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부자유친父子有親 (2)
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 땀을 흘리다가 한참 만에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게…… 악 소저이온데……!”
“뭐……?”
깜짝, 막여사의 눈이 순간 찢어질 듯 치켜뜨여졌다.
추룡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무조건 무릎을 꿇고 부친의 앞에 엎드렸다.
“……!”
당연지사로 막여사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졌다. 분명히 이것은 예사의 일이 아닌 것이었다. 머릿속에 바로 악벽강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나기를 청하자 몸소 마중까지 나와 각보로 자신을 맞이했던 처녀. 과하다 싶었지만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었다. 추룡과의 관계를 모르는 이상 사실 그다지 신경 쓸 일도 아니었던 셈이다.
비로소 생각하니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았다. 추룡에 대해 물을 때도 대단히 어려워하는 모습으로 주의를 기울여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품이 있고 인상은 좋았던 것 같으나 평판이 우선 아주 좋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그런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평판을 중시했다. 혼사와 관련되는 일이라면 더욱 그러했는데, 자칫하면 우스갯거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몸가짐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난 며느리는 특히 치명적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치명적인 것이다. 집안의 망신일 뿐만 아니라 어딜 가서건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을 들기 힘들다.
더욱 문제는 나이 차였다. 스물여덟, 추룡이 스물하나. 그냥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는데 이런 소문이 도는 상태에 나이 차까지 그 정도가 되면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아무리 허명에 연연하지 않는 그라고 해도 깎이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지. 남들이 보기에는 퇴역해 보잘것없어지니 불리함을 무릅쓰고 혼인시킨 것처럼 보이기 쉬웠고, 심할 경우는 악가에 편승해 득을 취하기 위해 한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다시 이야기해도 세상의 아버지들에게 있어 아들은 자신이었다. 아들이 무릎을 꿇는 것은 자신이 꿇는 것이다. 이보다 더 속이 상하는 일은 없다.
삼강오륜의 부자유친父子有親이란 단순한 친함을 넘어선 의미인 것이다.
말하기 전에 많은 것을 헤아리는 성격, 막여사는 차근차근 다시 악벽강에 대해 되새겨 봤다. 안내되었던 곳이 거처였던 것 같은데 매우 수수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명 등을 만났을 때 이야기가 나왔듯 여자의 거처라 해도 실제 악벽강의 처소는 대단히 수수했다. 처소는 성격이었다.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주어진 일에만 몰두하는 처녀라는 뜻. 그렇다 보니 나도는 험담에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고……. 나이가 걸렸지만 여기에서 악벽강은 낙제점을 이겨 냈다.
아무것도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네가 좋다면 해야지. 내일 악 보주를 만나 보마.”
“아버지!”
순간 추룡은 기쁨에 앞서 눈물부터 왈칵 쏟아져 나왔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아들에 관대하다지만 이런 아버지는 사실 드물다.
“……모든 것을 떠나 악 매는 효녀입니다. 반드시 좋은 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지.”
남평의 나무꾼을 키워 낸 아버지는 남들에 비해 좀 더 아들을 헤아리는 성격 같았다.
오전.
“-!”
언제나처럼 새벽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집무실로 가 이런저런 업무를 살피던 악불비는 난생처음이라 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상상치도 못할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막 장군님이라 했느냐?”
“분명히 그렇습니다. 어제도 오셨던 터인데 소저를 뵙고 가셨습니다.”
쿵쿵, 악불비는 마구 가슴이 뛰었다. 동시대를 살아온 최강의 무인! 상상치도 못할 인물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온 것이 아니었다. 방문하며 그는 붉은 보자기에 싼 상자를 보냈는데, 풀어 보니 속에는 잘 삶은 돼지 족足이 들어 있었다.
중원의 오랜 풍습 중 하나로서 혼담을 원할 때 지니고 가는 것이었다. 안주 삼아 한잔하며 화목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의미였다.
경악하였지만 침착히 지시했다.
“예의를 다해 내채로 모셔라! 벽강에게도 가서 오셨음을 이르고! 다른 사람에게는 일체 함구해라!”
“받자옵니다.”
상자를 들고 직접 주방으로 가서 주안을 마련할 것을 일렀다.
“장군을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악 보주님.”
평소 잘 웃던 추룡의 표정이 매우 진중했다.
말끔하게 남삼을 입고 막여사와 동행했으며 안내되어 내채의 거실로 들어서자 꾸벅 인사를 한 후 막여사의 뒤에 시립해 섰다.
악불비는 내채 입구에서부터 각보로 막여사를 맞이했으나 추룡을 살펴볼 여가조차 없었다.
