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습무사-63화 (63/150)

# 63

속 썩는 부친들 (8)

그제야 임백호는 다시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음! 자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힘이 나는군! 소신껏 해 보겠네!”

“그래그래! 분명히 될 테니까 자신감을 지니게! 무조건 된다 하는 자신감이 중요한 걸세!”

그러자 임백호는 더욱 용기가 나는 것 같았는데, 한데 문제는 바로 이때였다.

임대백과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던지 막여사가 밖으로 나오며 점잖게 말문을 열었다.

“자, 추룡아, 그럼 이만 집에 가야지? 짐 싸자꾸나.”

‘헉……!’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안 추룡. 그의 몸이 경기를 일으켰다.

부자유친父子有親 (1)

안절부절, 객잔 방 속에 엄청나게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막여사가 자리 잡은 숙소로, 려연원과 두어 마장가량 떨어진 황산성의 저변에 있는 작은 객잔이었다.

악충보의 지객관도 있었지만 미리 와서 객잔을 잡은 상태였고 시간이 늦어 가기도 무엇해 온 것이었다.

짐 싸라. 당연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것은 추룡이었다. 막여사가 온 것도 뜻밖이지만 설마 자신을 잡아가려고 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

조심조심 질문해 보았다.

“아버지…… 꼭 돌아가야 하나요? 소자 아직 할 일이 좀 남았는데……!”

막여사는 침대에 기대 서적 한 권을 뒤적이고 있었다.

“친구들 일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신세도 졌고 아직은 좀 더……!”

막여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면 되었지 않나 싶구나. 듣자니 전소라는 아이가 특출한 것 같던데 입문도 시켰고 무예까지 전해 자리가 잡힌 것 같았으니. 춘추대회에서 입상까지 했다 하면 무사로서의 기반은 다져진 셈이다. 이젠 스스로 노력하여 일어서게끔 해 줘야지.”

흠칫, 추룡은 자신도 모르게 놀라는 기색을 떠올렸다. 경황 중이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춘추대회까지라면 부친이 의외로 많은 것을 아는 것이었다.

“누구에게 들으셨던가요?”

“기다리다가 오늘 사이에야 악보의 소저에게 들었다. 춘추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하더구나.”

딸꾹!

추룡은 사레가 걸리는 것 같았다.

“악 소저를 만나신 것입니까?”

막여사는 늘 그렇듯이 서두르지 않고 한 호흡을 늦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찾게 된 것은 휘주 포청의 관인 때문이었다. 악 소저가 주선하였다 하니 악 소저를 만날 수밖에 더 있겠느냐.”

오그라드는 듯한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질문해 보았다.

“좋은 소저지요?”

막여사는 신경 쓰지 않고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품이 있어 보이더구나. 한데 와서 듣자니 웬 소문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인지. 많이 삼가야 할 것 같더라. 사납다에서부터 몸 갈무리까지 형편없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실로 치명적인 것이지. 여자의 몸으로 무예를 익히고 큰일을 돌보고 있으니 악당들이 허튼소리를 만들어 내었을 수도 있겠지만 감안해도 좋지 않은 것이다. 그만치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뜻이니 본인의 실수인 게지.”

철렁, 추룡은 크게 가슴이 내려앉았다. 낙제점인 셈이었다. 하지만 해명할 수도 없었다. 사실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에게 이런 소문이 난다는 것은 크게 좋지 않은 것으로 흉한 소문이 돌면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워낙 남자 같은 성격인 악벽강이라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그녀의 실수가 있었던 게 맞았다.

“다른 이야기는 나누지 않으셨던가요?”

“할 이야기가 있어야 말이지.”

막여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건 네가 악보에 입문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만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몽마도 네가 잡았다고 하더라만 그 일이나 오늘 경우만 봐도 그러하다. 천운이 따라 망정이지 너는 벌써 두 번이나 살신지화를 피한 것이다.”

살신지화.

“몽마의 일만 해도 나한들이 수양이 깊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악보까지 뒤집어졌을 것이다. 오늘 경우만 해도 크게 위험했다. 묘의 무사들은 하나하나가 약하지 않을뿐더러 적이라 여기면 죽을 때까지 추적한다. 그럴 때는 마주치지 말고 우선 피해야 하는 것인데 칼을 뽑았던 것이지. 대백이 온 것으로 봐서는 수효 역시 사오백이 될 것이다. 그들이 먼저 칼을 뽑았다 해도 일이 커지면 약자 우선 원칙으로 정당방위조차 성립이 안 되는 거다. 피할 여력이 있는데 싸운 것이니.”

약자 우선 원칙.

설령 상대가 실수했다 해도 피할 여력이 있거나 힘이 있는 쪽에서 과잉 방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이었다.

