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기승 도연 (6)
“어릴 때부터 보아 와서 처자 이상으로 친구들을 좋아하는 것이 호걸들의 특성 중 하나인 줄 잘 안다! 하지만 친구들과 웃고 즐기는 사이 가족들은 늘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마련이지! 최소한 나는 그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는 듯 좀 그러하다! 서운함이 느껴지나?”
제대로 걸린 것 같았다.
“아, 예!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남평으로 가면 친구들은 쉽게 만날 수 없을 것이오라……!”
악벽강은 계속 눈을 딱 감고 추룡의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
“물론 알지. 하지만 이해해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그 밖에도 우리 관계는 현재 너무 진행이 없다. 정혼까지 한 사이인데, 혹시 내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추룡은 부동자세로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요. 악 매…… 아니, 당주님께서는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분이신데요. 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입니다!”
“진심이냐?”
“옙.”
“그러면 한 번이라도 입맞춤 같은 것을 해 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나?”
추룡은 눈을 끔벅거렸다. 가만 생각하니 그런 적이 없는 것이다. 마냥 좋긴 한데 한 번도 다른 생각을 가져 보거나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실은 별로……! 그냥 함께 있기만 해도 너무 좋고 흐뭇해서……!”
악벽강의 목덜미가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것을 숙맥이라 하는 거다! 그런 쪽으로는 사실 나도 잘 모르지만…… 어쨌건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필경 나이 차이가 극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 같으니! 우리, 그것을 한번 해 보자.”
“엣……?”
순간 추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워낙 악벽강의 기질이 그렇지만 상상치도 못한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것을 명령하시면……! 이런 일은 자연스러워야…….”
하지만 어림없었다.
“흥!”
순간 앞을 오락가락하던 악벽강이 휙, 추룡의 품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약간은 무리하더라도 용기를 내어야 할 때가 있다고 봅니다.”
“아, 예.”
어설픈 추룡. 비로소 팔이 악벽강의 가는 허리에 둘러졌고, 꾹 그녀를 포옹하며 서투른 입맞춤을 했다.
특이한 연인. 변함없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용관居庸關에서 (1)
아침.
“하-!”
두두두두두……!
친구들은 마침내 장가구로 출발했다.
장성을 보기 위해서였다.
중원의 최북단 끝, 발해만과 펼쳐지는 산해관에서부터 시작하여 감숙서의 가욕관까지 만 리에 거쳐 펼쳐져 있는 중원의 불가사의인 곳!
북방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시황이 수백만 인력을 동원하여 축조하기 시작하였으나 섬서에서 아래로 뻗어 내린 남쪽은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고 있는 어마어마한 장성이었다.
얼어붙은 산하, 살을 엘 듯한 기온.
싱글벙글, 그러나 말을 치달리는 추룡과 친구들은 그저 만면에 웃음뿐이다. 같이 있다는 게 좋고 함께 달린다는 게 좋은 것이다.
“막 형, 뭔가 또 좋은 일이라도 있어? 늘 웃는 모습이긴 하지만 어제 돌아올 때부터 특히 그런데?”
악벽강은 보이지 않았다.
“어, 그냥 좀. 자네들과 함께 있는 게 좋아서.”
“그야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우리하고만 다녀도 되나? 소저께서 서운해할 건데? 남다르게 호탕하신 소저인 건 알지만 그래도 여자거든. 함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여자들의 마음은 오히려 친구들이 더 잘 헤아리는 듯했다.
싱글벙글, 그래도 추룡은 웃었다.
“어, 안 그래도 어제 이야기했는데, 이해해 주셨어. 남평으로 가면 자네들을 보기 어려울 테니까 함께 있는 동안 의를 나누라고. 같이 왔으면 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남겠다고 하셨네. 사실 좀 애매하잖아.”
확실히 좀 그렇긴 하다. 계급은 까마득한 상관이고 관계는 친구의 정혼녀이니 악벽강이 오면 분위기가 굉장히 이상해진다.
악벽강도 어디에 맞춰야 할지 모르고 친구들 역시 헤매게 되기 쉽다.
임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이해가 좀 안 가. 소저께서 최고라는 것은 완전히 인정하네! 명문 중의 명문인 탕음악가의 후예에 막강한 무예, 빼어난 미모하며, 이런 여자는 정말 드물지. 색왕녀라고 농담을 했지만 솔직히 이런 분께는 주눅이 들어서 말도 붙이기 어려워. 더욱이 나이까지 한참 위잖아. 그런데 어떻게 사이가 좋아진 건가? 자네가 천만인의 오빠인 건 인정하지만 불가사의한 것 같은데?”
사실 불가사의하기도 하다. 여기에 추룡이 악충보의 말단 무사에, 내력까지 나중에 밝혀진 걸 생각하면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는 게 더 신기한 것이다.
추룡도 고개를 갸웃했다.
“어찌 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일단 마시에서의 만남이 계기가 된 것 같아. 당시 실력을 다소 높이 보셨던 것 같은데, 입문할 때는 그렇지 않았지. 꼴찌에 붙어 입문한 게 이상하셨던가 봐.”