워낙 막여사가 거물인 것이었다. 비슷한 나이, 동시대의 무인으로 살고 있었지만 명성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악충보가 아무리 이름이 높다 해도 악비가 아닌 한 위가 될 수 없었다.
금의위의 대한장군으로서 현역 시절이었다면 말 한마디로 악보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었고, 퇴임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도원결의桃園結義가 아니더라도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나든 군벌軍閥들의 의리는 친형제를 능가할 정도였다. 금의위에 밉보이면 태수의 목도 그냥 떨어져 나가는 시대로서 악충보 정도로 으스댈 수 있을 인물이 아닌 것이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
막여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높으신 영명 들었습니다만 연이 닿지 않아 이제야 존안을 뵙는군요. 느닷없이 불쑥 찾아뵙는 것이 큰 결례인 줄 모르지 않지만 뜻하지 못했던 일로 오게 되었으니 해량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가슴이 조이는 듯했지만 누르고, 악불비는 포권을 취해 보였다.
“별말씀을. 누추한 곳을 찾아 주셔서 얼마나 영광인지 모르겠습니다. 중원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이겠지만 더 오를 곳 없는 명성을 지닌 분을 뵙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천하제일.
막여사는 삼가여 고개를 저었다.
“허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요. 결례를 무릅쓰고 뵙고자 한 것은 아들 녀석 때문이올시다. 일천한 녀석이지만 때가 된 나이라 크게 걱정이 되더군요.”
족을 보내 의중을 밝힌바 중간 과정을 제외했다.
악불비는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딸 가진 부모가 사돈 어려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이치지만 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힘을 내어 말했다.
“미흡한 사람에게도 여식이 있사온데 혼기가 지나 너무 걱정이 됩니다. 못난 모습에 변변치 못한 녀석이지요.”
전통적인 중원의 혼담 예법의 바른 격식에 따른 대화였다.
막여사는 삼가 포권을 취해 보였다.
“함께 자녀를 키웠고, 마침내 때를 맞이한 부모의 마음이 다 같을 것이니 그러면 우리 더 긴히 자녀들의 일을 상의해 봄이 어떠할는지요? 터무니없다 여기지 않으신다면 필부, 양가가 좋은 연을 맺어 하나가 되면 얼마나 기쁠까 싶소이다만.”
악불비는 가슴이 떨렸다.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는 기쁜 일, 고마운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성사成事된 것이었다.
“헛헛……! 부족한 집안에 천금 같은 따님을 주시겠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소이다. 고맙소이다.”
“아, 저야말로……!”
사유야 어찌 되었건 성사되었으니 무조건 경사고 기쁜 일이었다. 막여사는 웃었고, 계면쩍었지만 악불비도 웃었다.
사실 이 자리에서 그만큼 뒤숭숭한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언제나 골치 아픈 딸을 치우고자 한 그였지만 솔직히 이런 혼사를 원한 적은 없었다.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 터에 나이가 훌쩍 넘치도록 남자 같은 모습을 하고 혼인하지 않겠다 빼고 있는 딸을 빨리 치워야 한다는 마음만 가득했을 뿐.
와중에 딸에게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마침내 여성스레 변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그렇다는 것은 마음을 정했다는 뜻이니 드디어 사위를 볼 일만 남았다 싶었기 때문이다.
한데 오래잖아 문제가 생겼다. 춘추대회를 계기로 알게 된 날벼락 같은 사실인데, 딸이 마음을 정했다는 사윗감이 분수에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출사 준비를 하느라 비슷하게 혼기가 늦어진 서른서넛쯤 되는 녀석이거나 아니라도 비슷한 나이의 청년이거니 했는데 웬 날벼락인지 이제 약관을 넘어선 녀석이 등장했음을 눈치챘던 것이다.
실력 역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장군가의 출신이라고 하더니 모습을 보이자마자 영웅전의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로서, 그렇다는 것은 장군가도 보통 장군가의 출신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런 집안에서 딸을 받아 주기나 할까 싶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백번도 더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고, 상대 집안에서 받아 줄 리도 없으니 이젠 딱 처녀 귀신이 되겠다 싶었다. 이래도 저래도 엄청난 상처가 될 일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만두라 해도 상처가 될 것이고, 상대 집안에서 거부당해도 상처가 될 것이니 그러고 나면 다시는 남자를 쳐다볼 성격도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말도 할 수 없고 내색은 않고 있었지만 이로 인해 춘추대회 이후 회연장에서부터 속이 다 타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천만뜻밖에도 고심하던 일이 풀렸다. 사돈 보기가 조금 미안하고 창피하긴 하지만 혼담을 청해 왔고 이럭저럭 성사가 되었으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악벽강만 한 딸을 보내면서 사실 그가 미안해할 만한 일은 없었다. 가문을 봐도 가세를 봐도 누구에게 밀리지 않았고, 딸 하나만 놓고 봐도 눈에 힘을 줄 정도가 되었는데 문제는 사윗감의 나이가 너무 과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얼렁뚱땅 넘어갔으니 되었다! 앞으로도 평생 걱정하고 살아야 할 듯하지만 팔자거니 생각할 수밖에 없고, 상상치도 못했던 집안에 장승같은 사윗감을 얻었으니 웃을 수밖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추룡도 비로소 안심이 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이때 소리 없이 문이 열리며 곱게 차려입은 악벽강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투성이였다. 정확히 그녀는 더 일찍 문밖에 도착해 있었지만 선뜻 안으로 들어올 수 없어 귀를 나발만 하게 하여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던 터였다.
