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속 썩는 부친들 (4)
한 번 더 포권을 취해 보이며 차분히 대답했다.
“맞소이다만 관복을 벗은 지 오래인 사람이 어찌 그런 호칭을 받을 수 있겠소이까. 뵙고자 한 것은 사람을 하나 찾고자 함이올시다. 아들 녀석이 반년 전 무과를 치르겠다고 집을 나선 후 영 돌아오지 않더구려. 달포 전에야 서찰이 당도했는데, 항주에서 사고가 생겨 시험을 놓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 휘주에 있다는 기별이었소이다. 해서 찾아온 것인데, 서찰에 휘주 포청의 관인이 찍혀 있어 알아보았더니 소저께서 주선하셨다고 하더구려. 주선하신 만큼 녀석을 알고 계신 게 아닌가 하여 들렀소이다.”
막여사. 그러했다. 군위제일검에 천하제일검의 대명을 지닌 그! 급기야 그가 추룡을 찾아온 것이었다. 정확하게 찾아온 경위도 알 수 있었다. 서찰이 가지 않았다면 모르되 천하를 떨게 하는 금의위의 대천호 출신인 그가 마음먹어 아들 하나를 찾아내지 못할 리 있겠는가.
항주에서 사고가 있었다 하는 구절만으로도 찾아낼 정도가 되는 것이다. 항주 관사로 가서 사건 기록을 조회해 보면 당장 친구들의 주소가 나올 것이었으니.
악벽강은 하염없이 가슴이 떨렸다. 명예라 할지라도 천하제일이 결코 아무 곳에나 가서 붙는 호칭이 아닌 것이었다. 추룡의 일을 떠나서라도 중원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흠모하는 그였고, 그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무사였다.
한 번 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각보角步―귀빈을 맞이하는 예절로 귀한 손님에게 등을 보일 수 없다 하여 두 손으로 안을 가리키며 뒷걸음, 혹은 옆걸음으로 모시는 예도―로 그를 보 안으로 맞아들였다.
“장군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보잘것없는 사람이 이런 과분한 영접을 받을 까닭이 없소이다. 거두어 주시오.”
막여사는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힘을 지녔던 자신이지만 하야한 지 오래, 부질없는 명성은 남았겠지만 천하에 유명한 악보의 소저가 각보까지 하면서 맞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필경 다른 곡절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안내된 곳은 지객관도 집무실도 아닌 내부 깊숙이에 위치한 그녀의 별원이었는데, 들어가자 곧 그는 천만뜻밖이라 할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 녀석이 악충보에 있다는 말씀이오이까? 신양에서 열린 춘추대회에까지 출전을 했다고요?”
“예……!”
탁자 위에 놓인 보검.
악벽강은 울고 싶어졌다. 정말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입장이 어려워진 그녀였다.
한 시진.
호랑이가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추룡은 싱글벙글, 돌아오고 있었다. 잔치 분위기에 휩쓸려 넙죽넙죽 받아 마셔 출렁출렁 술까지 올랐다.
제대로 눈총 받을 일만 남은 것이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게 참 좋군.”
임백호도 함께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 역시 술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영웅전 후로 잠시 까닭모를 어둠을 보였던 그였지만 왕성한 회복력을 보여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글벙글 함께 웃고 있었고, 으쓱으쓱 어깨 역시 다시 폈다.
“설마 조부님께서 잔치까지 해 주실 줄은 몰랐네! 역시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해! 작은 일에도 웃고 서로 도우면서 그렇게. 당唐의 이인 백거이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짧은 삶을 살면서 와각지쟁蝸角之爭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지금이 너무 좋아. 이대로 쭉 평생을 보냈으면 좋겠네!”
와우각상쟁하사蝸牛角上爭何事, 석화광중기차신石火光中寄此身.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에 튀는 불꽃처럼 짧은 순간을 살면서.