“수상하다 보신 건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이상하다 여기신 것 같고, 첫 녹봉을 받아 둔계로 갔을 때 우연히 부딪친 적이 있었네. 소저께서도 황산성에 오셨던 것 같은데 눈에 띄자 정체를 감추고 공격해 오시더군. 한바탕한 후 대화를 나눴지. 막 대협이라 부르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네.”
“아하.”
친구들은 비로소 악벽강이 왜 갑자기 추룡을 막 대협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사이가 좋아진 건 보주님께서는 서둘러 소저를 혼인시키려 하신 때문인데, 궁지에 처한 소저께서 응원을 청하셨지. 금릉으로 오가면서 사이가 좋아졌네. 둔계에서 부딪쳤을 때부터 좋은 분이라 생각했지만 늘 선머슴 차림을 하고 다니시던 분이 제대로 차려입고 나서니 왜 그렇게 좋아 보이던지. 완전히 얼이 빠질 정도였어. 소저께서 혼인을 않고 계신 이유 중 하나가 떠나고 나면 홀몸이신 보주님께서 외로워지실까 우려해서인데, 효심까지 지극하신 것을 알고 나니 그냥 마음이 기울어지더군.”
꼭꼭 숨기고 있었던 무언가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하긴 어려웠네. 오르지 못할 나무라 생각했지. 한데 뜻밖에 소저께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던가 봐. 직후 우연한 일이 생겨 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급속도로 가까워진 걸세. 이만한 분이라면 평생을 같이해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대하기 어렵지 않은가?”
“괜찮아. 나이 차가 있어서 조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나 이상으로 신경 써 주니까. 사귀어 보지 않아 연하 쪽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진중하고 가볍지 않아 좋은 것 같네. 무척 편안하고 미더워. 더러는 완전히 귀엽기도 하네.”
“카카카……! 소저께서 귀엽다니 이해가 안 가는군!”
“안 어울리는 표현 맞아! 우아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분명히 친구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악벽강을 아는 만큼 추룡의 생각은 다르다.
“사실 처음에는 나도 몰랐어. 그냥 굉장히 호방하고 남자 같다고만 생각했지.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세. 정말 귀여운 점이 있어. 예를 들자면 가끔 무릎을 차곤 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럴 때는 완전히 나이가 안 보여. 어린애보다 더하대도?”
악벽강의 주특기.
그것은 분명 마음의 표시였다. 실제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면 무릎을 차곤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알고 보면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악서희 역시 장신에게 그러하듯 아주 미덥고 가까운 사람에게만 하는 애정의 표현과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이럴 때의 악벽강은 확실히 어린애 같아 보이는 점이 있는데 엄청나게 귀엽기도 했다.
“카카카……! 완전히 맛이 갔군! 무릎을 차는 게 다 귀엽다니?”
그러나 내막을 모르는 친구들로서는 역시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누가 들어도 사실 이건 좀 이해가 안 가는 이야기였으니까.
북평에서 백 리.
그런 사이 이윽고 평지로만 일관되던 앞 저만치에 눈 덮인 연산산맥의 웅장한 정경이 보이기 시작했고, 더 가까이 다가가자 급기야 산 능선을 휘감고 둘러쳐진 장성의 방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왔다!”
“드디어 중원의 끝!”
두두두……!
치달리는 친구들의 얼굴에 일제히 큰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그대로 중원의 끝이었다. 황도조차 가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라 했듯 중원에서 태어났다 해도 여기까지 도달할 사람이 이 시대에 과연 몇이나 될지.
특히 추룡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아래에 광동성이 더 있긴 하지만 복건은 중원의 남쪽 끝인 지역이다. 대륙을 완전히 종단한 셈이 되는 것이었다.
“하하……! 언젠가는 반드시 와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감회가 깊군! 정말 중원이 넓어. 배를 타고 말을 타고 쉬지 않고 와도 두 달 반에서 석 달이 걸릴 거리라니! 사천, 서장으로 횡단하는 거리는 더 멀다고 들었는데, 다음은 촉산을 봐야지.”
대곤륜산.
휘주에서 사천, 서장까지라면 대륙을 횡단하는 것으로, 종단의 세 배 거리가 된다.
호연지기가 치솟는 듯 다들 얼굴이 달아올랐다.
“확실히 우물 안의 개구리는 곤란한 것 같아! 남자라면 늙기 전에 천하를 둘러봐야 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군. 넓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부딪쳐 보니 여실히 대단함이 느껴지네. 내가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어.”
“암, 정말 꿈도 못 꿨지! 말을 얻은 것조차 막 형을 만나서가 아닌가.”
아무리 길이 편하다 해도 걸어서 휘주에서 장성까지 온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렵다. 항주까지만 해도 어렵게 여비를 마련해 왔다는 친구들이 아닌가.
좀 더 안으로 달려 들어가자 급기야 연산산맥의 지류에 속한 팔달령八達嶺의 기슭이 나왔고, 형형색색의 깃발을 휘날리는 거용관居庸關이 보였다. 산 계곡 아래에 거대한 성을 이룬 형상으로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 쓰인 현판이 붙은 거문이 보였고, 삼 장 높이의 성벽 곳곳에 경비병들이, 문 앞에는 여덟 명의 위병이 장창을 번쩍이며 지키고 있었다.
