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엉뚱한 사건 (4)
“괜찮습니다. 친구의 혼인도 중요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대감님께 인사 올리는 것이 더 중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특히 마님과 악 매는 자매이신데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 더 먼저 올 생각을 했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오히려 사죄 올려야 할 것 같군요.”
“떨어져 지내더라도 가족은 소중한 것일세. 우리가 동서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하세.”
장신은 추룡의 손을 잡았다.
처음 만날 때부터 추룡을 귀히 생각했던 그.
비로소 악벽강의 표정도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심하긴 했지만 장신이 전소의 혼인에 대해 아는 것도 아니었고, 추룡을 중히 여기는 마음에 자신 역시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 언니를 만나고 가는 것이 중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때였다.
비로소 화기애애함이 돌아오는가 싶은 터에 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느닷없이 바깥에서 기침 소리와 함께 내관인 듯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알림 말을 해 온 것이었다.
“대감마님, 밖에 휘주에서 왔다는 젊은이 두 사람이 막 공자님을 찾고 있는 듯합니다. 이리로 오지 않았느냐 묻고 있사온데 어찌하올까요?”
“휘주?”
당연히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반 각 후.
“막 형!”
“맙소사! 자네들 여기에 웬일인가?”
이야기를 듣고 허둥지둥 문전으로 달려 나간 추룡의 눈이 보름달만 해졌다.
나가 보니 어두운 문전에 전소와 임백호가 히죽거리며 서 있었던 것이다.
추룡을 쫓아 밤낮없이 달려온 막강 의리의 친구들.
눈이 휘둥그레진 그를 보며 전소가 싱글벙글 웃었다.
“역시 여기로 온 게 맞군! 친구 따라 북평 온 걸세. 자네가 떠나고 나니 심심하기도 하고, 내친김에 북평 구경이나 해 볼까 싶어 뒤쫓아 온 걸세.”
“터무니없는……!”
추룡은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엉뚱한 친구들이 자신을 걱정해 수만 리나 되는 길을 쫓아온 것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지금 제정신인가! 삼월이 혼인인데 날짜까지 받아 놓고 어쩌려고?”
그러나 뭐, 별거냐는 듯 전소는 계속 밝게 웃었다.
“미뤘네. 꼭 자네가 참석한 자리에서 올리고 싶어서. 완 매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
만날 때부터 그랬지만 실로 끔찍한 의리인 것이었다. 세상을 다 뒤져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도무지 이 무슨……!”
완전히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힐 정도였는데, 근래 들어 부쩍 싱글거리는 임백호가 더 웃기는 소리를 했다.
“특별한 일 없으면 잔말 말고 가세. 우리뿐 아니라 모두 왔어. 두 달 휴가를 신청했더니 미쳤냐 해서 전부 사직서를 냈어.”
전부 사직서.
또한 입이 딱 벌어질 노릇이었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노릇이 어디 있는가.
“정말 무슨 이런 일이……!”
추룡은 말문이 막혀 두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우정은 깊었다.
“카카……! 신경 쓸 것 없어! 입장이 바뀌었으면 막 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니까. 우리에게 위험하다 싶은 일이 있었으면 막 형도 만사 제치고 뒤쫓아 왔을 거잖아.”
일각여 후, 추룡이 두 사람을 따라 너덧 마장이 떨어진 왕부정 거리의 객잔으로 가 보자 객실에는 정말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한결같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장청, 곽영, 문대위, 송민은 물론 허원소, 정백하, 조태형에, 천만뜻밖에도 한자방과 신학철까지 함께 와 있다!
또한 상상을 넘어선 일인 것이다.
“말도 안 돼! 설마 자네들까지 사직서를 썼단 말인가?”
그러나 한자방, 신학철도 뭐 별거냐는 듯 웃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솔직히 막 형에게 유감인데 또 일이 생기면 분명히 함께 움직이겠다고 약속했잖은가? 그래 놓고도 혼자 도망치다니? 사직서는 괜찮을 것이라 보네. 휴가 신청이 안 된다고 해서 일단 던져 놓고 왔는데, 아무렴 보주님의 집안일에 소저까지 오셨다 들었는데 자르기야 하겠어? 완전히 똥배짱으로 온 걸세.”
