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괴물怪物 (4)
혁상이 멍석을 깐 만큼 자신들 역시 패한다 해도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이기면 무경록 무사들의 위신을 회복하는 것이고, 패하면 함께 자리할 또 하나의 고수가 등장했다 생각하면 되는 것으로, 어디에서 부딪칠지 모르니 미리 겨루어 보는 게 좋기도 한 것이었다. 무예라 하면 한결같이 홰를 치는 인물들인 데다 안전한 비무대회이니 부딪치는 과정에 분명히 건지는 것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심리와 함께.
쿵……! 놀랍게도 제일 먼저 비무대에 오른 것은 뜻밖에 칠 척의 어마어마한 거구를 지닌 금삼인이었다.
느릿하게 걸어오는 것 같았지만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다가오는 그의 움직임은 실제 대단히 빨랐는데, 삽시간에 비무대 앞까지 닥쳐와 도刀에 해당하는 가장 길고 두꺼운 다섯 자 길이의 대목검을 병기대에서 쑥 뽑아 들고는 훌쩍 신형을 도약해 올라온 것이었다.
깃털같이 가뿐히 행동하고 있었으나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비무대가 흔들릴 지경.
오르자 곧 쓰고 있던, 덩치만큼이나 큰 방갓을 휙, 벗어 던지고는 묵직하게 심판관 및 추룡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형주에서 작은 무도관武道館을 꾸리는 호면도虎面刀 유곡劉鵠이라 하오. 흥겨운 일이 있다 하여 들른 차에 놀라운 위모를 뵙게 된바, 부족하나 한 수 가르침 받아도 되겠소이까?”
종이 울리는 듯 우렁우렁하게 퍼지는 음성.
드러난 그의 웅자는 무시무시했다. 체격도 산만 했지만 호랑이 머리를 떼다 붙여 놓은 듯 왕자王字 주름살이 있는 이마에 주먹만 한 코, 눈 역시 화등 같은 정광이 흐르는 호안虎眼을 지닌 서른 후반의 인물이었다.
“와아아아아……!”
“역시 호면도황이다!”
찰나 한 번 더 신양평이 뒤집어지는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고,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느끼는 속에 추룡 역시 바로 절정의 고수가 올라왔음을 알았다.
한눈으로 봐도 이건 뭐, 거의 괴물급이었고, 워낙 덩치가 거창하다 보니 육 척인 추룡조차 작아 보였다.
“영광입니다. 유 선배님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심판관의 표정 역시 어느 때보다 더 흥분되어 있었다.
“만장해 주신 호걸 여러분! 신양 영웅전에 또 영광이라 할 일이 생겼소이다! 아시겠지만 지금 오르신 유 대협께서는 무경록에서도 상위 서열이실 뿐 아니라 삼십팔 회 북 무림 춘추대회의 우승자이기도 하신 호걸 중의 호걸이올시다! 형주에서 무도관을 운영하시며 후진을 키우시는 분으로, 찾아가도 뵙기 어려운 분이 오늘 다시 비무대에 오르셨소이다! 큰 박수로 맞이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삼십팔 회 북 무림 춘추대회의 우승자!
“와아아아아아……!”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엄청난 거물이 올라온 것이었다.
천둥 치듯 한 함성과 갈채가 일어나는 속에 친구들의 표정들도 실로 괴상하게 변해 있었다.
“대체 뭐가 어찌 되어 가는 거야! 저런 대단한 인물이 왜 비무를 하겠다는 거지?”
“막 형의 실력을 심상찮다 본 걸세! 솔직히 이미 상상을 넘어섰어. 영웅전에 막 형이 출전할 것이라 생각도 못 했지만 이런 맹위를 보이리라고는……! 먼저 판을 치른 혁 대협만 해도 무경 고수였잖아. 그를 이겼다는 것조차 믿기지도 않을뿐더러……! 그냥 보주님과 싸워도 되겠어! 보주님도 무경 무사이시니!”
