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추적 (4)
그렇다고 여기에서 추적을 중지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추룡은 나뭇가지들을 찾아 나눠진 흔적 사이에 말뚝처럼 꽂고 눈을 치운 다음 대기待機라고 쓴 후, 눈이 와도 덮이지 않게 대충 가림 막을 만들었다.
돌아오기까지 기다려 달라는 뜻! 그런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 할 정도로 최대한의 공력을 끌어 올려 바닥을 차고 좌측 산 계곡, 여자들이 끌려간 것으로 보이는 방향으로 쏘아 가기 시작했다.
귓전에 쐐액,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빛살같이 쏘아지는 몸!
상상을 넘어서는 속도였지만 이 상태에서는 이런 신법도 믿을 수 없었다.
빨리 추적해 왔다고 해도 상대가 앞서 간 거리는 여기서도 이틀을 앞섰다. 멀지 않은 곳에 소굴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닐 경우라면 어디까지 추적해 가게 될지도 몰랐다. 당연히 내공을 사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비호처럼 눈밭 위를 쏘아 가며 추룡은 자신 역시 위험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 시진.
‘이런!’
휘이이이이! 세찬 강풍과 함께 결국 우려하던 일이 시작되었다. 흐려 있던 하늘에서 결국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추룡은 더욱 가슴이 타 버리는 것처럼 변할 수밖에 없었다.
사력을 다해 공력을 일으켜 두 시진을 치달린 결과, 현재 그가 있는 곳은 북협에서도 이백 리가 떨어진, 거친 봉우리들이 겹겹이 둘러쳐진 연화봉의 좌측인 칠도七都 방향이었다.
그로서는 어딘지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어쨌건 눈이 오는 만큼 흔적은 이제 곧 지워진다.
그러나 아직도 적당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간 것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면서 드문드문, 적당들이 불을 피우고 쉬었다 간 흔적들도 발견했는데, 끝도 없이 계속 발자국들은 이어져 있는 것이다.
두 시진을 쏘아 왔을 정도면 여자들까지 대동한 걸음으로는 거의 이틀이 걸릴 거리가 되었는데……!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저 이를 악물고 쉬익, 더욱 발끝에 공력을 집중시켜 눈이 흔적을 다 지우기 전에 추적해 갈 수밖에는. 한계에 이른 듯 공력도 거의 고갈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고,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갔다. 안광만 야수처럼 번뜩이고 있을 뿐.
그러나 사력을 다해 달려온 보람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로부터 또 반 시진. 강풍과 함께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적당들이 지나간 흔적을 거의 지웠지만 쌓인 눈이 깊어 흐릿하게 남은 상태에 태평봉太平峰의 한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
퍽! 추룡의 눈에서 시퍼렇게 불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빨리빨리 걸어라! 다 왔으니 넘겨지고 나면 곧 편안해질 것이다!”
멀리 태평봉도 끝나 가는 언저리에 결국 적당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큰 흔적은 십왕봉을 향해 갔고, 이리로 온 게 그다지 많지 않은 수효인 것 같기는 했지만 보니 적당들의 수효가 생각보다 훨씬 더 적었던 것이다.
제멋대로의 차림을 한, 시커멓게 수염이 꺼칠꺼칠한 덩치급의 일당이 어깨에 죽궁을 메고 허리에 환도還刀 등을 두른 채 화촌의 처녀들인 듯한 여자들을 끌고 눈밭 속에서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게 보였는데, 수효는 스물다섯 정도뿐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납치된 여자들의 수효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서른두세 명가량.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른이 넘는 여자들을 끌고 온 자들이 고작 스물다섯 명이라니? 여러 패거리가 모여 노략질을 한다니 약탈한 것을 분배하기 마련이지만 스무 명에게 여자 서른이라면 이상한 것이었다. 가는 곳에 소굴이 있고 패거리가 더 있다는 말일까?
어쨌거나 의문은 둘째, 구출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여자들을 잡고 있는 만큼 그조차 경거망동할 일이 아니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놈들은 필시 여자들을 인질로 삼을 것이니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땀으로 젖은 몸이 얼어붙는 듯했지만 추룡은 거듭 눈을 번뜩이며 추적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먼발치에서 침착하게 계속 뒤쫓기 시작했다.
내리던 눈발은 더 심해져 점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변하고 있었다.
한데 그러기를 또 반 시진! 추룡의 눈앞에 다시 상상 밖이라 할 상황이 벌어졌다.
우선 첫째는 주위의 지형이었는데, 앞서도 일렀지만 적당들이 이동해 온 곳은 칠도 방향이었다. 태평봉의 끝자락. 추룡은 모르고 있었으나 황산의 서쪽 끝으로 지주와 휘주를 벗어난 안상성安床城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한데 묘한 것은 이자들이 소굴로 갈 것 같으면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 할 것인데, 점점 낮아지는 지형을 보아 산을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아니, 실제 멀지 않은 곳에 칠정현이 있었으니 분명히 산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무슨……!’
추룡은 호흡을 조절하며 계속 침착히 놈들의 뒤를 쫓았다.