“카카……! 잘리면 또 어때? 같이 목장이라도 하면 되지! 막 형이 대리사로 갈 것이라니 죽어라 수련해서 같이 시험을 봐도 되고.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칠우검 도관이라도 차리는 거야. 전혀 걱정이 없다니까?”
“햐……!”
역시 기가 막힐 노릇인 것이었다. 그러나 황당해하는 것은 추룡 하나일 뿐이고, 친구들은 싱글거리며 내막을 물었다.
“자, 그럼 솔직히 말해 봐! 가만 보면 막 형은 은근히 비밀이 많아. 북평에 온 이유가 뭐야? 보주님의 집안일이라 해서 장 시위님에게 나쁜 일이 생겨 온 게 아닌가 했더니 그런 것도 아니고. 수소문해 보니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던데 왜 온 건가? 보주님의 집안일에 막 형이 왔다는 것도 사실 이해가 안 돼.”
“그러니까 그게……!”
추룡은 모든 것을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달려와 준 친구들이 고맙기도 했지만, 남평으로 가기로 한 게 삼월이니 돌아가면 이제 작별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말일세, 감추려고 해서 감춘 게 아니라 이르다 싶어 자네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일이 하나 있네.”
쑥스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붉어지는 얼굴로 금릉에 가게 되었을 때부터의 이야기를 했다.
“크악!”
“뭐?”
당연히 말이 나오자마자 난리가 났다.
경악에 엄살까지 섞어 친구들은 거품을 물고 추룡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잠깐만! 다시, 다시 좀 말해 보게! 그러니까 막 형이 소저와 정혼을 했다 이건가! 금릉에 다녀온 후?”
추룡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됐어. 그때도 사실 대감님을 뵈러 갔던 것일세. 보주님께서 워낙 소저의 혼인을 재촉하셔서 가짜 애인으로 가게 되었던 것인데…… 한데 가면서 정이 들어 버렸어. 원래도 좋은 분이라 생각했지만 함께 움직이다 보니 점점 더 좋은 점이 보이더군.”
“이것…… 봐라?”
“이거 분명히 사건 맞지?”
“초대형 같은데?”
“복잡하니 정리 좀 해 보자. 그러니까 지난가을, 몽마 사건이 벌어진 후 소저께서 갑자기 막 형을 찾으며 허둥지둥하신 적이 있어. 직후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한 달 후에 나타나서 금릉에 다녀왔다고 했지. 그게 애인인 척 다녀온 길이었단 거야. 오가며 정이 들었고, 춘추대회 후에 정식으로 정혼했다는 거지. 표시 내지 않은 건 우리들과 서먹해질까 봐였고. 아버님의 권유에 따라 전 형의 혼례식을 본 후 남평으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얼굴이라도 볼까 하는 장 시위님이 꾀에 속아 오게 되었다, 이거 맞나?”
“맞는 것 같은데?”
임백호가 쩔쩔매며 웃고 있는 추룡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더니 나머지 비리까지 폭로했다.
“가게 되었다니 빠진 것도 말해 줌세. 난 몇 가지 사실을 더 알고 있는데, 아버님이 대한장군이셨다는 이야기는 대략 했었고, 더 정확하게 사부님께서는 저 유명하신 천하제일검 막여사 장군님의 아들일세. 더 대단한 것은 우리가 그 천하제일검법을 배웠다는 거지. 소금검법이 바로 그거였어.”
“뭐?”
“막 형의 아버님께서 막여사 장군님?”
또한 대형 사건이었다.
“사실인가, 막 형? 정말 아버님께서 막여사 장군님이셔?”
숨길 일이 아니었다. 머잖아 헤어져야 할 친구들인 만큼 역시 떠나기 전에 모든 것을 밝히고 가는 게 옳은 것이다.
“맞네. 숨기려 해서 숨긴 것은 아니었어. 해 봐야 자랑처럼 되는 일이라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네.”
“우리가 배운 게 천하제일검…… 장군님의 것이 맞고?”
“정수일세.”
“으아-!”