“실없는 자들은 늘 피를 흘리며 영욕 속에서 헤매지만 역시 부질없는 짓들인 게 맞아! 암! 가슴을 조이며 산해진미를 먹는들 어찌 그게 웃으며 소채를 즐기는 것만 할 것이며, 천하를 진동시키는 권력을 얻은들 어찌 그게 하늘 보기에 떳떳한 것보다 나을쏜가! 그냥 계속 이대로 쭉!”
횡설수설, 주정기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뭐, 추룡도 마찬가지였다.
“어, 맞아. 서로 도우면서 그렇게. 머물다 가는 것이긴 하지만 악충보에 온 것이 무척 다행이다 싶네.”
“갈 때는 같이 가세! 어차피 버린 몸이니 가는 데까지 가 보는 거야!”
역시 주정기가 있어 보인다.
추룡은 눈을 끔벅거렸다.
“자네도 무관 시험을 보겠다고?”
“그렇게 해 보려고. 사실은 나도 악충보에 계속 있어서는 안 될 사정이 있거든. 대리사는 더 안 되지만 좋은 사람도 생겼고, 어차피 이리된 거, 뭐!”
취중이라 해도 아무래도 말하는 게 조금 이상했다. 좋은 친구이긴 했지만 사실 임백호는 친구들 중에 가장 신비한 점이 많았는데 출신 내력이 우선 그랬다. 집이 황석이고 인근 표국의 사람에게 무예를 배웠다는 등 소개를 했지만 그 외에는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한데 뜬금없는 이야기하고……. 좀처럼 무언가를 묻거나 하는 추룡이 아니었지만 특별히 물어보기로 했다.
“같이 가겠다니 좋긴 하지만 대리사에 있어서도 안 되다니? 왜 그런가? 일반 관부라면 몰라도 하늘을 봐서 부끄러울 곳이 없는 게 대리사인데, 안 된다는 이유가 뭐지?”
임백호는 답답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연이 있다네, 사연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그게 바로 와각지쟁 때문일세. 한 땅덩어리에 살면서도 두 개의 뿔 위에서 춤추는 사람들 때문인데 왜들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싶은 것이……!”
역시 심상찮은 이야기가 나오는 듯.
한데 이때였다. 실로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소주군小主君!”
마침내 악충보에 거의 도착해 멀찍이 보루가 보이는데, 돌연 두 사람이 걷고 있던 길 좌우의 숲 속에서 쉭쉭,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흑색 경장을 조여 입은 삼십 명이 넘는 무사들이 도약해 나와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헉……? 너희들은……?”
쿵! 추룡도 놀랄 정도였지만 날벼락을 맞은 듯 임백호의 안색이 즉시 핼쑥하게 핏기를 잃었다.
찢어질 듯 치켜뜨여진 눈, 머리카락이 곤두설 듯한 모습.
한순간에 취기가 싹 달아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것은 분명 예삿일이 아닌 것이었다.
아무리 천하의 길에 주인이 없다지만 무림의 관례도 그렇고, 타의 방파 코앞에서 누군가가 매복을 했다 하면 대체 일이 어찌 되는가?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고 실력 행사를 한다는 뜻이 되는 것으로 그 방파와 싸우겠다는 말밖에 아닌 것이었다.
뭔가 다른 문제가 생겨 불가피하게 할 수밖에 없을 때는 최소한 양해를 구해 함께 처리해야 옳은 것이었는데, 양해를 구했다면 이런 식으로 나타날 리 없고, 나타난다 해도 악충보의 사람이 있을 텐데 없는 것을 보면 아님을 증명했다.
더욱이 나타난 모습들을 보니 실로 보통 힘이 느껴지는 무사들이 아니다. 악충보의 사람들도 예사의 무사들이 아닌 셈이었지만, 한결같이 갈아진 칼날을 연상케 할 정도로 빈틈없는 자세들하고, 하나하나가 부단주급들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일반의 수하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어쨌건 이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때도 아닌 것 같았다.
“막 형! 어서 피하게!”
