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속 썩는 부친들 (2)
하지만 빈부의 차이나 직위의 차이는 사람의 관계를 참 어렵게 만드는 게 사실이었다. 비슷한 수준이 아니면 없는 쪽에서 자괴심을 느껴 스스로 멀어지기 때문이었다.
악벽강은 거듭 미소 지었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야 할 필요가 있으신가요?”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나게 된 경위를 생각해 보셔도 아시겠지만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크게 좌절했을 것입니다. 제게 웃음을 찾아 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는데 성격과 마음 역시 맞습니다. 덕분에 악충보로 와서 저 역시 많을 것을 배웠고요. 함께 커 갔으면 싶고,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울 때 만난 친구는 영원히 남으니 더불어 커 가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더군요.”
“시험 결과는요? 흡족하셨나요?”
추룡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습니다. 솔직하게 저는 남평을 나오면서 군부의 무관들만 생각했지 사 무림을 그리 높이 생각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커도 군, 관부에 비하면 작고, 최고의 실력자는 거의 황실과 군부 쪽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당수의 이인들이 있긴 할 것이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던 터입니다.”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한데 이번 대회를 보니 다르더군요. 관직을 피하는 무인이 의외로 많고 고수도 모래알처럼 많은 것 같았습니다. 확실한지 모르겠지만 태안농부 맹 대협께서는 금군 교두를 물리치셨다고 들었는데도 농사를 짓고 계신다더군요. 정말 의외였습니다. 실력도 엄청났습니다. 악충보에 와서 창에 눈을 뜨지 못하고, 정명正明 사형을 만나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저는 패했을 것입니다.”
“흠……?”
악벽강의 표정에 멈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정명 사형이라니요? 소림의 정명 대사님 이야기신가요?”
숨기고 있던 비리가 무의식중에 밝혀졌다.
추룡은 슬며시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우연히 뵈었습니다. 몽마와 싸운 후 찾아오셨던데 속가의 아우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곤법을 다수 전수해 주시고 가셨습니다.”
“하하……!”
역시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들어도 가운데 내용을 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부딪쳤다면 분명히 적잖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정업 같은 경우는 대놓고 자신에게도 화를 내었는데 분명히 그는 입장이 다른 것이다. 자신은 악충보라는 작지 않은 단체를 업고 있고 만난 것조차 악충보 안이었다.
반면 그는 혼자이고 밖에서 부딪쳤으며, 찾아갔다 하면 몽마 정진을 처치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갔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우로 맞이했다고 하니.
그들의 수양과 인품이 우선했겠지만 그 이상으로 추룡의 대처가 만만하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 것이었다.
추룡은 계속 내용을 피해 이야기했다.
“특히 호면검 유 대협께서는 상상을 넘어서는 실력을 지닌 분이셨는데 솔직히 괴물 같았습니다. 저와 유사한 검을 쓰시더군요. 이런 분이 계실 줄은 상상치도 못했는데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우물 안의 개구리에 지나지 않더군요.”
슬며시…… 비로소 악벽강은 마음이 놓였다.
사실은 그녀 역시 추룡과 같은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진을 잡을 때 실력을 알아보았지만 역시 아직은 나이가 있었다. 약관에 이만한 성취를 이룬 것은 필시 부친인 막여사의 영향일 것이었다.
본인의 노력도 따랐겠지만 끌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재능은 크게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약관에 춘추대회까지 제패했다고 하면 자만할 수 있었다.
그는 친구들이 안주할까 봐 우려했다지만 악벽강은 그가 안주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현재 그녀는 기쁜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혹시라도 우쭐하는 모습이 보이면 화라도 내는 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춘추대회를 통해 더 각성하고 있었다. 예상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했듯 최소한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일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비로소 활짝 웃었다.
“우승하시는 순간 정말 기뻤습니다! 진짜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어요. 너무 자랑스러웠고요. 틀림없이 가가께서는 무한히 커지실 것이라 믿습니다. 모쪼록 노력하셔서 아버님보다 더 위대한 무인이 되어 주셨으면 싶습니다.”
감정을 자제할 줄 알고 강약을 겸비한 그녀.
추룡은 싱겁게 웃으며 천으로 말고 있던 검을 꺼내 악벽강에게 건네주었다.
“불가능합니다. 꿈이긴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제가 다가설 범주의 실력이 아니십니다. 손가락 하나로 그냥 찍입니다. 이 검은 악 매께 드리고 싶습니다.”
춘추대회 우승자의 상징으로 받은 검.
