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속 썩는 부친들 (3)
“히히히! 십 년 후에 우리도 영웅전에 도전할 생각일세!”
“사부님이 계속 지도해 줘!”
추룡은 기뻤다. 역시 좋은 친구들. 자신이 원했던 어떤 일 중 하나가 기대한 대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분명히 될 걸세. 숙련도가 문제인데, 자네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어. 한계까지 올려 보세.”
“카카! 막 형 같은 무귀가 아니라서 가능할지 모르겠어. 보다 주의해야 할 것 같아. 이 정도의 절기라면 함부로 흘려서 될 게 아닐 것 같은데 최대한 감춰야지!”
또한 알아서 챙길 일들을 찾고 있는 것.
전소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럼 정산精算을 해 보세. 막 형이 워낙 재신이라 또 대박이 터졌는데, 내기에 건 돈이 마흔 배가 되었네. 막 형이 다섯 냥을 걸었으니 이백 냥이 되었고, 임 형도 같아. 유감이지만 난 가지고 있던 게 없어서 여든 냥. 조 형이 백 냥, 나머지는 찌질하게 사십 냥씩! 하하하……!”
“으아아악! 내가 제일 작다! 스무 냥밖에 아니잖아! 억울해!”
내기에 걸었던 은자에 대한 정산이었다.
“카카카! 너무 알뜰해도 문제래도? 민이 넌 워낙 비상금을 가지고 다니질 않으니!”
“반 냥 이상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 이상하잖아?”
제일 작게 건 것이 송민 같았는데 울상이었다.
추룡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됐으니 난 그냥 전액 목장에 투자함세. 계산 잘해 뒀다가 새끼 쳐서 주게.”
“나도 그렇게 하겠네. 보태서 암말을 사 줘.”
임백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어딘지 어색한 것 같았다. 기뻐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영웅전을 볼 때부터 왠지 모를 어둠 같은 것이 보이는 느낌.
그러나 거의 표시를 내지 않고 있었고, 친구들도 워낙 추룡의 선전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터라 묻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부님은 영웅전의 상금까지 받았잖아! 얼마였지?”
“금자 이십 냥.”
“으아악! 혼자서만 팔백 냥이다! 화리탕으로는 안 되겠어! 불도장佛跳墻도 추가하게!”
“하하! 그건 어머니께서 잘하시는데.”
“그러고 보니 복건 요리로군? 좋다고 말로만 들었네.”
“자, 자! 돌아가서 이야기하고, 막 형이 왔으니 그럼 우리도 잔치에 참석해야지? 난리도 아닌데 이대로 있을 건가?”
“가세! 가세!”
“하하하……!”
일당은 우르르 다시 밖으로 몰려 나갔다. 여전히 신양평에서는 불꽃이 터지고 연방 일어나는 함성에 몰려든 군웅이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다.
하늘과 관계없이 떠 있는 달.
“정신 나간 놈……!”
그러한 이면 또 다른 경우로 불을 토하듯 어마어마하게 노한 인물도 하나 있었다.
“사실이란 말이냐? 녀석이 정말 신양평에 나타났다고?”
“그렇다 합니다. 내막은 모르겠지만 춘추대회에 출전했다는 기별 같습니다.”
벼락같은 정광이 번쩍이는 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육 척의 키에 백삼을 입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할 기도를 지닌 중년의 남자였다. 조용히 있어도 전신에서 찬바람이 느껴질 것 같은 그런.
쿵! 격분한 듯 탁자를 내려쳤는데, 엄청스럽게도 손이 장인掌印을 남기며 손목까지 푹 두꺼운 팔선탁을 뚫고 들어갔다.
평소 창백한 표정의 그가 감정을 보이는 예는 실로 드물었다.
“말을 준비해라! 직접 잡아 주리를 틀 것이니!”
“명!”
그리고 그들이 떴다.
보기만 해도 오한이 일 정도의 눈빛에 퍼런 서슬이 감도는 입술을 지닌, 일절 감정이 보이지 않는 오백 인의 검수들.
어느 한 지역에서는 달의 공포라 불리는 무사들이었다.
“우와……!”
아름답지는 않아도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기품.
분명히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수님이라 칭해도 될지 모르겠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막 공자님, 임 공자님. 뵙게 되어 영광이어요. 완욱형琓昱瀅입니다.”
친구들이 악충보로 돌아온 것은 보름 후였다.
악충보 가족들의 환영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단체전으로 춘추대회를 휩쓴 것도 대단했지만 보다 신진들이 출전해 신경도 쓰지 않았던 개인전에서 우승했다는 것이 악충보 전체 무사들의 어깨를 더 우쭐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회를 휩쓸고 돌아온 모두는 영웅이 되다시피 했으며, 해산과 함께 다시 오 일간의 포상 휴가를 받았다.
일당은 또 둔촌으로 왔고, 마침내 전소의 약혼녀인 완욱형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한데 장청, 송민 등이 말했듯 완 소저의 기품이 역시 보통이 아니다. 제쳐 두고 이야기하자 했듯 그대로 완욱형의 모습은 범상치 않았는데, 키가 우선 정말 육 척에 가깝다. 여자로서는 보기 드문 키로서 거의 추룡이나 임백호만 한 것이다.