이겼다 하더라도 사상자가 나왔을 경우는 법 조항에 가서 추룡이 불리하다는 것. 피해자와 피의자가 바뀌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므로 결국 약육강식이 되어 버리는 셈이다. 이것이 사 무림이었다.

피할 수 있는데 사람을 죽인 협객俠客이란 법 조항에 있을 수 없고 칼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 해도 보호받기 어려운 것이 법인 것으로, 마시에서처럼 갇혀서 공격받는 상황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해서 강호가 험하다고 하는 것이거니와, 은원 없이 바르게 해 나가려면 법복法服을 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조차 덮어 줄 것은 덮어 주고 최대한 인정을 베풀어야 하지. 유한 듯해도 너는 완강한 부분이 많아서 법복을 입어도 안심할 정도가 못 되는 성격인 셈이다.”

차근차근 일렀다.

“이런 점에서 우선 우려스럽고, 특히 근간 조정의 상태가 크게 심상치 않은 것 같다. 황상께서 병드신 아래 연소하신 태손께서 위를 잇게 되므로 붕어하시면 큰 바람이 일어날 조짐이다. 어느 때나 지상의 세가 바뀔 때는 정쟁이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더욱 그러하다. 번왕들과 태손을 옹호하는 이들이 오래전부터 알력을 보여 왔고 도처의 병권을 잡은 왕부들의 힘도 너무 강성하다. 필경 힘을 축소시키고 삭번을 단행하려 할 것인데, 자신들을 치려 하는 대신들을 보고도 번왕들이 그냥 있으려 할 리는 없겠지. 어떤 경우라도 피바람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내란으로 이어지면 국경까지 위험하다.”

국경.

“막북에는 밀려난 원元이 세를 키워 끊임없이 도발하고 있고, 안남과 토번의 상태까지 심상찮다. 내란이 일어나면 그들이 그냥 있으려 할 리 없지. 한즉 돌아가 자숙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구나.”

“아무렴 숙질叔姪간에 내란이 벌어질 정도로 싸우려고요.”

막여사는 픽, 웃었다.

“숙질은커녕 부모 형제 간에도 피를 흘리는 게 권력이란 거다. 특히 황좌란 더 위에 사람이 없는 자리라서인지 한번 앉으면 내려오기 싫고, 보이면 어떻게라도 올라가려 하는가 보더구나. 스치는 말 한마디조차 해석하며 들어야 할 정도로 조정의 권모술수란 일반인들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대리사를 거쳐 금의위에 재직하면서 온갖 권모술수와 정쟁을 다 겪었던 그. 부친이 이런 말을 했을 때는 분명히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었다.

“……!”

추룡은 더욱 난감해졌다. 따라야 옳을 것이지만 그러나 당장 돌아가기 어려운 이유가 있는 만큼, 조심스럽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소자는 관리가 아니니까요. 아버지, 정말 송구스럽지만 여섯 달만 더 이대로 지내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막여사의 얼굴에 멈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육 개월?”

“반드시 머물러야 할 까닭이 있어서……! 그중 하나가 말씀하신 친구 중 전소가 봄에 혼인하기 때문입니다. 명년 삼월 정도에 할 듯하온데 꼭 보고 가고 싶고요, 나머지 친구들도 좀 더 안정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특히 사귀는 처녀를 데려와 보라 한 만큼 허락을 받으면 백호도 곧 혼인하게 될 것 같은데 조금 더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할 일이 좀 더 남았사오라 모쪼록 허락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흠……!”

친구를 소중히 여기라 가르친 막여사였다. 미루어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고 의기투합하여 악충보에까지 함께 입문한 정도인 만큼 혼인을 한다 하면 아무래도 참석하고 싶어 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때에 맞춰 다시 올 수도 있지만 남평과의 거리가 만만치 않아 오가는 데만도 석 달이 걸리니 또한 그러기도 어렵다.

추룡은 조심조심 주의를 기울여 부탁했다.

“절대 말썽 부리지 않겠습니다. 여간하지 않은 한 악보 한 곳에서만 있겠습니다. 무과를 치르겠다는 생각도 당분간 포기할 것이고요. 최소한 조정이 안정될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

막여사는 차분히 이런 아들을 바라보았다. 열 살 때부터 나무를 한답시고 십 리 길을 달려 봉황산을 오갔던 아들. 드물다 할 정도로 집념이 있었고 의지가 강했다.

한恨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보나 마나 저변에는 자신으로 인한 안타까움이 있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끔찍하게 아비인 자신을 따르던 녀석으로서 하루아침에 장수였던 자신이 관복을 벗었고, 설상가상 화려하던 개봉부, 장군가의 응석받이가 남평의 시골 아이가 되었던 셈이니.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이 그를 당황케 했고, 어린 마음에 어떻게든 개봉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수련을 했다고 봐야 했다.