당연히 위세는 악충보와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무위를 떠나 국경을 지키는 그들은 군기로 똘똘 뭉쳐진 정규군인 것인데, 관사나 일반 무림 방파와는 역시 기세가 다를 수밖에 없다. 갑주까지 입고 있는 터이다.
도착하자 추룡은 곧 말에서 내려 위병들에게로 다가가 포권을 취해 보였다.
“총령님을 뵙고자 합니다. 막 성을 가진 사람이 찾아왔다 하면 아실 것입니다.”
의심을 피하고자 입은 금위군의 복장, 위병들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부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따르시지요.”
친구들을 진영 안으로 안내해 들어갔다.
“이야…… 굉장하군!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은데?”
문을 통과하는 즉시 친구들은 내부가 생각보다 훨씬 넓은 것을 알았다. 성벽도 산기슭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아래쪽에 성처럼 위치해 자리 잡은 군영 속은 도처에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은 막사들에 넓은 연병장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예상한 대로 군기는 굉장한 것 같았다.
천하의 강군이라는 명성답게 느슨해 보인다거나 어슬렁거리는 병사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걸어도 꼿꼿이 허리를 펴고 힘 있는 보폭으로 길 가장자리로만 걸었고, 둘 이상이 움직일 때는 한결같이 척척, 발을 맞춰 걷고 있었다.
“구령 맞춰!”
“하나! 둘!”
살을 에는 듯한 빙풍이 불어닥치는 기온임에도 연병장의 주위에는 상의까지 벗어젖히고 무리 지어 구보를 하고 있는 병사들도 보였다.
“죽음이군! 향용 쪽과는 비교가 안 되는 기분인데?”
“아무래도 정규군이니까. 특히 여긴 위험지역이거든. 전투가 끊이지 않는다 들었는데, 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들 혀를 내둘렀고, 한참 만에 위병의 안내에 따라 진영 중간에 위치한 장군부의 집무전 앞에 도착했다.
“기별 올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장옥이 모습을 보인 것은 직후였다. 다시 만난 그는 왕부에서 만났을 때와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총령의 신분 그대로 어깨에 호랑이가 포효하는 형상의 견장이 얹힌 흑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원래도 위압적이라 할 정도의 대단한 체격이었지만 이런 갑옷까지 입으니 비로소 그가 일반 무인들로서는 얼굴조차 대할 수 없는 대장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장군님.”
“일찍 왔군.”
집무전 앞까지 마중 나온 장옥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장성을 둘러보게 하라는 분부 받았네. 바로 올라갈 텐가?”
“그렇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녀오게. 진영도 두루 살펴보고. 오후에 사열이 있으니 더 잘된 것 같군. 안내해 드려라.”
“명!”
체면이 있는 만큼 장옥은 위엄을 갖춰 대동하고 나온 부관인 듯한 인물에게 지시했고, 부관은 ‘척!’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에 붙이며 대답했다.
“모실 테니 이리 오십시오. 주탁周鐸이라 합니다.”
추룡과 친구들은 멈칫하는 심정이 되었다.
서른 중반의 나이. 그는 칠 척에 가까운 체격에 섬전같이 번쩍이는 눈빛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어깨에 표범이 엎드린 형상의 견장을 단 갑옷을 입고 있었다.
자그마치 중랑장의 계급이었던 것이다. 천 명 이상 만 명 이하의 부하를 거느린 신분.
이런 인물이 친구들을 안내하겠다 하니 부담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어찌 장군의 안내를 받는다는 것인지……! 그냥 장졸 한 사람만 붙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주탁은 빙긋이 웃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명령에 따르는 것뿐이니. 복장 하나의 차이뿐이지 범상치 않은 기도가 한결같이 예사의 분들이 아닌 듯싶습니다. 총령께서 안내하라 하실 때는 그만한 내력 역시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분들을 보면 늘 가르침 받고 싶다는 호기가 치솟는데, 싫지 않으시다면 차후 기회나 한번 주셨으면 싶습니다.”
호걸의 기질이 살아 있는 인물이었다.
“뵙기만 해도 위압감이 들 정도인데 가르침이라니요? 드릴 말씀도 아니지만 불초들은 백초지적도 아닐 것입니다.”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어느 분이든 강적이실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호방하게 미소 지어 보인 후 앞장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적잖게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일각여 후.
“가파르군. 경사가 급한데?”
진영의 뒤로 빠져나온 친구들은 이윽고 팔달령의 장성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장성으로 오르는 방법은 둘이었다. 거용관이 있는 위치는 연산산맥에서 세로로 뻗어 내려온 짧은 기슭의 아래에 있었고, 장성은 동에서 서로 가로 쳐진 연산산맥의 능선 위에 있었는데, 기슭 능선을 따라 세운 산성 성벽 위의 군 이동로를 따라 올라가거나 그냥 산을 타고 오르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