이즈음 모두는 추룡의 선전을 보며 한결같이 손에 땀을 쥐고 있었던 터인데, 역시 찢어질 정도로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몽마를 추적해 가는 걸 보고 실력자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던 거야? 칠우검이 그렇게 강한 거야? 칠우검으로 이긴 게 맞아?”
“믿기지 않지만 그런 것 같아. 막 형 성격에 허언을 하지는 않을 거고, 분명히 가진 게 격권과 격검뿐이라 했네! 요는 숙련도가 문제인 것 같은데, 들치기를 당했을 정도로 세상일을 모르는 막 형이 수련만 해 온 무귀武鬼였다는 것은 확실한 거고……! 우리도 죽어라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이야길세! 돌아가면 난 수련에 미칠 거야!”
“덩달아 우리도 배웠다 이거지! 솔직히 끝내줬어! 자네들이 오장급들을 연달아 격파해 내는 걸 보고 굉장하다 생각했지만 어영부영 천하의 절기를 얻었군!”
정백하, 조태형, 허원소까지 흥분으로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모두가 어떤 결의로 차고 있는 것 같았다.
“……!”
다만 임백호의 표정만 조금 어두운 것 같았다. 어딘지 부끄러운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준비!”
“와아아아아……!”
그러한 속에 마침내 심판관의 신호가 떨어지고 유곡을 맞아 추룡은 다시 경기선에 섰다.
“좋은 시합을 부탁하겠소.”
“시작!”
“와아아아아……!”
거듭 천지가 진동하는 어마어마한 대함성이 일어났다. 추룡과 유곡은 모두 중단으로 목검을 앞세웠는데, 이 장 간격이라고 해도 덩치급에, 둘 다 대장검이라 할 목검을 들었으므로 일 장 반 간격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추룡은 산이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고, 악벽강의 눈도 찢어지게 치켜뜨여 있었다. 몽마 정진을 눕힌 추룡이었지만 저 거한은 실로 예사의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경록의 고수! 친구들의 말처럼 악불비 역시 무경록에 올라 있었는데, 겨루어 보지 않았으므로 누가 위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평수! 결코 아래라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악불비의 눈도 치켜뜨여 있었고, 나머지 웅주들도 거의 같았다. 현 무림 최강이라 할 향용들을 이끌고 있는 만큼 그들 중에도 무경록의 인물들이 여럿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곡을 가볍게 생각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치 대단한 강자였던 것이다. 입증이라도 하듯 움직임 역시 일반과 완전히 달랐다. 신호가 내렸지만 유곡은 바로 쳐 온다거나 하지 않았고 조금씩, 천천히 발을 끌듯이 하며 일 장 반 거리에서도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리고 일 장까지 닥쳐와 목검이 맞닿을 듯한 간격이 되는 순간!
“크아아아압!”
“하아!”
투카카카카캉!
장내에는 곧바로 어마어마한 정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완전한 중단으로 서서히 밀고 들어왔던 유곡이 돌연 천지가 진동하는 포효를 터뜨리더니 ‘푸확!’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순간 동작으로 거기에서도 더 안으로 파고들며 창졸간에 다섯 자 목검으로 파팟, 연속 이 회, 벼락같이 추룡의 얼굴을 위협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폭우 같은 검세를 퍼부어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것이로구나!”
친구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뜨여졌다.
추룡과 처음 비무를 할 때 이 장도 너무 위험할 정도로 가깝다고 생각했던 그들. 비로소 추룡의 가르침이 맞았다는 것을 정확히 안 것이었다. 안전은 하겠지만 멀리서부터 치고 들어가려 하면 그만큼 동작이 커지고, 동작이 커지는 만큼 허도 많이 드러난다는 사실! 추룡은 당시 일 장의 간격도 멀다고 하였는데, 유곡이 그것을 증명해 준 것이었다.
저 큰 덩치에 명성 높은 인물이 토끼처럼 보이는 추룡을 잡으려고 신중을 다해 접근하여 한꺼번에 빛살 검세를 퍼부어 내었던 것이다. 얼핏 일반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이 도리는 분명히 진리기도 했다.