슈악-!
“-!”
찢어질 듯 눈을 치켜뜬 채 말문이 막힌 듯 그들을 보고 있던 임백호가 외침과 함께 발끝에 혼신지력을 끌어 올려 신형을 날려 정신없이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수뇌인 듯한 자가 실로 대단한 명령을 내렸다.
“처리해라! 너덧은 따르고!”
뭐가 뭔지 알 수도 없는 사이 대뜸 수하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고 쉬익, 빛살같이 임백호가 사라진 방향으로 신형을 솟구친 것이었다.
“하압!”
쉬쉬쉬쉭-!
“헛……!”
더불어 추룡에게도 적잖은 문제가 생겼다.
명령과 함께 서른에 가까운 자들이 덮쳐 오며 직격 횡격! 서슴없이 폭우 같은 검망을 퍼부어 낸 것이었다.
창졸간에 쉭쉭대며 눈앞으로 날아드는 시퍼런 칼날!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대체 뭐가 이런?”
펑펑!
“흡……!”
완전히 황당하다 싶었으나 어쨌건 머뭇거릴 상황이 아니었다. 추룡은 급히 허리를 숙여 날아든 칼날을 피하며 특유의 강력한 격권! 빛살같이 쌍장을 뻗어 먼저 검을 후려쳐 온 자들 두엇의 복부를 쳐 퇴치한 후 후웅, 일단 신형을 도약해 오 장 밖으로 물러섰다.
“무슨 짓이냐? 무슨 사연인지 알 수 없지만 도리가 아니다!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하다니?”
하지만 말은 소용이 없었다.
보자 바로 임백호가 피하라 했듯 흑의인들은 완전히 사정이 없는 자들이었다.
“흐아아아-!”
촤촤촤촤!
“-!”
질문이고 뭐고 일절 대답도 없이 추룡을 따라붙으며 번쩍번쩍! 무차별 소나기 검망을 퍼부어 온 것!
“하아아압!”
훙-!
추룡은 발끝에 힘을 집중해 다시 오 장여 밖으로 물러서며 ‘촤ㄱ!’ 검을 뽑았다. 또한 예삿일이 아닌 것이었다.
남평을 떠난 후 실제 그가 검을 뽑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그만큼 공격해 오고 있는 흑의인들이 보통 실력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표정을 굳히고 외쳤다.
“다시 경고한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칼에는 눈이 없다! 멈추지 않으면 나로서도 손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시 소용없었다. 대체 뭐가 이런 자들이 있는 것인지 ‘쫙!’ 흑의인들은 계속 부챗살같이 추룡을 추적해 들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겁도 무엇도 없어 보였고, 반드시 피를 보겠다는 뜻 같았다.
“끝까지!”
이쯤 되면 추룡으로서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하아아압!”
물러서던 것에서 쉭, 전진해 무리 속으로 파고 들어가며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었다.
한데 이때였다.
추룡은 물론 흑의인들에게조차 뜻밖이라 할 또 다른 일이 발생했다.
“바보짓을 하려 하는구나. 숲이 있지 않으냐? 이럴 때는 일단 피하고 보는 거다. 숲을 은폐물 삼아 하나씩 때려눕히면 되는 거지.”
후웅!
홀연 추룡이 물러서고 있던 뒤쪽, 악충보 방향에서 하나의 인영이 섬광같이 쏘아 오는가 싶더니 경악스럽게도 단숨에 십 장의 거리를 휙 건너뛰었다.
“헙!”
콰콰콰콱!
더불어 추룡을 압박하는 흑의인들의 위로 떨어져 내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철마각鐵馬脚! 세상에 뭐가 이런 움직임이 있는가 싶게 파파파파……! 연거푸 대여섯 명의 머리를 부수듯 밟고 지나 그들의 뒤쪽으로 내려섰다.
“합!”
퍼퍼퍼펑!
“크아……!”