어제 막여사를 만난 후부터 좌불안석 식음까지 전폐하고 있었고 지난밤에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추룡이 가슴에 와 닿던 날부터 분수에 넘치는 일에 고심했던 그녀였고, 처음으로 눈물을 안 그녀였다.
모친이 세상을 떠날 때 울긴 했지만 별개의 일이었다.
한데 일이 순조롭게 되어 허락을 받게 되었던 것이니……!
“아버님.”
잠시 후 들고 온 족에 정갈스럽게 차려진 주안상이 들어왔고 나란히 두 사람이 앉은 아래 추룡과 악벽강은 큰절을 올렸다.
어버이 은혜가 컸다.
평생토록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금슬 좋게 살아야 할 것이었다. 그것만이 보은하는 길이었다.
“아버님……!”
다행히 임백호 쪽도 일이 잘 풀려 가는 것 같았다.
사부님의 지시대로 임백호는 날이 밝자 곧 꽃을 한 아름 사 들고 굉촌으로 달려가 능설운을 만났는데,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도 임백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추룡이 쳐들어갔던 날 이후 좋은 사람이다 싶어 교제하고 있었던 터인데 묘의 후계자 자리까지 포기하고 자신을 택하여 줄 정도이니 이만한 남자라면 충분히 평생을 의지할 만하다.
곧 단장을 하고 황산성으로 와 임대백에게 인사를 한 것이었다.
임대백도 이만한 처녀라면 괜찮은 것 같다 여겨졌다. 딱 부러지게 말하자면 묘의 토사인 그가 능설운이 완전히 마음에 들 리야 있겠는가. 소수라 해도 수만이 넘는 부족에 인물이라면 더 뛰어난 처녀들도 많고 청묘의 딸과 혼담이 오갔을 정도로 지위 높은 집안들 역시 수두룩한 터인데.
“백호에게 이야기 들었다. 살자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나 이해심과 배려로 노력하며 좋은 집안을 이루도록 해라.”
그래도 덕담으로 능설운을 받아들였다.
성격과 개성은 달라도 그 역시 누구나와 똑같은, 세상의 아버지 중 하나였다. 하는 짓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노력하겠다는 아들을 내칠 아버지는 없는 것이었다.
내채에서 한창 좋은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인사를 마치고 별원의 뜰로 나온 악벽강의 눈에는 변함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가가. 정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을 설득하기 여간 힘들지 않으셨을 터인데……!”
이런 악벽강을 보며 추룡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고맙기는 제가 더 고마운데 악 매가 감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는 스스로보다 저를 더 생각해 주는 분이세요. 말씀 올리자 곧 허락해 주셨습니다.”
“허락하시기 쉬운 일이 아니셨을 터인데……!”
추룡은 거듭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은혜가 워낙 크셔서 언제나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인데 모쪼록 잘 모셔 주셨으면 싶습니다. 저 역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변함없이 믿음직하고 좋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지만 깎는 중도 있는 것 같았다.
참 신통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 그 신통력은 특별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노력한 모습이 보이고 있듯 그만치 그가 신뢰를 쌓아 왔다는 뜻이다.
설혹 버린 자식일지라도 모든 아버지들이 아들을 가슴에 품고 살듯 아들들 역시 아버지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 중요했다.
추색이 완연한 가을.
“대체 무슨 일이지? 보주님께 무슨 일이 있나?”
“모르겠네. 얼핏 듣자니 손님이 찾아오셨다는 것 같던데.”
“어떤 손님이기에 이러는 거지?”
“모르지. 문을 지키는 친구들이 일절 입을 열지 않더군.”
의아한 것은 별원 밖의 사람들뿐이었다.
막여사를 안으로 들인 후 악불비는 삼중 사중으로 담 밖에 수하들을 둘러 경계를 하게 하고 다른 일들은 일절 무시, 주위에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는데 영문을 모르는 수하들로서는 꼭 무슨 황제가 찾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