순간 객잔이 벌컥 뒤집어졌다.
“하하하……! 미치겠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 설마 막 형이 막 장군님의 아들이었다니? 우리가 배운 게 천하제일검이라니!”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완전히 걸어 다니는 비급이었잖아?”
“헹가래 쳐!”
“축하해! 막 형!”
“고마워, 자네들.”
천장에 부딪칠 정도로 던져지는 등 그대로 대소동이 일어났다. 이래도 저래도 좋은 친구들.
“하하하……! 비로소 모든 것을 알 것 같아! 어째서 막 형의 실력이 그렇게 막강했던지! 느닷없이 왜 특과가 생겼던지! 막 장군님의 이야기는 모르는 이가 없지만, 하야하신 후 남평으로 가셨던 거야! 뒤이어 무예를 완성한 막 형이 출도했던 거고! 앞뒤가 모두 맞아!”
전소가 임백호를 향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임 형이로군. 솔직히 임 형도 우리에게 숨기는 게 있지? 집안 이야기만 나오면 말을 피하곤 했는데, 이참에 임 형도 털어놔 보지? 좋은 기회잖아?”
“어, 난 별로 그런 게……!”
이에 임백호는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보였는데, 늦기 전에 그의 비밀은 추룡이 누설했다.
“없지 않지. 알고 보면 임 형의 신분이야말로 진짜 대단해. 홍묘의 소토사일세. 아버님과 의견 충돌로 잠시 집을 나왔던 것인데, 얼마 전에 화해했네.”
“묘족? 임 형이 소토사라고?”
모두의 눈이 또 한 번 커다랗게 치켜뜨였다.
워낙 유명한 일족인 만큼 역시 다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건 숨기고 있는 게 있다면 이야기 나왔을 때 밝히는 게 좋다.
어색한 표정으로 결국 임백호도 털어놓았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닐세. 그냥 자네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해. 아버지께서 마음에 없는 혼인을 하라 하셔서 도망쳐 나왔다가 자네들을 만난 걸세.”
“그러니까 임 형은 또 가출 청년이었던 거야?”
“속이고자 한 것은 아니었네. 밝히기가 참 뭣해서. 원래 우리가 좀 거칠지 않은가. 이해해 주면 고맙겠네.”
“이해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임 형이 거친 것도 아닌데.”
“보다 묘의 사람들은 재주가 아주 비상하다 들었는데 소토사쯤 되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마술 좀 보여 주게!”
“카카카……!”
머잖아 추룡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이별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달려온 게 북평인데 사실 남평인들 멀겠는가.
기승 도연 (1)
아침.
“이야! 크다!”
“정주왕부보다 크지?”
“훨씬 커. 원의 대도였다고 하더니.”
“자네들은 정주왕부에 가 보았나?”
“집이 부양이니까. 안휘의 꼭대기지. 정주에서 멀지 않아.”
“난 태화. 부양보다 더 가깝네.”
친구들은 골이 좀 흔들린다 싶은 느낌으로 왕부정 거리의 중심, 북평왕부의 앞에 섰다.
골이 흔들리는 이유는 지난밤 술이 좀 과했기 때문인데, 추룡이 왕부로 온다 하여 또 같이 오게 된 것이었다.
도착해 보니 북평왕부의 규모는 아주 컸다. 국경의 북쪽이라 하여 거친 산들이 연상되었던 북평은 의외로 끝도 없이 넓은 평지였고, 북평왕부는 도시의 중심에 있었는데 십 리 둘레에 달하는 성벽에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고루거각하며, 멀리서 보기에도 위풍이 당당하다.
다만 가까이 가자 이상한 일이 생겼다.
꽥꽥꽥! 위풍당당과 어울리지 않게 왕부 전체에서 시끄럽다 할 만큼 괴상스러운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술이 덜 깼나? 귀에 헛소리 같은 게 들리는데?”
“오리 소리 같아. 떼로 우는 소리야.”
전소가 말문을 열었다.
“왕부의 지하에 화포 공장이 있다더군. 비밀리에 화포를 제작하고 있고 소리를 감추기 위해 많은 거위를 키우고 있다는 소문이야. 역모설이 나오고 있는 까닭 중의 하날세.”