한데 이각여, 추룡의 눈앞에 결국, 또 한 번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휘이이!
산을 벗어나려는 것같이 보였던 패거리는 오래잖아 눈보라만이 자욱한 태평봉 끝자락의 한 숲 앞에 도착해 멈췄는데, 도착하자 컴컴한 숲 속에서 또 다른 스무 명 정도의 사내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똑같이 장검과 환도 등을 두르고 있었지만 말끔한 차림새들하며, 필경 산적들은 아닌 모습이었다.
추룡은 멀리서 몸을 감추고 동태를 살폈고, 새로 나타난 자들이 납치된 처녀들을 훑어보며 적당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물건이 꽤 괜찮은 것 같구려. 애썼소.”
물건.
적당들은 흉흉하게 눈을 번뜩이며 괴소 지었다.
“흐흐……! 아니었다면 화촌 따위의 작은 곳을 덮쳤을 리 없지. 상당히 살피고 시작한 거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으니 당신들이 말하는 새 물건 정도가 된다.”
나타난 사내들도 기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숫처녀는 비싸게 팔리니까. 오백 냥이면 되겠소?”
흥정.
“장난치나!”
적당들은 흉흉하게 눈을 희번덕였다.
“천千! 수효가 서른둘인데 깎으려 하면 거래 끝내겠다! 동원된 사람들만 해도 이백 명이 넘는데 오백을 누구 코에 붙이라는 말인가?”
‘나쁜!’
추룡의 눈에 살벌한 빛이 떠올랐다. 놈들이 인신매매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리 여자들을 넘길 패거리를 물색한 다음 마을을 덮쳐 약탈을 한 후 끌고 와 넘기고자 하는 것! 보나 마나 새로 나타난 자들은 안상 일대에서 사창私娼을 하는 자들이거나 그 하수인들일 것이었다.
“팔백으로 끝냅시다. 우리도 노대老大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라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가지고 온 것도 그뿐이오. 대신 한 달 후에 술과 쌀가마니를 여기에 쌓아 두겠소. 다음 거래에서 더 보태기로 하고.”
가지고 온 것이 그것뿐이라니 적당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봐주기로 하지! 약속은 꼭 지켜야 할 것이다.”
사창 패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죽 부대 같은 것을 놈들에게 넘겼다.
“여부가 있겠소. 한데 다음 계획은 언제? 시일이 잡혔소?”
“기대해 봐라. 다음이 진짜니! 관사와 악불비 놈이 이를 갈 것이다만 굉촌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
굉촌!
“거긴 진짜 최고인데…… 가능하겠소?”
“이를 필요도 없다. 두령이 계획해서 실패한 건은 한 번도 없으니. 봐서 지주 쪽 한 곳을 더 불 질러 놓고 이목이 쏠리는 사이 쓸어 낼 계획이다. 악불비고 관군 놈들이고 막아 낼 여력도 없는 거지.”
“기다리겠소.”
흥정이 끝난 듯 여자들은 포박당한 아래 입까지 틀어 막힌 상태로 한 줄로 엮어져 나타난 패거리에게 끌려 숲 안쪽으로 사라졌고, 적당들은 몸을 돌려 다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가죽 부대에는 은자가 들어 있을 것이었고, 거래를 마친 만큼 큰 패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은자를 분배할 눈치인 것 같았다.
“팔백이면 괜찮은 거지?”
“그럭저럭. 일이 수월했으니 나쁘진 않지.”
은자가 들어 있는 가죽 부대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추룡은 서두르지 않았다.
쉬지 않고 눈이 오는 마당, 서둘러 처녀들을 끌고 간 패거리를 쫓아야 할 것이지만 앞서 쌓인 눈이 상당한 만큼 새로 생긴 흔적은 쉽게 파묻히거나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으니.
그로부터 반 각!
“악마보다 더한 놈들아!”
촤ㄱ촤ㄱ촤ㄱ……!
“크아아아악!”
결국 추룡의 검이 뽑혔다.
“웬 놈이냐!”
“물을 가치도 없다!”
쾅-!
“으아아악……!”
희희낙락하던 적당들이 산모퉁이 하나를 돌아 처녀들을 끌고 간 패거리와 떨어져 외침이 들리지 않을 때가 되었다 싶은 순간, 벼락같이 신형을 도약해 그들의 머리 위를 덮친 것이었다.
얼음같이 번쩍이는 눈!
그의 검이 결국 피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피를 보기 시작하자 그의 검은 그대로 저승사자의 최명부나 다름없었다. 덮친 추룡은 바로 놈들의 중간으로 파고들며 장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돌려 치고, 휘어 치고, 끊어 치고, 이게 정말 추룡일까 싶을 정도로 그의 검은 실로 무서웠다.
쉭쉭쉭!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피해 낼 여지도 없이 적당들은 목젖이 갈라지거나 두개골이 쪼개져 비명과 함께 덮인 눈을 피로 물들이며 허수아비처럼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불시의 기습이기도 해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삽시간에 대여섯이 거꾸러졌을 정도!
“고수다!”