적을 치려면 검이 닿을 곳에서 쳐야 했는데, 안전이 어디에 있는가. 검을 들고 마주 섰다는 자체부터 이미 목숨을 건 것이었다. 떨어져서 겉돈다는 것은 겁을 먹었다는 이야기밖에 아닌 것이었다.
가르친 만큼 추룡 역시 어마어마한 맹위를 보이고 있었다.
“하아아아-!”
카카카카카카……!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유곡의 검에 맞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방어를 하며 강력히 마주 빛살 공격을 퍼부어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빠르고 강하나 두 사람의 검은 모두 짧은 치기로 이어지고 있었고, 시커멓게 보일 정도로 무수한 검영을 일으키며 마주 부딪치고 있었지만 손실은 하나도 없었다.
허초고 변화고가 없는 것이다. 피차 실수하면, 진검일 경우 두개골이 쪼개질 것이고 목검이라도 단숨에 승부가 날 것인 만큼 움찔할 사이조차 없는 것이다.
붙을 듯한 거리에서 머리, 손목, 어깨 할 것도 없이 빗발치듯 공방이 벌어지는 터에 변화를 꾀한다는 자체가 우스울 뿐. 이런 인물들을 상대로 어설프게 변화수를 쓴다고 칼끝을 돌려 대거나 동작을 크게 했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갈 건 자명한 이치였다.
“하아아압!”
“타-!”
카악!
퍼퍼퍽!
격렬한 몸싸움과 힘겨루기 역시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 근접거리에 벼락같이 피차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공방을 주고받고 있으므로 걸핏하면 두 사람은 목검이 얽혀지고 몸이 붙듯 해 버렸는데, 그럴 때마다 사력을 다해 서로의 목검을 밀어붙이며 돌아가고, 밀리지 않으면 찰나 바로 무릎 치기가 감행되었다.
유곡의 무릎이 꺾여 올라온다 싶으면 추룡 또한 벼락같이 함께 무릎을 꺾어 올렸고, 추룡의 발이나 무릎이 움직인다 싶으면 유곡 역시 드세게 목검을 밀어붙이며 함께 무릎을 꺾어 올려 차단했다.
팔다리, 할 것도 없이 몸 전체에 눈이 다 달려 있는 듯하다.
“하아아압!”
촤촤ㄱ!
“흐아아!”
투카카카카캉!
그러다 안 되겠다 싶으면 또한 순간적으로 휙, 빛살같이 신형을 일이 장 밖으로 물러섰으며 물러서면서도 공격에 대비해 위협적으로 검을 촤ㄱ촤ㄱ 휘둘렀고, 물러섰다 싶은 순간 다시 전진해 보인다 싶은 서로의 허를 향해 격렬히 공세를 퍼부었다.
정확히 모두가 허는 없었다. 허를 찾아내기 위해 보이는 곳에 공격을 퍼붓는 것으로, 모두가 살초라고 봐야 했다. 지극히 정상인 겨룸인 것이었다.
희한한 일 중 하나로서 중원의 무인들은 검을 쓸 때 상당수 화려한 변화를 선호했고, 치명적인 살초를 따로 두고 있었지만 분명히 이것은 바른 것이 아니었다. 날이 시퍼런 검이 번쩍이는 판국에 어디가 되건 맞기만 하면 끝이 나는데 살초라는 게 어디 따로 있단 말인가.
“하아아압!”
카카카카카칵!
둔탁하게 부딪치는 몸과 몸, 검과 검, 야수처럼 번쩍이는 눈! 이마, 몸,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삽시간에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얼마나 빨리 몸을 움직이고 있는지 반 각 만에 수백 합을 서로 치고받고 있었으며 열 번도 더 목검과 목검이 얽혀진 채 격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떨어져 공방을 주고받을 때는 한순간에 폭우 검망이 서로에게 쏟아졌고, 얽혀질 때는 이가 부스러질 정도로 악물린 채 육탄으로 서로를 밀어붙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추룡이 불리한 듯도 해 보였다. 워낙 상대가 거구인 만큼 힘이 여간 아니라 밀어붙이기에 그냥 당해 버릴 듯한 그런 형상!