체격도 여간이 아니었다. 푸짐하다고 해야 할까? 몸집이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한데 이 모습이 큰 키와 더불어 또한 잘 어울렸다.
풍성한 체격에 그냥 부티가 나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후덕해 보였고, 피부 또한 대단히 희다. 특별히 화장을 안 해도 박속같다 할 정도의 피부를 지닌 처녀로서 얼핏 봐도 귀티가 날뿐더러 전체적으로 몸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딱 부러지게 말해서, 어른들이 말하는 부잣집 맏며느리의 상인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처녀들의 옆에는 어지간히 아름다워도 선이 가늘다 싶은 처녀는 그냥 빛이 흐려지게 마련인 셈이다.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고 모든 여인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개성을 지녔지만 선이 굵은 모습은 어디를 가나 돋보인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체격만큼이나 성격 역시 푸짐해 보였다. 부드럽게 웃는 모습하며 볼을 붉히는 모습이 그대로 순수한 시골 처녀였다.
이야기 나왔던 대로 만난 자리는 추룡이 한턱내는(?) 상태로 곽영의 집이었고, 곽영, 문대위, 송민, 장청도 사귀는 처녀들을 불렀다.
그런데 어찌나 눈들이 높은지 또한 한결같이 여간한 처녀들이 아니다. 귀엽거나 매력 있거나 평범할지라도 당찬 기개가 있다.
가장 쩔쩔매고 있는 것은 새로 합류한 세 친구, 정백하와 허원소, 조태형이었는데, 까닭은 그녀들이 또 친구들을 대동하고 왔기 때문이다.
“하하! 처음 뵙지만 정말 다들 고우시군요. 실례인 건 알지만 느낀 대로 말씀드리는 것이니 경박하다 생각지 말아 주십쇼.”
“괜찮네, 괜찮아. 우리 사이에는 그런 것 없네.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세. 자네들은 처음이겠지만 우린 다 아는 사이들일세. 같이 자라다시피 했거든.”
집이 멀고 사귀는 사람이 없다 한 그들. 좋은 처녀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인데 계절은 가을이지만 봄기운이 물씬하다.
말로만 한턱이지 자리가 이렇다 보니 추룡이 낼 것도 없이 전소의 조부께서 또 잘 익은 머루주 한 항아리를 내놓았고, 요리는 잔칫집 수준으로 친구들의 모친과 솜씨 좋은 동리 아낙들이 모여 끊임없이 마련해 들어왔다.
아니, 실제 잔치가 벌어진 상태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른들에게도 이런 경사가 없는 것이었다.
전소만 해도 체격 미달로 포사 시험조차 치르지 못했는데, 올 들어 턱 하니 악충보에 들어가는가 하면 몽마를 잡는 데 공헌해 휘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고, 친구들 역시 황산성의 젊은이들 중에서는 최고라 할 만큼 이름이 났다.
이런저런 일로 받은 상금으로 목장 부지를 마련하는 등 가세도 팍팍 풀려 나가고 있었고, 춘추대회에 출전해 또 맹위를 떨쳤다 하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전소의 조부와 곽문 등이 양과 소, 돼지까지 잡아 제대로 잔치판을 벌였던 것이다.
“헛헛헛! 전소나 민이, 대위, 청이가 원래 어릴 때부터 기질이 좋았지! 동리 애들을 다 몰고 다녔잖아! 분명히 뭐가 돼도 될 줄 알았다니까.”
“곽문이 자네가 고생했네! 애들 가르치느라 애썼어! 고맙네!”
“허허! 나야 한 게 뭐 있다고. 재질이 보이기에 틈틈이 재미 삼아 한 건데. 사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도 아닐세.”
덩달아 조촐하게 밭일과 사냥을 하며 지내던 곽문도 떴다.
시골 잔칫집이 그렇듯 마당에 천막을 치고 판을 벌이자 동리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부어라 마셔라 화기和氣가 가득하다.
“하하! 주위 총각들이 여간한 장사가 아닌 것 같던데 오성댁, 둘째 예쁘지? 한번 들이밀어 봐! 봉 잡을지 어떻게 알아?”
“벌써 같이 있는데 뭘 이제 이야기해?”
“하하하! 빠르네?”
지지고 부치고, 음식을 장만하는 아낙들도 내 일처럼 웃으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황산성.
“……!”
객잔의 분위기가 꽤 소란스럽다 생각했다.
도착한 지 엿새,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화제 역시 대부분 악충보의 활약에 관한 것이었다.
몽마를 잡아내더니 춘추대회에서 우승까지 거두었다는.
자신들의 지역을 지키는 향용이 해낸 일이라 일반인들에게도 왁자지껄하게 회자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이하게 무인인 듯한 사람들이 조용한 느낌이 들었다.
네 칸가량 떨어진 자리. 흑의 경장을 입은 무사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주위가 온통 악충보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지만 그들은 일절 말이 없었다.
조용히 먹고 마시고 하고 있어 드러나지 않고 있었지만 차갑게 절제된 모습들하며 빈틈이 거의 없어 보이는 몸가짐들.