“이건 진짜 오해를 살 만한데? 연왕께서 거위를 좋아하나?”
한결같이 의아해했고, 추룡 역시 의아했다.
실제로 왕부 속에서 나는 거위 소리는 한 마장이 떨어진 곳에서도 시끄럽게 들릴 정도였다.
“함께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 되면 한 시진 후 저 주루에서 만나세.”
“아, 그래.”
의아했지만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추룡은 곧 왕부의 거문 앞으로 다가가 위병에게 포권을 취했다.
“수고 많으시군요. 안휘에서 온 막이라고 합니다. 총사님을 뵙고 싶은데 전해 주실 수 있는지요?”
그러자 또 의외의 일이 생겼다.
위병이 멈칫하는 기색을 떠올리더니 바로 아는 내색을 한 것이었다.
“막……? 혹시 존함 끝 자가 룡 자이신가요?”
또한 뭔가 언질을 받은 듯한 눈치.
괴이한 일이 반복되므로 추룡은 놀라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등청해 계신지요?”
“왕부 안에 거처하고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위병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일각 후.
“오랜만일세!”
또 기막힐 일이 발생했다. 왕부 속에서 성큼성큼, 눈에 익은 회색 승의를 입은 깡마른 노승 하나가 극히 범상치 않다 싶은 기도의 인물 둘을 대동하고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승僧, 도道, 속俗.
승려는 도연, 틀림없는 그였다. 북평왕부의 총사인 인물. 그가 직접 추룡을 마중 나온 것이었다. 만나기를 원해 꾀까지 내었다 하지만 역시 있기 드문 일이라 봐야 했다.
변함없이 쏘는 듯한 눈빛에 깐깐한 모습이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지만 범상치 않다 했듯 따라 나온 두 인물 역시 기도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도인은 겨울임에도 검게 그을린 얼굴에 세모꼴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오십 대의 인물로서 도연과 똑같이 마른 모습에 비수 같은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는데, 가만히 있음에도 전신에서 무형 중의 잠력이 물씬거리고 있어 누가 봐도 막강한 술수를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고, 일속, 옆의 남자는 더 질린다 싶을 정도의 덩치와 웅자를 지니고 있었다.
도인과 비슷한 오십 세가량의 인물로서 육 척 반에 달하는 키에 쫙 벌어진 어깨, 몸통까지 아름드리나무 같아 완전히 철탑을 방불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리눈에 화등 같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모습이 마음 약한 사람들은 멀리서 봐도 그냥 피해서 물러설 정도.
추룡조차 멈칫하는 심정이 되어 서둘러 포권을 취하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모처럼 존안을 뵙습니다. 평안하셨는지요.”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했듯 도연은 변함없이 거두절미하고 딱딱 부러지게 말했다.
“응! 다시 만나 반갑군. 자네도 잘 지냈는가?”
“용무가 있어 북평에 온 길에 문안차 들렀습니다.”
금릉에서 잠깐 보았다고 하나 초면이나 같은 사이, 인사할 말조차 궁색했다.
“잘 왔네!”
그러나 도연은 흡사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휙, 시선을 친구들에게로 돌렸다.
“일행인가?”
“그렇습니다.”
쏘는 듯한 도연의 시선이 차례로 친구들을 스치더니 멈칫, 전소에게서 멈춰졌다.
“비둘기가 있군! 이름이 뭔가?”
비둘기.
친구들은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전소라고 합니다.”
“자넨?”
“임백호라 합니다.”
친구들은 굳은 채 묻는 대로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북평왕부의 총사.
말이 쉬울 뿐이지 사실 눈길조차 감히 함부로 마주칠 정도의 인물이 아닌 것이었다. 연왕 주체의 오른팔이자 북평군의 군사軍師로서 휘하에 수만의 병군을 거느렸을뿐더러, 오며 악벽강이 이야기한, 좌천되어 밀려온 주체를 보좌하여 인재들을 모으고, 몽고의 승상 내아불화가 이끄는 대군을 물리치는 등, 장성의 경계를 강화시킨 실질적인 장본인이 바로 이 깡다구 센 노승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