뿐만 아니라 내려서서도 전진 후진, 돌아서는 자들의 중심으로 파고들며 번개같이 쌍장을 놀려 서넛을 후려치고 있었는데, 동작이 얼마나 빠른지 앞서 머리를 밟힌 자들의 비명이 그제야 터져 나왔을 정도였다.
당연히 뒤에 맞은 자들의 입에서는 아직 비명조차 터지지 않았다.
“-!”
워낙 삽시간의 일이라 장을 맞은 채 퍽퍽 튕겨져 나가며 아직 입만 쩍 벌린 상태!
“아버지!”
그야말로 상상을 불허하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추룡은 바로 이 음성을 알아들었다.
그러했다. 느닷없이 나타나 도저히 사람의 움직임이라 볼 수도 없는 엄청난 손 속을 쓰는 인물! 그는 바로 막여사였다.
퍼퍼퍼퍽! 그사이에도 회오리같이 흑의인들의 사이를 누비며 연방 쌍장을 날려 그들을 후려치고 있었는데 동작은 그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추룡을 타이르고 있었다.
“칼은 집어넣어라. 적을 앞에 뒀을 때는 정리부터 해야 하는 거다.”
“아, 예! 과연 그렇습니다!”
철컥! 추룡은 즉시 뽑았던 칼을 집어넣었다.
“나쁜 놈들아! 이젠 다 죽었어!”
퍽! 퍽! 퍽!
“크아……!”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욕(?)과 함께 막여사의 지원에 힘입어 벼락같이 주먹과 발을 날려 흑의인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당연히 흑의인들로서는 이런 엄청난 낭패가 없었다. 악충보가 코앞이니 응원군이 나타날 수도 있긴 하지만 출현한 인물의 무력이 너무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다.
나타났다 싶은 순간 삽시간에 십 장을 도약해 대여섯 명의 머리를 짓밟고 지나가더니 또한 삽시간에 중심으로 파고들며 대여섯을 거꾸러뜨리고 있으니……!
본인은 너무 가볍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의 눈에는 전후좌우! 그냥 뭔가가 휙휙휙, 번뜩거리는가 싶을 뿐인데, 봤다 하면 퍽퍽! 목과 가슴 등에 철퇴 같은 장이 떨어져 으스러지는 충격과 더불어 피 화살을 뿜을 정도였던 것이다.
“하아압!”
쾅! 와당탕!
추룡까지 손을 쓰기 시작하자 더욱 정신이 없다.
워낙 막강한 것이 추룡의 철권이라 주먹이 날아들었다 하면 코가 주저앉고 턱뼈가 부서지며 순식간에 또 너덧이 고꾸라져 나가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라! 압박!”
“하아아아-!”
쉬이이익!
하지만 흑의인들은 역시 예사의 인물들이 아닌 것 같았다. 놀라긴 했지만 즉각 대응으로 휙휙휙, 두 사람을 피해 포위하듯 일단 저변으로 물러선 후 재차 발끝으로 땅을 차며 또한 팔방에서 쫙! 두 사람을 향해 무시무시하게 검을 휘둘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상대를 잘못 만난 것 같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소자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고?”
한 사람이라면 모르되 두 사람! 흑의인들이 팔방에서 덮쳐 오자 부자父子는 약속이라도 한 듯 훌쩍 발끝을 튕겨 다시 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서찰에 찍힌 휘주 포청의 관인을 보고 알았다. 그런데 이 녀석들 마오족苗族들 같구나.”
퍼퍼퍼펑!
“와아앗!”
대화까지 하며 뛰어넘자 바로 내려서며 또 벼락같이 제각기 장과 발을 날려 두셋씩을 거꾸러뜨렸다.
“마오족이라면……! 아시는 자들입니까?”
퍽퍽퍽!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부족이다. 언젠가 일월교에 대해 말해 줬을 것이다.”
“일월교日月敎?”
철렁! 연방 손을 써 흑의인들을 쓰러뜨리면서도 추룡은 가슴이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