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괴물怪物 (3)
그러면서도 적은 칼이 닿지 않는 원거리에 있고.
혁상은 대단한 능력의 창수 같았는데, 이런 점을 정확히 헤아리고 창끝을 추룡의 몸 중심을 겨냥한 채 쉭쉭 위협적으로 한 자 간격으로 계속 창을 움직이고 있었으며, 무경록의 고수라 한 만큼 당연히 속도는 악충보의 교관들과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수월치 않은 강적.
죽립 속의 추룡의 눈 역시 칼날같이 번쩍이고 있었다. 아무리 빠른 신법을 지니고 있다 해도 몸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창이 움직이는 속도는 분명히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서투르게 전진했다가는 순간적으로 창을 물린 그가 빛살 같은 찌르기를 감행해 올 것이었고, 안정된 자세를 보면 치고 들어가는 것보다 더 빠르게 물러설 수도 있었다.
전진해 가는 이상 빠르게 물러설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서는 속도보다 창끝은 더 빨리 돌려질 것이었고 베는 속도보다 찌르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처음으로 중단에 놓은 목검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렇다고 계속 과녁처럼 한자리에 서서 버틸 수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추룡은 휙, 허리를 튕겨 앞서의 겨룸에서처럼 훌쩍 삼 장가량 뒤로 물러서 봤다.
그러나 혁상은 서두르지 않았다. 추룡이 뒤로 물러서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눈을 번쩍이며 계속 창을 중단으로 겨냥한 채 한 발 한 발 경계하며 천천히 추룡에게로 다가섰다.
역시 유인당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이르자면 이전의 싸움들, 냉천양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서문한은 몹시 바보스러운 경우에 속했다. 냉천양이 무너지는 것을 본 그는 시작부터 강력하게 목검을 휘두르며 추룡을 압박하는 공격법을 선택했는데 까닭은 순간적인 급공 및 반격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야기 나왔지만 그대로라면 난타전이 될 뻔한 대결이었다. 피하여 추룡은 삼 장 뒤로 몸을 튕겨 물러섰는데 순간 그는 추룡을 치겠다고 섬전처럼 따라붙었다. 그럴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시작에 검망을 일으키며 들어왔을까. 따라붙은 순간 경계심은 사라졌고 그것으로 추룡에게 역반격의 기회를 줬던 것이다.
이래서 바보스러운 경우라 한 것인데 그는 유인을 당한 것이었다.
완벽한 기회가 아닌 한 물러서는 상대를 따라붙을 때는 역공에 대비하며 안전하게 따라붙어야 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상대가 물러섬으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본능처럼 따라붙는 경우가 적잖은 터였는데 서문한이 그런 예에 속했던 것이다.
가위바위보 놀이에 상대가 가위, 할 때 가위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의 동작에 너무 신경 쓰다 보니 명령처럼 먹혀 자신도 모르게 가위를 내어 버리고 마는 반대 지각 작용 같은 것이었다. 이 놀이에 약한 사람은 강한 무인이 될 수 없었다.
자운비 역시 비슷한 경우였다. 처음 대하는 이검류를 경계하여 반응을 살피고자 추룡이 물러서자 그 역시 바로 따라붙으며 공격을 감행했고, 결과 수를 읽혀 패했던 것이다.
하지만 혁상은 달랐다. 괜히 무경록의 고수가 아니겠지만 상대의 예시에 휘말리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냉정하며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정확히 아는 ‘진짜’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며 추룡은 좌 상단을 택했다. 이런 상대라면 모험을 해야 하고, 몸을 줘야만 하는 것이었다.
비워지다시피 한 몸 전체와 어깨 위로 똑바로 세워진 목검.
‘지독히 강한 자였군.’
혁상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는 추룡이 싸움에 있어 매우 침착하고 냉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를 유인할 줄 알았고 위험 앞에서 몸을 내어 줄 정도로 대담하기도 했다.
이 정도가 되면 분명히 일격 필살의 승부였다. 진검이 아닌 게 다행일 뿐이지 틀림없이 단숨에 생사를 겨룰 강력한 공격을 시도해 올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앞의 인물들이 일 합에 당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으로, 어떤 수법으로 공격을 감행해 올 것인가만 남은 셈이었다.
악불비의 눈 역시 어느 때보다 번쩍이고 있었다. 누구보다 창을 잘 아는 게 그였으므로 추룡의 대응에 가장 관심이 가고 있었다.
“……!”
그러나 마음만큼은 크게 편하지가 못했다. 마침내 보게 된 사윗감. 얼결에 인사를 받긴 했지만 이건 정말 아니라는 느낌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시합이나 실력, 선전은 둘째, 속이 다 타 버리는 듯한 그런. 보는 순간부터 표정이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쉭쉭쉭, 다가온 창끝이 다시 추룡의 몸 전면에서 살모사처럼 상하로 위협적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상태는 분명히 처음과 많이 달랐다. 처음에는 그래도 검을 앞세워 중단으로 들고 있었으므로 내밀어진 칼의 바깥쪽에서 창끝이 움직였으나 상단을 취하므로 이젠 몸의 바로 앞, 한 자 앞까지 뻗치며 쉭쉭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대로 창끝 앞에 몸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재미로 보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모른다. 실전이라면 앗 하는 사이에 목숨이 날아가는 그런 상태인 것이었다.
