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엉뚱한 사건 (3)
하지만 이조차도 약과다.
추룡은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 의리의 친구는 아예 혼인까지 미루고 달려오고 있었다.
대체 이 무슨 변괴인지.
“그래도 확실한 것을 모르니까……! 어두워진 후 조용히 가서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어이없다 싶은 일에 힘이 쭉 빠졌지만 그래도 좋게 이야기했다. 아직은 진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이 내리고 밤이 되어 장신의 저택을 찾은 추룡에게 더욱 기도 안 찰 일이 발생했다.
“막 공자님이라 하셨습니까? 혹시 남평의……?”
현역 고관의 장원답게 장신의 저택은 매우 크고 화려했다. 문 앞에는 경비를 서는 위사까지 서 있었는데 추룡이 다가가 장신이 있는가를 묻자 남평까지 들먹이며 반가운 기색을 떠올렸던 것이다.
역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노릇이라 추룡은 그저 눈만 끔벅거릴 수밖에 없다.
“그렇습니다. 용무가 생겨 북평에 온 길에 잠시 들른 것인데 전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전해 드리고말고요! 아니해도 내왕하시면 정중히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대로 기가 막힐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휘주가 아닌 남평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장신도 뭔가를 숨기려는 듯한 꿍꿍이가 엿보였지만 어쨌든 그는 무사하고, 추룡이 오리라는 것을 예상까지 했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기어코 악벽강의 눈썹이 곤두서고 있었다.
추룡은 어이없다 싶었을 뿐이지만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아!”
“헛헛헛……! 역시 와 줬군!”
“대체 뭔가요, 형부! 무슨 짓이죠!”
오래잖아 적잖은 소동이 났다.
역시 어이없다 할 일로서 위사가 들어간 지 반 각도 되지 않아 장원 안에서는 악서희와 장신이 버선발로 뛰어나오다시피 웃으며 마중 나와 두 사람을 반겼는데, 모습을 보니 역시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고, 꼴을 본 악벽강이 바로 장신에게 쏘아붙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그러나 뭐, 넉살이 좋은 편인지 장신은 눈 하나 깜박 않고 웃으며 두 사람을 끌어들였고, 내채로 들어가서도 딴소리만 하고 있었다.
“헛헛……! 자네, 먼저 축하하네! 장인어른께 연락을 받았어. 금릉에서 봤을 때 뭔가 좀 이상하다 생각은 했네만 역시 그랬던가 보군! 정혼을 하였다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금릉 길에 서로의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되어서……!”
“정말 축하한다, 강아. 너무 잘된 일이야.”
악서희 역시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정혼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사실을 숨긴 악불비였지만 금릉 일로 인해 장신에게는 알린 눈치였다.
그러나 악벽강에게 이런 이야기들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지 않아요! 불상사가 생겨 투옥당하셨다는 기별에 수만 리 길을 달려왔는데 멀쩡하신 것 같으니 어찌 된 일이냐는 것이에요!”
엄청나게 화가 나 눈까지 번쩍이며 다그쳤다.
“헛헛……! 성격 참, 여전하시구먼. 꼭 내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하지만 장신은 거듭 싱글벙글, 넉살 좋게 웃어 보인 후 비로소 여기에 대해 설명했다.
“몇 가지 사유가 있었네. 그중 하나는 혼인 전에 처제와 막 제弟를 꼭 다시 보고 축하해 주고 싶었기 때문일세. 장인어른의 기별에 의하면 남평으로 가서 가례를 올릴 것이라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식을 볼 수 없을 게 아닌가? 늘 일에 묶여 있어 휘주라 해도 가지 못할 판국인데 남평이 가깝기나 해야 말이지. 식은커녕 십 년이 지나도 볼 수 없겠다 싶어 꾀를 좀 낸 걸세. 그냥 보자 하면 여기까지 와 줄 리 없을 것 같고 해서.”
동기同氣의 정.
마음은 알 것 같지만 역시 완전히 황당하다 싶은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팍-!
악벽강의 손이 결국 탁자 위로 떨어졌다.
“정말 어이가 다 없는데, 흉한 기별을 받고 수만 리를 달려오는 사람들의 심정은 생각해 보셨던가요! 보다 우리에게도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해 보셨고?”
분명히 지나친 일일 수 있었다.
장신 역시 다소 계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헛헛……! 물론 바쁘신 줄은 아네. 늘 보의 일을 돌보고 계시니. 그러나 봄에 남평으로 가신다니 그만두실 때가 되지 않았나? 누가 맡아도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할 일이니 이 기회에 시작게 하고, 겸사하여 서운해하는 언니도 만나게 하려고 해 본 임기응변일세. 장인어른께는 새 서찰을 보냈으니 보름 전에 도착했을 것이고. 그러니 화를 풀게.”
하지만 악벽강이 쉽게 화가 풀릴 리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분명히 장신의 말에는 좋은 의도가 보였다. 아내를 헤아리는 배려가 보였고, 동서 아우가 될 추룡을 만나 축하해 주고 싶었다는 정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꾀를 내었다는 것으로 좋게 보려면 한없이 좋다.
