우양은 힐끗 주탁을 바라본 후 고개를 갸웃했다.
“향용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이런 분들께서 어찌……! 무예를 숭상하는 남자라면 장군부를 지향하는 게 우선이고 최소한 관패를 얻는 게 낫지 않습니까? 같은 일을 하더라도 더 큰 일을 하는 것인데요.”
솔직히 그건 그랬다. 향용 역시 하는 일이 수월하지는 않지만 일단 군, 관의 뒤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이다.
말수는 없지만 소신 있게 의견을 피력하는 송민이 포권과 함께 대답했다.
“말학들 역시 그 길이 나라와 양민들을 위해 더 크게 헌신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진로를 놓고 고심하였는데, 좋긴 해도 부질없는 권문세족의 정쟁에 휩쓸리기 싫어 향용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양은 ‘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알 듯합니다! 소관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는데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솔직히 소관도 실없는 정쟁 따위에 휘말리거나 하고 싶지 않고요. 하지만 사찰로 가는 까닭이 중 보러 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파계승 싫다고 너도나도 피하면 부처는 누가 지킵니까?”
부처 보러 절에 가지 파계승 보러 가느냐.
송민은 순간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우양의 말이 그대로 그의 소신에 대한 심장을 찔러 내었던 것이다.
사실 무인들이 병사가 되고 관포가 되는 것은 입신을 꾀하는 외에도 나라를 지키고 법과 질서, 나아가 백성들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지니기 때문이었다.
한데 정쟁이나 탐관오리가 싫다고 모두가 군, 관부를 피한다면 치안과 국방은 누가 지키는가?
뼈 있는 말을 한 후 우양은 거듭 웃으며 포권을 취해 보였다.
“말이 좀 과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게 소관의 생각이라 드린 말씀이니 양해하시고요. 사실은 향용도 큰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다가도 나라가 위험해지면 뛰어드는 게 향용의 호걸들이시니. 보다 북평군을 알고자 하신다면 이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겉만 본다면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피차 무예를 숭상하여 무사가 되었으니 그쪽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탁도 동감이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과한 점이 없지 않지만 호탕하고 솔직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친구입니다. 저도 드렸던 이야기지만, 실력 있는 친구들이 꽤 많습니다. 진영이나 건물 따위야 껍질일 뿐인 것이니 치우고, 차라리 한바탕 비무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