그런 만큼 혁상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혔다. 비무라 해도 상대가 몸을 내어놓고 있는 만큼 어떤 돌발 사태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무예를 모르는 인물이라면 몰라도 앞서 세 사람을 일 합으로 격파했을 정도의 인물이 저런 위험한 자세를 취했을 때는 분명히 무언가 큰 기술 같은 것을 보여 줄 것이었는데……!
어쨌건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인 만큼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그 역시 추룡을 유인해 보기로 했다.
“하아아앗!”
쉬쉬쉬쉭!
침묵을 깨며 큰 호통과 함께 연거푸 사 회 앞 찌르기! 일 차에 벼락같이 창끝을 뻗어 내 보았다. 허초였다. 찌르는 척하며 추룡의 반응을 살폈던 것! 하지만 그가 유인에 넘어오지 않았듯 추룡 역시 허초에 속지 않았다.
그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오 회째 찢어지게 눈을 부릅뜬 채 결국 혁상은 행동했다. 이래도 저래도 상대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반응을 떠보기 위한 허초에 살초를 실어 그대로 추룡의 가슴을 꿰뚫어 버릴 듯 섬전같이 창을 밀어낸 것이었다.
쉭, 소리와 함께 추룡 역시 몸 한 자 앞에서 번쩍이던 창끝이 ‘쭉!’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보았다.
“하아!”
훙훙훙!
“앗……!”
타악!
“승부!”
그리고 번쩍, 심판관의 깃발이 다시 올라갔다.
“아……!”
더불어 보고 있던 군웅의 입에서 일제히 놀라움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짧았지만 손에 땀을 쥘 정도로 강렬했던 긴장의 연속! 이번에는 모두가 본 것이었다. 창이 길므로 정확히 추룡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던 것인데, 그가 실로 상상치도 못할 몸놀림을 보여 줬던 것이다.
코앞에서 쉭쉭대던 혁상의 창이 가슴을 찌르고 들어오는 순간, 선 자리에서 그의 몸이 휘익, 회전을 했다. 팽이처럼 쉭쉭쉭 몸을 돌리며 찔러 들어온 혁상의 창을 피함과 동시에 회전하며 창대를 따라 안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었다. 한 번도 아니었다. 두 호흡이었다.
순간 혁상은 깜짝하는 신색으로 번개같이 창을 물려 들어오는 추룡을 향해 재차 찌르기를 감행했는데, 순간 추룡의 몸이 다시 팽이처럼 회전, 한 호흡같이 계속 쏘아 온 창끝을 피해 창대를 휘감고 가듯 휙휙, 안으로 파고들었고, 더불어 상단의 목검이 혁상의 목 옆, 어깨 위에 떨어진 것이었다.
다시 보니 목검이 혁상의 어깨 위에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찔러 들어온 창대가 추룡의 겨드랑이 사이에 끼어 있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상상을 불허한 움직임으로 두 번째 회전에서 찔러 들어온 혁상의 창대를 한 팔로 휘감으며 검을 내리쳤던 것이다.
진검이었다면 어깨가 동강 났을 것이었다. 목검이라도 마음먹고 쳤다면 쇄골이 으스러졌을 것이고! 언젠가 친구들에게 말한 ‘창대부터 잡아라.’라는 말을 몸소 보여 준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촌각이라 보았다 해도 또한 추룡의 이런 움직임을 모두 본 사람은 없었다. 기합보다 더 빨리 몸은 움직였고, 회전과 함께 목검은 이미 그의 어깨 위에 닿아 있었으니. 그냥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이 순간적인 회전과 함께 근접해 있는 듯 보일 뿐이었다.
“맙소사……!”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군웅은 한결같이 머리카락이 쭉 곤두섰다. 마침내 이곳 신양평에 전에 없던 초신성 하나가 등장했음을 확연히 깨달은 것이었다.
무경록에 기재된 고수 등 도전한 네 사람이 모두 한 수에 떨어져 나간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싱겁게 끝난 승부인 것 같지만 최소한 무예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번 겨룸의 위험도가 얼마만 한 것인지 충분히 알 정도가 되는 것이었다.
픽, 혁상의 입가에조차 실소가 떠올랐다.
뚝뚝,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지는 상태로 심판관의 깃발이 올라가자 바로 창을 거두며 크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탄복……! 흑대협에게 진정으로 탄복했소! 필경 일격 승부를 기해 올 것이라 짐작했지만…… 움직임이 거의 빛살이구려. 이런 엄청난 움직임은 상상해 본 적도 없거니와, 적수가 아님을 시인하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양보에 감사드립니다.”
“와아아아……!”
“최고다!”
추룡 역시 마주 포권을 취해 보였고, 비로소 신양평에 다시 지축이 흔들리는 대함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잠깐이었지만 필생의 정기신精氣身을 다한 겨룸! 혁상은 진심으로 감탄한 것 같았다. 은은히 존경의 빛까지 떠올린 시선으로 이 대단한 무사를 보며 물었다.