보검이었다. 이 시대 일반의 검은 소나 말가죽으로 칼집을 만들었고, 좀 더 나은 검은 옻칠을 한 오동나무로 만든 칼집에 넣었다. 습기를 막고 녹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손에 땀이 나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단단히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손잡이에도 울퉁불퉁하게 조각을 넣거나 무명실을 감았고.
하지만 이 검은 칼집과 손잡이부터 달랐다. 오동나무에 회백색 상어 가죽을 씌운 것이었다.
상어의 가죽은 볕에 말리면 대단히 단단해질 뿐만 아니라 표면에 방패 비늘이라는 것이 덮여 밤송이같이 까칠까칠한 점이 있었다. 날카로운 부분들을 갈아 손이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칼집에 씌우는 것이다.
당연히 습기는 아예 스며들지 못하고, 어딘가에 부딪쳐도 쉽게 손상이 되지 않는 것으로, 이런 칼집을 만든다는 자체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동으로 멋지게 마무리해 청색으로 날염한 은잠사로 굵게 끈을 꼬아 허리에 찰 수 있게 했고.
스륵! 엄지손가락으로 막음 쇠를 밀어내어 보니 소리도 나지 않고 검신劍身이 미끄러져 나왔는데, 깊이 파인 혈조血槽에 매화꽃이 나열해 있는 것처럼 아름답게 열처리가 된 칼날은 서릿발이 일 듯했고, 막음 쇠 위의 마무리 부분에 사십팔대四十八代, 신양信陽 춘추영웅春秋英雄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북 무림 중원 무인들의 명예! 가격으로 따질 정도가 아닌 보검인 셈이었다.
서릿발이 일 듯한 고귀한 검을 보며 순간 악벽강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검이야 돈으로 구할 수 있다지만 이 명예는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탁! 바로 칼을 도로 꽂아 넣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될 일입니다. 이런 검은 가르쳐 주신 아버님께 바쳐야지요. 아녀자가 소지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추룡 역시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큰일 납니다. 뼈도 못 추릴 정도로요. 허명을 탐낸 것이라 보실 것인데 절대 금기죠. 저나 아버님은 사용하지 않는 검입니다. 너무 짧아요.”
역시 뼈대가 있다. 악벽강은 한 번 더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검은 일반 전형으로 석 자 세 치였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검은 본인이 아니면 지닐 수가 없어서……!”
추룡은 그냥 미소 지었다.
“기념으로 소지하시면 되겠죠. 모든 것을 가진 악 매라서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받아 주세요.”
부드러운 눈빛으로 악벽강을 바라본 후 실내를 나갔다.
“아, 잠깐만……!”
악벽강은 이런 추룡을 불러 세우려 했지만 포기하고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음을 나누고 있지만 그래도 남녀가 유별한데 밤이고 한 객실. 누가 생각해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넘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산. 그 전에는 자신으로 인해 티끌만치라도 얼룩이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선물받은 검을 꼭 끌어안았다. 행복하면서도 슬펐다.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천하에 거칠 것이 없는 자신이었는데…… 근래 들어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불비 역시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헛헛헛……! 축하드리겠소이다, 악 보주님. 이번 신양대회는 완전히 악충보를 위한 대회가 되었군요.”
개인, 단체전을 모두 석권한 그.
대회가 끝난 지금 중천보의 중앙 집무전에 펼쳐진 회연에 참석하여 찾아온 웅주들, 명숙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였다.
자꾸만 어떤 불출이가 마음에 걸렸다. 마시에서 우연히 만나 악충보로 왔다는 불출이. 출전하기 전 수련할 때만 해도 허우대값도 못 하는 녀석 아닌가 생각했던 터인데 천만뜻밖에도 그가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것 같았고, 그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이다.
만에 하나 그가 영웅전에 나타났던 흑무사로서, 악벽강이 마음에 둔 녀석이라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우려가 생긴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편하게 생각했었다. 내당에 편입했다는 일당이 입문을 위해 항주로 갔었고, 거기에서 말을 잃어버린 녀석 하나를 만나 의기투합하여 말을 찾고 함께 악충보에 왔을 것이라고. 와중에 악벽강도 마시에서 만났고, 인연으로 내당에 편입되어 신임을 받게 된 게 아니었을까 하는.
한데 수련하는 것을 보니 날이 다르게 모두의 실력이 달라지고 있었고…… 지나치다 싶어 도착해서 다시 물으니 끌어 주는 사람이 있다고 실토했다. 끌어 주는 그가 바로 사윗감이라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그는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서 일당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또한 항주에서 모두를 만나 휘주로 왔고 주변 어디선가 그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다들 둔촌 출신이라 하니 황산성 어디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흡족한 심정으로 인사하러 올 날만 기다린 셈이었다.