나이가 들면서 원인을 알게 되었겠지만 어려서부터 지녀 온 집념은 그때부터 자신에의 미래로 바뀌었을 것이다. 아버지인 자신은 피의 회오리 속에 어쩔 수 없이 하야하게 되었지만 그 자리를 대신 찾겠노라고.

대리사는 그의 꿈이 되었을 것이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라 봐야 했다. 한데 그런 녀석이 무과까지 포기 하겠다 하면서도 친구들에 대한 어떤 생각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언제나 아들을 읽는다.

오백의 검수까지 이끌고 와 잡으면 당장이라도 물고를 낼 것 같았던 임대백이 보여 준 모습만 봐도 그렇듯이 아버지들은 아들들을 분신을 지나 자신으로 알고 있으므로 이야기할 때에는 언제나 자신과 먼저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철이 없을 때는 회초리도 들지만 제외하고는 스스로의 젊은 시절을 비추어 자신에게 하듯 배려했고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한 들어주었으며, 어떤 경우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을 정도로 무뚝뚝하고 건조해 보이는 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지만 묵언 속에 무한의 신뢰와 이해가 존재하는 것이다.

딸들에게서는 지니지 못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당연히 막여사 역시 아들의 마음속에 어떤 큰 안타까움이 잔여함을 알았다. 세상의 아들들이 여간해 부친에게 어떤 부탁을 하거나 하는 경우가 드물듯이 할 때는 반드시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었다.

되새겨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기고 있지만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물밑에서는 이미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었지만, 그러나 어떤 일이건 벌어지기 전에는 전조前兆라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아직은 그런 무엇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관직에 몸담고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무림이 험하다 해도 악충보 정도라면 괜찮을 만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차분히 주위의 일들을 하나하나 돌이키고 자신과 대화를 해 본 후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우려가 된다만 정히 마음이 쓰인다면 그렇게 하거라. 하지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육 개월 기한으로 머물되 전소라는 친구의 혼인식을 보고 나면 바로 남평으로 돌아오고 어떤 말썽도 부리지 않겠다는 것, 조정이 안정되기 전에는 출사하지 않겠다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그 안에 주의해야 할 것은 두 번째 사항인데, 다시 이야기해도 무림이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곳이다. 절대 개인적으로 나서서는 안 된다. 단체로 움직일 때도 선두에 나서는 것은 나쁘다. 은원에만 휘말릴 뿐 백해무익하니 조용히 뒤에서 움직이는 게 좋다. 그래도 빛이 날 것은 모두 나는 것이니.”

분명히 그런 점이 있었다.

급한 성격으로, 혹은 감투 정신 등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면 늘 선두에 나서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실제 이런 경우는 적만 늘어날 뿐 득이 없었다. 보다 느린 걸음으로 한 걸음 뒤에서 산처럼 버텨 주는 사람이 안전하고도 실이 있으며 조금 더디더라도 인정 역시 더 받았다.

범凡의 이치였다. 평범하다는 뜻으로 이 글자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가장 큰 것을 의미하는 클 범 자였다. 중용의 핵심.

“혹시라도 독자적으로 움직이다 오늘 같은 문제가 생긴다면 감정을 자제해 피하도록 하고. 이상을 약속할 수 있다면 그리하겠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하……!”

추룡은 무조건 넙죽 허리를 숙여 감사했다. 존경하는 부친은 언제나 이랬다. 한 호흡 느리게 이르되 다 헤아려 본 후 부탁을 들어줬다. 이런 부친이 안 된다고 할 때는 확실히 안 되는 것이었다.

“약속하겠습니다. 만부득이하지 않은 한 피하는 것으로. 전소가 식을 올리고 나면 바로 집으로 가겠습니다.”

일 차에 한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하지만 약과, 이 정도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고, 진짜 큰 고비가 남아 있었다.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어야 할 일로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운을 떼었다.

쿵쿵, 가슴이 마구 뛰었다.

“저기…… 아버지……! 그리고 혹시…… 소자도 혼인 같은 것을 하면 안 될까요?”

“혼인?”

흠칫, 언제나 조용할 뿐 좀처럼 표정을 보이지 않는 막여사의 눈이 크게 치켜뜨여졌다.

“네가 말이냐?”

추룡은 절로 땀이 삐적삐적 났다.

“예……! 아직 자리도 잡히지 않았고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 있어서……!”

막여사의 만면에 즉시 환한 기색이 떠올랐다. 전소가 정혼을 하고 임백호의 경우만 해도 삼 년 전에 혼인 이야기가 나왔듯 스물한 살이면 혼인하기에 이른 시대가 아니었다.

더욱이 외아들! 당연히 막여사의 표정이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자리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차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고, 실제 부러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다음 이야기가 나왔다.

“되고말고지! 어떤 처녀더냐?”

하지만 여기에서 추룡은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는데 말하기 쉬운 상대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악벽강은 이미 낙제점을 받아 든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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