“음성으로 미루어 젊으신 것 같은데, 흑 형이라 불러도 좋은지 모르겠구려. 청컨대 존명을 알려 주시지 않겠소?”
추룡은 삼가 거듭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송구하오나 사연이 있습니다. 시작에 말씀 올렸듯 언젠가 밝은 날 뵙게 되면 스스로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저와 같은 자세를 만나면 물러서시며 무찌르기를 하시면 더 좋겠습니다.”
물러서며 찔러라.
“-!”
어려운 동작이었지만 창은 그것이 가능했다.
정확히 발을 뒤로 빼면서 찌르기를 하는 것이었다.
창끝이 빗나갔다 싶은 순간 다른 발을 빼면서 물러서서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창대를 따라 들어와도 물러선 만큼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재대응할 여유가 생긴다.
“헛헛헛……! 그런 수가 있었구려! 음성을 기억했으니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크게 배우고 가오, 흑 형!”
혁상은 만족하여 웃으며 대 위를 내려갔다.
호쾌한 모습!
싱글벙글, 심판관 역시 감탄했다는 듯 웃으며 연거푸 추룡을 가리키는 우측의 깃발을 흔들며 소리쳤다.
“헛헛……! 역시 훌륭한 모습! 진정으로 영웅의 본색이올시다! 오늘 우리 중천보의 춘추대회를 통해 정말 혜성 같은 고수가 출현하셨소이다! 다시 말씀드려도 혁 대협께서는 무경록에 올라 계신 대호걸로서 간발의 차이로 패하셨지만 결코 쉽게 생각할 분이 아님을 아실 것이올시다! 다음 도전하실 분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추룡을 챙겨 소리쳤다.
“심판, 이미 네 판이오! 짧은 겨룸이라도 흑대협께서는 엄청난 정신력을 소진했을 것인데 어찌 물어보지도 않고 속행하시는 것이오?”
“어……?”
심판관은 비로소 잊고 있었던 게 있음을 알았다.
“헛헛……! 놀라운 일이 계속 생겨 실수하였습니다! 흑대협, 세 판을 치르면 자유의사로 쉬실 수 있습니다. 휴식 후 다음 도전을 하실 것인지요?”
하지만 추룡은 변함없이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지치지 않았습니다.”
“헛헛……! 계속하시겠다 합니다! 이제부터 휴식하고 싶으실 때는 언제든 쉬셔도 됩니다.”
둥…… 둥…… 둥……!
“와아아아……!”
금고 소리와 더불어 신양평은 계속 함성으로 흔들렸다.
“장군감이라더니만……!”
어두운 표정이었지만 악불비 역시 실력을 인정했다.
“고수로구나. 비로소 생각해 보니 몽마의 일도 수상쩍다. 맞붙으면 나도 어찌 될지 모르는 게 나한들인 것인데, 필시 저 녀석이 한 짓이렷다?”
“사실은……!”
결국은 비리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악벽강은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붉히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 네 번째 시합으로 인해 추룡은 기어코 무림에 적籍을 올리는 호된 신고식을 치르게 되었다.
“하아아압!”
후웅!
“핫하하하……! 견문만 넓히고 가려 했는데 혁상이 패배를 시인했으니 모처럼 만에 한번 놀아 보자꾸나!”
혁상이 내려가고 금고 소리가 대여섯 번이나 울리는가 했을 때 느닷없이 신양평의 여기저기에서 쩌렁한 외침과 기합성들이 울리더니 운집한 군웅 속에서 실로 대단한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복장에 모습도 가지가지. 칠 척에 달하는 산山만큼 거창한 덩치를 가진 금삼을 입은 거한이 소라도 잡을 듯한 환도를 차고 걸어오는가 하면 대나무처럼 깡마른 남색 장삼을 걸친 인물이 바람같이 쏘아 오기도 했고, 농부 차림을 한 사십 대 중년인이 정말 밭일이라도 마친 듯 곡괭이를 어깨에 둘러메고 오기도 했다.
학당의 훈장쯤 되어 보이는 모습을 한 문사가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 모습도 보였고.
공통된 점은 한결같이 죽립, 방갓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래도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듯 여기저기에서 놀라움의 외침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호면도황虎面刀皇이다! 거구의 금삼인, 호면도황 아닌가?”
“맞는 것 같아! 덩치만 봐도 알겠네!”
“농부 차림의 저 인물은 형주의 태안농부泰安農夫 같은데?”
“신주기사新州奇士! 전부 무경록의 고수들이다!”
“와아아아아……!”
동시에 신양평이 완전히 뒤집어지듯 한 함성 속에 함몰되어 버렸다.
그러했다.
결국 천하의 강자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혁상이 무경록에 올라 있는 인물이라 했듯 패배와 함께 무경록에 기록된 기사奇士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원래 이런 인물들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대회에 잘 나서지 않는 법이었는데, 혁상이 불을 질러 놓은 것 같았다. 함께 올라 있는 그가 패배를 시인한 만큼 한번 겨루어 보자는 것이다.