그러나 한 가지 실수가 있었는데, 이것은 두 사람에게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였다. 추룡이 왜 봄까지 악충보에 있게 된 것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
“정말 어이가 없어서……!”
따라서 악벽강은 더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추룡에게 미안하여 얼굴도 들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추룡은 대범하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러셨군요. 사정이 되지 않았을 뿐 저 역시 떠나기 전에 대감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금릉에서 뵈었을 때 아껴 주셨고, 인연이 되어 혼인까지 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식에 참석지 못하실 것이라니 더욱 오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기왕 엎질러진 물인데 왈가왈부해 무얼 하겠는가.
이런 추룡의 모습에 장신은 예나 지금이나 흡족하여 미소 지었다.
“역시 대장부로군! 처제에게는 단단히 구박받으리라 예상했네만 자네는 이해해 주리라 믿었네. 사실 우린 동서지간이 될 것인데, 그렇게 잠깐 보고 멀어지는 인연이어서야 되겠나. 가족 간에 의리가 있어야지.”
친구의 혼례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대로 동기간의 우애도 돌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쪽이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괜찮다는 뜻으로 화가 난 악벽강의 손을 보이지 않게 꾹 잡아 준 후 대화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대감님께 나쁜 일이 없어 다행입니다. 북평도사사로 승격하셨다니 축하드리고요.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요?”
장신은 고소 지으며 사유를 설명했다.
“나도 뜻밖의 일이었네. 원래 지난번 금릉에 갔던 것은 중앙의 부름에 의해서였네. 오 년 전에 북평으로 내려와 왕부의 일을 돌봤는데 잊힌 줄 알았던 사람을 호출했더군. 가 보니 부른 것은 병부상서 제태齊泰 대감이셨네. 외지에서 일한 것을 치하하면서 이젠 자신을 도와 달라고 하더군.”
병부상서 제태.
“여러 가지 뜻이 보이는데, 나에게는 우선 회유책일세. 왕부의 사기를 꺾어 보자 하는 저의도 보이고. 북평왕부가 아무리 강성하다 해도 천하가 조정의 것인데 따르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 하는 것이지.”
말로만 듣던 관료들의 권력 싸움.
“난처하시겠군요.”
“사실 좀 그렇네. 관료가 중앙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으니까. 본가本家가 정주에 있는데 어머니께서 볼모처럼 되어 계시기도 하네. 어쩔 수 없이 수락했네만 마음이 편치는 않아. 당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이건 완전히 멱살을 잡고 흔드는 꼴이거든.”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이없을 수밖에 없다.
“검문이 심하더군요. 북평으로 온다 하니 체포하여 심문할 기색을 보이던데, 솔직히 좀 궁금하기도 합니다. 거병설을 꺼내던데 정말 그런 뭔가가 있는 것인지요?”
피식, 장신은 거듭 고소 지었다.
“헛소문일세. 삼척동자가 생각해 봐도 알 일이지만 역모라는 게 무언가? 나라를 엎고 군왕을 폐하고 권좌를 찬탈하려 하는 것 아닌가? 황상과 연왕 전하는 부자지간일세. 그것도 가장 총애받고 생각하는 부자지간. 이런 아버지를 치겠다고 역모를 꾸미는 수도 있나?”
분명히 상식 밖의 일이었다.
“더 정확히 연왕 전하를 북평으로 내몬 것은 대신들이었네. 보내며 황상께서는 어떻게든 강군을 키워 자리를 잡으라 하셨고. 연왕 전하께서는 분부에 따를 뿐인데 이를 가지고 역모를 꾸민다 하면 어쩔 것인가.”
역시 모함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주체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대신들이고, 홍무제가 이를 막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니까.
“물론 이쪽 사람들도 과격한 면은 있네. 워낙 몰리다 보니 이를 갈고 있거든. 여차하면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고. 그래도 역모와는 관계가 없네. 부국강병을 이루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는데 자꾸만 건드려 대니 화를 내고 있는 것일세. 솔직히 나도 그렇고.”
난감하겠다 싶었다. 이야기한 대로라면 북평왕부의 상황은 완전히 허공에 떠 있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앉은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하는데 화가 눈에 보이는 판국이니.
심호흡과 함께 장신은 마무리 지었다.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하나뿐일세. 윤문 전하께서 불러 주셔서 함께 백년대계를 도모하는 것. 아무렴 혈연이니 그리하실 것이지만, 기다리며 많은 준비도 하고 있네. 중원의 힘을 하늘 끝까지 끌어올릴 준비! 이루어지면 국경은 튼튼해질 거고 나라는 안정될 것이며, 백성들의 주머니에는 황금이 넘칠 것일세. 도연 총사님은 사상四象의 시대를 예견하셨네.”