한데 영웅전을 보며 다시 생각하니 그것이 아니었다. 정말 희박한 예였지만 그가 일당과 함께 악충보에 입문해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고약한 느낌이 든 것이다.
증거는 일당이 가르치지 않은 붕거창의 정수를 쓴다는 것이었는데, 딸이 알려 주지 않은 한 스스로 알아낸 것이고, 친구들에게는 그 정도 능력이 있을 것 같지 않으니, 그렇다면 역시 그도 악충보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실력을 지니고도 수련 당시 시종일관 몸을 들이대고 있었던 불출이! 급격히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앞서 생각한 것처럼 가르친다는 사윗감은 따로 있고, 불출이도 우연히 만난 녀석 중 하나로서 배우는 상태면 좋겠지만 그것은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배우는 녀석이 영웅전을 석권할 정도는 아닐 테니까.
그가 장본인이라 봐야 했는데…… 사실이라면 딸과의 사이에는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벽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인사를 한 것이라거나 변하고 있는 딸의 모습 등을 비춰 두 사람의 사이는 걱정할 것이 없을 듯했지만 열외의 문제였다.
약관의 나이에 춘추대회를 제패할 정도의 실력까지 지닌 장군가의 아들. 그 정도의 아들을 키워 내었을 정도의 집안에서 딸을 받아들이려 할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자칫하면 딸이 큰 상처를 입을 것인데……! 속이 썩어 버릴 듯 타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가문이나 가세에 관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건……!
“운이 좋았을 뿐이올시다. 한참 아래 수하들의 친선경기일 뿐인데 대단할 게 무엇이겠소이까.”
먹구름이라도 낀 듯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군 채 축하해 주는 명숙들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도 없었다.
“왔다!”
“와아……!”
“하하하! 드디어 나타났군! 축하해! 사부님!”
“하하……! 설마 막 형이 영웅전에 출전할 줄은 상상치도 못했네! 더욱이 우승까지 할 줄은!”
그러나 세상이 뒤집어져도 친구들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악벽강을 만난 추룡은 곧 숙사로 돌아갔는데 모두가 보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치를 즐기고 있었지만 친구들은 숙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룡이 돌아오자 곧 우르르 몰려와 열띤 모습으로 축하했다.
이래서 친구가 좋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 시시비비가 있다지만 진실한 친구는 언제나 마음을 비워 놓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니까.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았네. 미친 척하고 옷을 바꿔 입고 나가 봤는데 어수룩한 모습에 나온 인물들이 방심했나 봐.”
“됐네!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처음 한두 사람은 그랬을 수 있겠지만 무경록에 오른 세 사람을 연거푸 꺾어 놓고! 호면도황이나 태안농부가 어디 만만하기나 한 사람이던가? 초강자들이라 봐야 할 고수들인데.”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한턱내게!”
한턱. 역시 그 나이 때의 순수함을 그대로 지닌 것이다.
이래서 추룡도 친구들이 좋은 것이었고.
“어, 낼게. 여기선 좀 그렇고, 돌아가서 단단히 한턱내겠네. 팔보채, 화리탕火鯉湯, 적압炙鴨, 죽엽청竹葉淸 모두 내겠네!”
“카카카……! 죽이는군!”
모두가 좋아했다. 실로 소박한 것이었다. 열거된 음식을 좋지 않다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로 큰일에 낸다 하면 웅장, 타봉, 실어, 연와 정도는 나와야 하는 것이다. 술 또한 고정공, 양하대곡 정도는 나와야 하고. 당연히 이것이 천하 진미이며 최고의 음식이라는 것을 들어 보지 못한 친구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나이에서는 추룡이 말한 것들이 일단 최고다. 추룡 역시 최고로 맛있는 음식이라 생각하며 말한 것이고.
권문세가의 아들들이라면 당장 빛깔이 번쩍하는 기루에 최고 요리를 말할 것이지만 그런 것들은 꿈도 못 꾸는 추룡과 친구들이었고, 그냥 일반 주루에서 말하는 좋다 하는 요리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래도 마냥 최고다.
이래서 친구인 것이다.
관심이 한쪽으로 몰렸다.
“한데 말일세, 막 형! 칠우검법을 언급하는 것 같던데 정말 사용한 게 칠우검법인가? 그것만 사용하고도 우승한 게 맞아?”
추룡은 웃으며 확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진짜 나도 아는 게 없대도? 속에 다 들어 있네.”
“이야……!”
“거 봐!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칠우검이 진짜 절기래도?”
“하하! 놀랐지, 정말 놀랐어! 싸우는 걸 보고 딱 반해 버렸네. 돌아가서 피나게 수련할 거야! 막 형만큼은 못 해도 반은 따라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