느낌이 옳다면 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무사들이 아니었다.
참 이상하기도 했다.
그는 반 시진가량 주루에 앉아 있었는데, 려연旅宴이라는 객잔을 겸한 꽤 큰 주루였다. 한데 반 시진 사이 같은 차림의 흑의 무사들이 벌써 여덟 차례 이상 다녀갔다. 교대라도 하듯 너덧, 혹은 대여섯씩 들어와 조용히 식사를 하고 나가곤 했던 것이다.
일행이 꽤 많은 듯했는데 시선을 피하기 위해 교대로 식사를 하고 가는 듯한 느낌. 악충보의 무사들은 아니었다.
상단商團을 호위해 온 타 지방의 무사들이나 표국의 사람들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기도들이 크게 심상치 않은데…… 혹시 특별한 임무를 띤 관사의 즙포들이 이동하고 있는 것?
“……!”
오랜 경험으로 심상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건 상관없는 일인 만큼,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일이 다 생기는 뒤숭숭한 천하에 풍운을 떠난 지 십 년이 넘었는데 그들이 상단의 무사들이면 어떻고 즙포면 어떻단 말인가. 큰 객잔치고 인색하게 차茶가 싸구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물녘.
그가 악충보에 도착한 것은 반 시진 후였다.
쿵! 동시에 악벽강의 가슴이 완전히 북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남평에서 오신 분이라고?”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
변함없이 그녀는 정충전의 집무실에 있었다.
대회에 출전했던 사람들은 홀가분하게 휴가를 떠났지만 자리를 비웠던 만큼 그녀는 오히려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오자마자 각종 결재 서류들을 살피고 있었던 터인데, 느닷없이 성문을 지키는 위사 하나가 들어와 뜻밖의 보고를 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남평이라고 했습니다. 닷새 전에도 한번 오셨는데 소저를 뵙고자 하시더군요. 뭔지 모르겠지만 휘주 포청의 일로 오셨다 하셨습니다. 예사로운 분이 아니신 것 같아 신양에 갔다 말씀 올리고 돌아오시면 들르시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오셨군요.”
쿵쿵쿵! 악벽강은 연방 가슴이 북소리를 낼 정도로 급격히 뜀을 제어할 수 없었다.
남평! 즉시 큰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추룡의 고향이 아닌가. 천하가 넓은 만큼 남평이란 지명을 가진 곳이 한두 곳이 아니겠지만 휘주 포청까지 언급했다 하면…… 바로 짚이는 것이 있었다. 몽마의 사건 후 추룡에게 서찰을 보내게 주선했던 곳이 바로 휘주 포청의 편전부였던 것이다.
“혹시 실수하거나 한 것은 없었겠지?”
“아무렴 소저를 찾아오신 손님인데 속하들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을 정도의 분도 아니십니다. 딱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 정도의 위엄이 느껴지는 분이신걸요.”
성문을 지키는 무사들도 내당의 소속이었다.
후들후들, 악벽강은 완전히 가슴이 떨려 급히 동경銅鏡을 보며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는 등 이리저리 옷매무새를 살핀 후 물었다.
“혹…… 혹시 허술해 보이는 점 없느냐? 어딘가 좋지 않아 보인다거나……!”
근래 들어 여성스러워지긴 했지만 남자 이상의 성격인 그녀가 왜 이렇게 당황스러워하는 것인지 위사는 의아할 뿐이었다.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정해 보이시는걸요.”
“가 보자!”
악벽강은 한 번 더 동경을 보는 등, 전에 없던 행동을 한 후 굳어진 표정으로 위사와 함께 나섰다.
푸른 하늘, 새털구름.
어느새 십일월이었다. 가을을 맞이한 황산의 저변은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고 웅장한 산세는 여름보다 더 절경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속에 그는 꼿꼿한 모습으로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짙은 남삼, 벗어 든 방갓, 훤칠한 키에 단정하게 짧은 수염을 기른 모습이 가만히 서 있어도 주위를 위축되게 할 뿐 아니라 탈속해 보이는 모습이 선인과 같았다.
무예를 모르는 일반인이나 아이들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절로 묵례를 할 정도의 그런 모습이었다.
악벽강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벽강이라 하옵니다. 남평에서 찾아오셨다는 어른이신지요?”
어질어 보이지만 정기가 흐르는 눈, 그 역시 조심스럽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소저께서 몸소 나와 주실 줄은 몰랐군요. 남평에서 온 막漠이라는 사람이올시다. 높으신 영명 익히 들었소이다.”
악벽강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높은 영명이라니?
당치도 않을뿐더러 더 솔직히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겠다 싶은 명성이었다. 색왕녀에 선머슴에, 워낙 휘황찬란한 명성이 아닌가.
후들후들, 계속 가슴이 떨렸지만 용기를 내야만 했다.
“부끄럽습니다. 여如 자, 사事 자, 막 장군님이 틀림없으시지요?”
그의 눈에 흠칫하는 기색이 스쳤다. 천하에 막씨가 한둘이 아닌데 성만 듣고도 자신을 알아본 처녀. 역시 곡절이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