그러나 놈들도 약탈을 하며 칼 한 자루로 먹고사는 녹림적들로 허수아비가 아닌 만큼, 곧 두르고 있던 환도 등을 뽑아 휘두르며 살귀殺鬼같이 추룡을 둘러싸고 칼부림을 해 오기 시작했다.
“하-!”
촤ㄱ촤ㄱ촤ㄱ촤ㄱ!
쾅-!
“아아아악……!”
하지만 어림없었다.
처음 서마시의 도적들을 상대할 때, 이후 몽마 정진이나 정명 등과 대결할 때, 친구들을 가르칠 때, 하다못해 춘추대회에서 싸울 때를 돌이켜 봐도 알 일이지만 일단 휘둘러지자 추룡의 검의 위력은 역시 상상을 넘어섰다.
현역 시절 군위제일검의 명성을 차지한 막여사의 검이 파훼식에 가까울 정도로 치명적인 허를 노리고 상대에게 파고드는 것이라 했고, 영웅전에서조차 유곡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일 합으로 제압했던 그의 검은 거의 무성검無聲劍이라 할 정도였다.
부딪치는 소리조차 없이 번쩍일 때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할 정도로 정확히 놈들의 목과 두개골, 더러는 허리까지 동강 내 버릴 만큼 섬뜩하게 피를 뿌려 내는 것이었다.
쾅-!
“으아아악……!”
권각도 함께 날았다. 쉭, 소리와 함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접근한 적당의 턱을 쪼개 버리는가 하면 바로 철퇴 같은 발끝이 휘돌아 뒤에서 덮치는 자의 늑골을 통째로 꺼트려 놓곤 했던 것! 처음부터 비교가 될 수 없는 상대였지만 모두 거꾸러지는 데 시간도 거의 소요되지 않았다.
불과 반 각! 삽시간에 스물다섯이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을 정도였고, 늘 웃음 짓던 어디에 면모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추룡은 얼음 같은 표정으로 쓰러진 놈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크흐……!”
대부분 숨이 끊어졌지만 권각에 당한 자들 다섯이 쓰러져 으스러진 곳을 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일부러 남긴 것일까.
“나쁜 놈들, 기다리고 있거라.”
퍼퍽!
“큭……!”
추룡은 즉시 강하게 손끝을 이지관수로 하여 살아 있는 자들의 목, 울대 쪽의 아혈과 쇄골 사이, 허리 등의 마혈을 쳐서 꼼짝 못하게 제압한 후 다시 ‘쉭!’ 처녀들이 끌려간 숲 쪽으로 급히 신형을 날렸다.
악벽강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사건이 커 총관인 악염이 나왔으므로 그녀는 악충보에 있었고, 혼자인 만큼 이래도 저래도 바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오기가 어려워서 그랬지, 그래도 곧 사창의 패거리를 추적해 냈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예상대로 앞서 쌓인 눈이 깊어 내리는 눈은 흔적을 다 지우지 못했고, 패거리는 지친 여자들을 끌고 이동하고 있어 쏘아 가기 시작한 지 일각여 만에 추룡은 다시 그들을 따라잡은 것이었다.
‘놈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잡혀 있는 여자들이었다. 구출해야 할 것이었는데, 여차하면 이들이 여자들을 인질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딘지조차 알 수 없는 근거지까지 계속 뒤쫓아 갈 수도 없고……! 초조한 마음으로 가장 우둔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일단 놈들이 경각심을 가지지 않게 입고 있던 호구를 벗고, 장검까지 풀어 놓은 후 쉭! 한 발 앞서 가고 있는 자들의 맞은편으로 쏘아 가 산보라도 나온 듯 한가하게 정면으로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엇……?”
당연히 처녀들을 포박해 가고 있던 패거리의 얼굴에 일제히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자정이 넘은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운 상태. 칠정현에서 가깝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슭도 아닌, 산등성이 넘은 깊은 숲에 알 수 없는 젊은 녀석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곧 안도의 표정이 되었다. 체격은 건장하지만 혼자인 것 같고 병기 역시 소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특별히 자신들을 노려 오거나 한 모습이 아니라 우연히 숲에서 마주친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산적들과 거래했던 볼까지 타고 올라간 시커먼 구레나룻을 한 사내가 즉시 흉흉하게 눈을 번들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웬 녀석이냐, 이 밤중에!”
추룡은 그들과 잡혀 있는 처녀들을 보며 최대한 당황스러워 보이게 대답했다.
“눈 구경을 하던 참이었소. 흥이 나서 걷다 길을 잃었소. 한데 이 밤중에 여러분들이야말로 누구시오? 여자들을 끌고 오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오? 여자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힐끗, 패거리는 서로의 얼굴을 돌아봤다. 아무리 눈 구경도 좋다지만 길을 잃을 정도라니?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싶은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들을 본 만큼, 구레나룻 사내가 즉시 패거리에게 소리쳤다.
“죽여 버려라!”
“놈!”
찰나 구레나룻 등 다섯을 제외한 나머지 십여 명의 패거리가 쉭쉭, 칼을 뽑아 들고 우르르 추룡에게로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