하지만 놀랍게도 비교해 작은 체격이었으나 추룡은 밀리지 않았다. 강력히 목검을 밀어붙이며 파고들듯 오히려 저 엄청난 거한을 멈칫거리게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저력이 바로 남평 제일의 나무꾼인 그의 실체였다. 땀이 범벅이 되도록 가파른 산을 뛰어오르고 아름드리 나무둥치를 들고 뛰는 등, 뼈가 여물지도 않은 열 살 때부터 사력을 다하다시피 격렬히 스스로를 단련시켜 온 결정!
어찌 보면 검사인 사람이 칼만 잘 쓰면 되지 무엇 때문에 저런 정신 나간 짓까지 하나 싶을 정도의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을 일이지만 응집된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필수의 노력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당연지사로 유곡조차 경악하고 있었다. 실제로 거인이라 봐야 할 그는 공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당연히 그 역시 끊임없이 내공심법을 수련해 왔고. 따라서 어지간한 무사라 하면 열도 그냥 밀어 버릴 정도가 되었는데, 뜻밖에 눈앞의 이 작은 남자가 괴력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청년이었다. 눌러쓴 죽립으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음성도 그렇고, 분명히 아직 어렸다. 한데 내외공으로 다져진 천 근의 힘을 지닌 자신을 오히려 밀어붙이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크아아아압!”
파카카카캉!
“하-!”
투카카카카칵!
“우우우웃!”
검세 역시 일반의 것이 아니다. 그도 넉 자 반의 대목검을 들었지만 자신은 더 길고 두꺼운 다섯 자의 목검을 들었다. 어떻게 봐도 불리한 상황인 게 확실한데 절대 물러서지 않고 붙듯이 마주 서 무지한 공방을 감행하는 것이다.
힘이면 힘, 검이면 검!
“타아아아압!”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나 보기도 처음인 강적이거니와 허라는 것을 찾지 못한 만큼 이런 정도의 상대라면 지닌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 격파하는 수밖에! 격렬히 마주 서 머리, 어깨, 팔, 융단폭격을 감행하듯 폭우 같은 소나기 공방을 주고받다가 한순간 다시 목검이 얽혀 무릎과 무릎을 부딪치는 등 육탄 싸움을 하던 찰나, 그는 평생에 몇 번 쓰지 않았던 수법을 전개했다.
“하-!”
힘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며 빙빙 돌던 중 촤ㄱ, 발끝으로 바닥을 차고 떨어져 나가는 사이, 발이 닿자말자 쉭,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다시 앞으로 덮쳐들며 혼신지력을 다한 강력한 휘어 치기를 감행한 것이었다.
짧게 끊어 치던 수법에서 공력을 다한 원거리 내려치기를 감행했던 것이다.
콰자작!
“-!”
이 수법은 확실히 효과를 본 것 같았다. 떨어져 나갔던 그가 재전진해 오므로 추룡 역시 물러섰다가 순간적으로 다시 전진해 들며 섬전일격, 그의 목 부위를 노리고 목검을 뻗어 가고 있었던 터인데, 천만뜻밖에도 유곡이 노린 것은 몸이 아니라 목검이었다.
창졸간에 시커멓게 섬광을 일으키며 날아든 그의 두꺼운 목검이 추룡의 목검 중간을 후려쳤고, 찰나 귀를 찢는 파음破音과, 파편과 함께 목검이 부러져 튀어 오른 것이었다.
“크아아압!”
파앙-!
“흡!”
하지만 순간 추룡도 절기를 보였다. 분명히 사력을 다한 힘으로 후려치기를 시도해 추룡의 목검을 깨트리는 소정의 효과를 얻은 유곡이긴 하지만 이로 인해 자신의 동작 역시 커져 상당한 허가 드러난바, 목검이 깨어졌다 싶은 순간 추룡의 몸이 그대로 섬광같이 홱, 회전을 한 것이다.
더불어 전개된 환상적인 돌려 차기! 격권의 강력한 발 차기인 대룡파미大龍波尾의 수법으로 힘을 다해 목검을 든 유곡의 오른 손목을 걷어찼고, ‘퍽!’ 순간 유곡의 목검 역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