금릉에서 본 깡다구 센 노승! 너무 광범위해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사상이란 춘하추동, 동서남북, 일월성신, 수화토금 등 삼라만상의 모든 형상과 조화를 함축해 일컫는 것으로, 잠깐이지만 금릉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 적이 있었다. 네 마리의 동물을 일컬으며 이루어지면 중원은 평화와 황금이 넘치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추룡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모쪼록 순조롭게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심하게 힘겨루기를 하는 듯하지만 사실 윤문 전하와 연왕께서 숙부와 조카 사이신데 특별한 일이야 싶을까 싶군요.”
장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허언이 아니라 전하께서 중앙으로 가게 되면 세상은 정말 크게 좋아지게 되어 있네. 내가 북평왕부의 사람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세우고 있는 계획이 실로 수월한 게 아니니까. 필요한 인재들을 모아 언제든 적재적소에 투입시킬 채비가 끝나 있을 정도일세. 여건만 이뤄지면 되는 거지.”
깊숙한 시선으로 추룡을 보며 뜻밖이라 할 말을 꺼냈다.
“자네를 보고자 꾀를 낸 것도 실은 그 일과 무관하지 않아. 처제와 정혼을 했다니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선했지만 보다 도연 총사님께서 자네를 크게 좋게 보신 것 같았네. 해서 전하께 간하신 것 같은데, 그로 인해 전하께서 자네를 좀 만났으면 하는 것 같더군. 한즉 한번 알현해 보는 게 어떻겠나?”
“연왕 전하께서 저를?”
추룡은 순간 적잖게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장신은 계속 깊숙한 눈으로 추룡을 보며 같은 이야기를 했다.
“분명히 그래.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도연 총사님께서는 금릉에서 만났을 때 이미 자네가 처제와 혼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셨네. 함께 일하게 되리라 내다보신 것도 같고. 해서 처제의 이름 등 여러 가지 배려를 해 주시기도 했는데, 실은 이번에 꾀를 내신 것도 도연 총사님이실세. 투옥되었다 하면 올 것이니 그렇게 해 보라고. 기별을 보내면서도 긴가민가했는데 놀랍게도 그 또한 적중한 셈이지. 실로 신통력이 대단한 분이신 것일세.”
도연.
아닌 게 아니라 저 깡다구 센 기승의 신통력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았다.
기실 그는 금릉에서 추룡과 악벽강을 보자 곧 인연이라 했고, 이름 끝 자를 강江 자로 고치면 맺어질 것이라 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뭔지 이름 끝 자를 고침과 함께 정말 두 사람은 정혼했다. 뿐만 아니라 딱 짚어서 추룡이 올 것이라 했다 하니 이쯤 되면 정말 천문 지리를 내다본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함께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다소 놀란 표정이 되었으나 추룡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뵙는 순간 대단한 분이라 느꼈습니다. 눈빛이 가슴속까지 뚫고 들어오는 것 같더군요. 이런 분을 모시는 것은 분명 행운일 것입니다. 대감님까지 계시니. 하지만 받들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약속했습니다.”
이번에는 장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친과 약속?”
추룡은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말씀 올렸지만 제가 남평을 나선 것은 무관 시험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중도에 사고가 생겨 악충보에 머물게 된 것이고요. 아버지께서는 떠나기 전부터 세상이 어지러우니 출사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제 고집으로 나온 것이지요. 한데 우려가 되셨던지 휘주까지 찾아오셨더군요. 덕분에 악 매와 정혼할 수 있었지만, 다시 말씀하시더군요. 조정에 큰 변동이 일어나고 있으니 휘말리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셨습니다.”
“그러기로 했던 것인가?”
추룡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삼월에 친구가 혼인을 하여 보고 나면 곧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심려하시는 마음도 그러시고, 찾아오시기까지 했는데 분부를 저버릴 수는 없지요. 실은 저 역시 이런 시국에 출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흠……!”
금릉에서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장신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해했다. 무엇보다 추룡의 부친이 막여사인 점이 감안되었는데, 실제 막여사가 관직을 버리고 떠난 까닭도 정쟁으로 인해서였다.
재직할 당시 엄청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고 혐오를 느껴 떠났는데 또 같은 일이 반복될지도 모르는 시기에 아들이 휘말리는 것을 원할 리가 있겠는가.
본인의 심정 역시 이해했다. 만날 때부터 같이 일했으면 하는 이야기를 했지만 남일 때의 생각이고, 좋지도 않은 시기에 동기가 될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앞날이 어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호인인 모습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 입장을 바꾸면 나라도 이런 시기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하게나. 하지만 기왕 왔으니 총사님께 인사라도 하고 가는 게 어떻겠나? 그냥 갔다는 것을 알면 서운해하실 것이니. 허언이 아니라 정말 기략이 크고 좋으신 분일세.”
추룡 역시 여기에 대해서는 마다하지 않았다. 도연이 꾀를 낸 것은 자신을 귀히 여겨 한 듯한 느낌이었는데, 인사조차 않고 가기는 그런 것이었다. 장신을 위해서라도 얼굴을 비치고 가는 것이 도리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선선히 포권을 취해 보였고, 장신은 다시 계면쩍은 듯 미소 지었다.
“보다 자네에게 미안하군. 삼월이 친구의 혼인이었다니. 몰랐던 일이니 이해해 주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